[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40] 유신정권의 교회 탄압
교구 곳곳서 신부 연행, 구속, 시국기도회 반복
<사진설명>
유신정권 종말 1년 전인 1978년은 교구 곳곳에서 신부가 연행되고 시국기도회가 열리는 등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사진은 시국기도회 장면.
3·1 명동사건 이후 민주화 진영은 유신반대 차원을 넘어 박 정권 퇴진구호까지 외치면서 전면 투쟁에 나섰다. 정부당국도 위기 징후를 포착했는지 전보다 더 무지막지하게 탄압 철퇴를 휘둘렀다. 나에 대한 정보기관 감시도 한층 강화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정보기관 감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내 전화는 24시간 감청된다는 게 상식처럼 여겨졌다. 누군가 숨어서 24시간 전화통화를 엿듣고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면 얼마나 소름끼칠까. 그러나 나는 그게 하도 익숙해져서 으레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정보기관원들도 수시로 주교관에 드나들고 어떤 때는 집무실 밖에서 아예 진을 치고 감시했다. 나를 밀착 감시하던 기관원들 중에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이가 꽤 된다.
한번은 어느 외국 주교님이 도청을 알아낼 수 있는 기계장치를 사다 주셨다. 그런데 워낙 기계치(癡)인지라 몇번 시험해보다 그냥 구석에 밀어 두었다. 내 전화를 엿듣지 않고서는 알아낼 길이 없는 사실을 그들이 꿰차고 있어 놀란 일은 문민정부 들어서도 있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3·1 명동사건 이후 거의 모든 시국문제에 관여하면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정부도 그만큼 강도를 높여 교회를 탄압했다. 교구 곳곳에서 신부 연행과 구속, 그리고 구속사제를 위한 기도회가 악순환처럼 반복됐다. 1977년 한해만 해도 안동교구 사제들이 기도회에 가는 도중 사복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부산교구 사제 10명이 정보부에 끌려갔다.
인천교구에서는 김병상 신부가 구속됐다. 시국기도회, 교권수호기도회 등 유신정권을 규탄하는 기도회가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정부당국은 탄압 고삐를 더 바짝 죄었다.
급기야 1978년 7월 전주에서 큰 충돌이 빚어졌다. 전라북도 각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은 무슨 낌새를 챘는지 총동원되어 전주교구 신부들을 미행, 감시하기 시작했다. 신부들의 상경(上京)을 막으려고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진을 치고 있을 정도였다. 7월5일 밤 몇몇 신부들이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다음날 저녁 경찰이 문정현 신부를 연행하려고 파티마성당(현 효자동성당)에 들이닥쳤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기동대가 신부들을 심하게 구타하고, 박종상 신부를 구타한 후 길에 유기(遺棄)했다. 이른바 '전주 7·6 사태'다. 경찰은 며칠후 대책을 논의하던 한 신부를 구타하고 수녀들의 두건(頭巾)까지 벗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만행이 알려지자 전주교구민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사제단은 11일 일련의 사태에 대한 내무부장관 공개사과를 요구하면서 목숨을 건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때마침 교구장 김재덕 주교마저 해외출장 중이어서 교구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교구와 경찰은 극한대립으로 치달았다.
내가 내려가서 사태수습 방안을 찾아야 할 상황이었다. 전주까지 내려가는 동안 '무슨 말을 해야 신부들이 단식농성을 풀 수 있을까? 단식을 중단하려면 명분이 필요한데…'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내려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전북도지사와 경찰국장이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나를 기다린 모양인데 다행히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들이 허겁지겁 교구청으로 따라와서 면담을 요청했으나 나는 "신부들에게 먼저 사과하기 전에는 만날 수 없다"며 거절했다. 다행스럽게도 경찰국장이 단식농성 중인 사제단 앞에 나가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그 다음 총대리 신부에게 내 생각을 이해시키고 나서 사제들에게 말했다.
"경찰국장이 무릎까지 꿇고 사과했으니 이제 농성을 푸십시오. 내무부장관이 여기에 와서 사과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여러분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신부가 본당과 신자까지 제쳐두고 나와서 민주화 투쟁을 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타교구장인 만큼 순명을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교구장을 대리하는 총대리 신부 말에는 순명해야 합니다."
8일간의 단식투쟁은 이렇게 해서 끝났다. 경찰국장은 신부 미행 감시 중단, 폭행사건 관련자 처벌 등을 약속했다.
전주 신부들에게 말한 대로 신부들이 본당과 신자까지 나몰라라 하고 밖에 나가 조직적 민주화 운동을 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았다. 불의에 저항하는 신부들의 올곧은 양심은 높이 살 만하다. 때론 정치·사회 문제에 나서서 의견을 밝히고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제 본연의 임무까지 등한시한 채 정치·사회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회참여 활동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는 것은 더 더욱 납득할 수 없다.
나는 이 땅에서 독재의 맹위(猛威)가 사그러들고 민주주의 꽃이 피어나길 열망하면서 정치문제에 대한 발언을 많이 했으나 그 선만큼은 분명히 지키려고 노력했다. 아니, 내 나름대로 그 선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전주교구 사태뿐만 아니라 시국기도회가 하루도 쉬지 않고 열리고, 그로 인해 정부와 팽팽하게 대립하던 1978년은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한 지 꼭 10년째 되는 해였다.
그때 서울 생활 10년을 되돌아보았더니 고통스러운 시간이 많았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원로층 신부님들이 교회 민주화 운동을 이해해 주지 않고 다른 목소리를 내신 것이다. 그분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데다 때로는 형님같은 신부님도 계셨다. 고통스러운 순간이 참 많았다.
그러나 넓게 보면 인간은 어떤 처지에서건 나름대로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고통이란 것이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시련이나 고통을 통해 한단계 더 성숙하고 하느님 현존을 체험한다. 따라서 고통없이 산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고통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인생의 깊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남의 고통을 이해할 줄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있는 앙금은 없다.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모두 웃고 지냈다. 다같은 신앙적 형제인데 사소한 정치적 견해차가 무슨 큰 걸림돌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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