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39] 3.1 명동사건
유신정권 퇴진요구 '민주구국선언문' 발표
<사진설명>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과 신자들이 1976년 3월 중순 서울 명동 성모병원 마당에서 `3.1 명동사건` 구속자 석방과 헌정질서 회복을 촉구하는 시국기도회를 열고 있다.
유신정권은 1975년 5월 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유신체제를 비방하거나 반대하는 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영장없이 체포해 1년 이상 징역형에 처한다는 초강경 조치였다. 정부는 국민의 입과 귀를 더 단단히 틀어막고 순종을 강요했다. 언론은 물론 민주화 진영조차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1일 무거운 침묵이 깨졌다. 3·1절 기념미사와 천주교·개신교 합동기도회가 열린 명동성당에서 유신반대를 넘어 유신정권 퇴진까지 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됐다.
천주교와 개신교 성직자, 사회원로와 재야세력이 힘을 모아 유신정권을 향해 포문(砲門)을 연 소위 '3·1 명동사건'은 유신통치가 시작된 이래 가장 큰 파장을 일으켰다. 재야인사와 개신교 목사들이 주도하고 천주교 신부들이 적극 협조한 사건이다.
정부의 강경 대응이 만만치 않았다. 그날 기념미사와 기도회가 조용히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법당국은 이튿날부터 관련자들을 줄줄이 연행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종교행사를 빙자한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이라고 발표하고 관련 피고인 18명 가운데 김대중·문익환·안병무씨 등 11명을 구속시켰다. 가톨릭에서는 신현봉(원주)·문정현(전주)·함세웅(서울) 신부가 구속되고, 김승훈·장덕필 신부가 불구속 기소되었다.
난 그날 기념미사에 참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구속 사태를 막을 방법을 찾아보았다. 박 대통령과의 담판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부 태도는 강경했다. 유신비판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서릿발같은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 판국에 거물급 인사들이 정권에 정면 도전했으니 흐지부지 넘어갈 리가 없었다. 이 기회에 반유신 세력을 뿌리뽑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시국기도회(3월15일)에서 이런 강론을 했다. 당시 교회 상황에 대한 내 고민의 일단이 담겨 있는 강론이다.
"교회 안에서 오늘 기도모임이 좋으냐, 나쁘냐를 놓고 의견이 갈려 있습니다. 저도 많이 생각했으나 기도모임을 열기로 최종 결정했습니다. 집안에 우환이 생겼고 그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형제들이 있으니 식구끼리라도 모여 걱정을 나누는 게 당연합니다. 더 큰 이유는 옥고를 치르고 있는 형제들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와 나라를 위해서 하느님께 매달려 구원의 빛과 은총을 간구하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 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 신자들에게 한가지 당부했다.
"사건 관련 신부들을 무조건 잘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잘못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 행위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나름대로 신앙적 소신과 양심에서, 더 나아가 보다 밝고 의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애국심에서 한 행동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방법을 탓하더라도 순수한 동기는 탓하지 마십시오. …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반대자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의견이 다르다고 사람들을 단죄하여 하느님의 엄한 심판을 자초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교회 분열을 우려한 말이었다. 한쪽에서는 "정치를 좋아하는 추기경이 젊은 신부들을 부추겨 데모를 한다"며 교회 정치참여를 맹비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교회가 미온적 태도를 버리고 더 과감하게 민주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었다.
정치적 이념 차이로 인해 갈등이 증폭될 때마다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나는 어느 편에 서야 하나. 이대로 간다면 교회를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교회 공동체라고 의견이 100% 일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분열은 기필코 막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비록 교회는 내부 갈등을 겪고 있었지만 교회 밖에서는 가톨릭을 우호적으로 평가해주었다. 정의와 인권을 위해 외롭게 싸우는 데 대한 무언의 격려를 느낄 수 있었다. 구속자를 위한 성금이 곳곳에서 답지해 내가 감사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혹자는 가톨릭의 70, 80년대 민주화운동이 신자증가, 특히 지식인층 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 말에 일정 부분 수긍한다. 그러나 단정할 만한 근거는 갖고 있지 않다.
3.1 명동사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재판과정을 지켜보고, 구속자 옥바라지하는 것밖에 없었다.
당시 검찰과 재판부는 '권력의 시녀'였다. 사건 관련자들에게 정부 전복을 선동했다는 올가미를 씌우는 과정에서 그 점을 새삼 확인했다. 터무니없는 논리를 동원해 권력에 맹종하는 법조인들을 보면서 '저들이 저런 자세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나' 하며 속으로 걱정했다.
사실 옥바라지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신현봉 신부는 홍성, 문정현 신부는 김해, 함세웅 신부는 공주교도소에 분산 수감돼 있었다. 가톨릭 신자 김대중씨(토마스 모어)는 진주교도소에 있었다. 전국을 순회하는 면회를 이틀에 걸쳐 다녀왔다.
그때 참으로 고마웠던 것은 사태를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신부들 자세였다. 옥에 갇히면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심리적으로도 위축될 텐데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당당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통을 받아들이셨듯이 신부들도 민주화 제단에 자신을 바치고 고통을 감내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3·15 시국기도회 강론에서 "사랑의 증거가 십자가 죽음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구속 신부들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좋아하는 책 '기도의 체험'(안토니 블룸 저)에서 인용했다.
김대중씨는 "정의와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데 교회가 왜 적극 나서지 않느냐"며 일장훈시하듯 열변을 토했다. 난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옥중 묵상내용을 잠시 들려주었는데 가끔 그 말이 생각난다.
"하느님은 교회가 진실로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그들이 교회에 오는 것조차 귀찮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가난한 밑바닥 인생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민주세력은 3.1 명동사건을 계기로 다시 응집했다. 그러나 교회와 정부 관계는 팽팽한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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