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38] 내가 만난 저항시인 김지하
시인 김지하(프란치스코)는 1970년대 반독재 민주투쟁의 상징적 인물이다.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은 한국사회의 거짓과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한 그의 저항문학에서 숨통을 틔웠다.
하지만 그와 첫 인연은 순탄하지 않았다. 1972년 4월 서울대교구에서 발행하는 종합월간지 "창조"에 그의 장편 풍자시 비어(蜚語)가 실리는 바람에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삼백예순날 하루도 뺀한 틈없이 이놈 저놈 권세좋은놈 입심좋은놈 뱃심좋은놈 깡좋은놈 빽좋은놈 마빡에 官짜 쓴놈 콧대위에 吏짜쓴놈 삼삼구라 빙빙접시웃는눈 날랜 입에 사짜 기짜 꾼짜 쓴놈 싯누런 금이빨에 협짜 잡짜 배짜 쓴놈 천하에 날강도같은 형형색색 잡놈들에게 그저 들들들들들들볶이고 씹히고 얻어터지고….
나는 시에 대해 잘 모르지만 교구장인 내 이름으로 발행되는 잡지에 이런 욕설투성이 시가 실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잡지사를 발칵 뒤집어놓고 잡지를 모조리 압수해가는 등 난리가 났다. 김지하는 반공법 위반혐의로 입건되고 구 주간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20여일간 고초를 겪었다.
나는 시 한편을 갖고 왜 이리 야단법석인가 라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 시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런데 표현이 거칠기는 하지만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강렬한 언어와 신명나는 리듬으로 거짓과 불의를 속시원히 풍자한 시였다. 두해 전에 오적(五賊)이란 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적도 있는 김지하를 직접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마산에서 그를 만났다. 폐결핵 병력이 있어서 기소를 면하고 마산결핵병원에 연금되어 있을 때였다. 밤늦도록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추기경님 먹고 살 길이 없어 고향 등지고 공장으로 모여든 젊은이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영남 일대 처녀 총각들이 머지않아 창원(창원공업단지)으로 죄다 몰려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진한 젊은이들이 도시가 내뿜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고 보십니까? 가톨릭이 그들에 대한 사목대책을 세워놓아야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목적 문제를 훤히 내다보듯 예견했다. 비판의식이 강한 저항시인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직접 만나보니까 여러 면에서 흥미를 끄는 젊은이였다.
그는 김민기와 양희은이 내일 결핵요양소에 공연하러 오니 노래를 꼭 듣고 가라고 청했다. 이튿날 부산 일정까지 미뤄놓고 저녁 공연에 참석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난생 처음 듣는 노래 '아침이슬'은 참 아름다웠다. 젊은 가수들의 맑은 목소리와 서정적 멜로디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김지하는 1970년대초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님을 만난 후 소위 원주캠프 사람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회칙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을 읽어본 준비된 신자라고 해서 단구동성당 이영섭 신부가 속성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눈물의 견진성사를 받은 사연은 무척 감동적이다. 당시 마산에서 사도직 협조자로 활동하는 하 마리아라는 오스트리아 여성이 김지하를 자주 만났다. 김지하 가슴에 불덩어리 같은 분노가 끓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그걸 누그러뜨리느라 오랜 시간 대화를 했던 것 같다.
김지하는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 때부터 감옥에 드나들면서 숱한 수모와 고문을 당했다. 그는 자신을 붙들어다 인간 이하 취급을 하면서 고문한 정보기관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하 마리아는 우선 당신 자신과 화해하고 그 다음에 그들을 용서하라고 타일렀다. 그리고 견진성사를 받으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김지하는 용서라는 말에 반발했다. 내 정신이 멀쩡한데 그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느냐면서 울분을 토해냈다. 하 마리아와 결핵요양소 신자들은 장병화 주교님 주례로 거행될 예정인 견진성사를 앞두고 9일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하 마리아는 김지하가 분노와 증오심를 훌훌 털어버리고 주님 앞으로 나오길 간절히 기원했다. 견진성사는 피끓는 민주투사 김지하가 복음을 받아들이냐 아니면 거부하느냐의 문제였다.
견진성사 하루 전 그러니까 9일 기도가 끝나는 날 장 주교님이 결핵요양소에 오셔서 견진대상자들에게 미리 고해성사를 주셨다. 김지하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하 마리아는 포기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잠시후 김지하가 두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비장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곧장 장 주교님에게 눈물의 고해성사를 보았다. 다음날 견진성사를 받을 때도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날 홀로 뒷산에 올라가 고민하다가 그래 용서하자고 소리를 지르고 내려와 고해실로 들어갔다고 한다.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1975년 2월 지 주교님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런데 동아일보에 연재한 옥중수기가 빌미가 되어 한달을 넘기지 못하고 또 투옥됐다.
이때부터 사법당국은 그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올가미를 씌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눈엣가시 같은 김지하를 제거할 목적으로 그를 공산자의자로 조작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담당 변호사들은 지하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걸 법정에서 증언해 달라고 요청하길래 기꺼이 응했다. 그는 신앙인이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그가 증오를 용서로 승화시키는 것을 보고서 그 점을 확신했다. 내가 아는 한 공산주의자들은 용서라는 걸 모른다. 그러나 재판부에서 증인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방청석에 앉아 재판을 지켜보아야 했다.
법정에서 억지춘향격으로 김지하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검찰측 주장과 거기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하는 김지하의 진술은 한 편 드라마 같았다. 재판후 담당 변호사들은 좋은 시절이 와서 이걸 드라마로 만들면 꽤 재미있겠다 는 말까지 했다.
시인 김수영은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고 노래했다.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세력의 끈질긴 생명력과 열망은 꺾이지 않았다. 1976년 초봄 명동에서 일어난 또 다른 사건이 그걸 입증했다.
[평화신문, 제761호(2004년 2월 22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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