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충남 서산시***한국 천주교 순교 聖地 순례ㅡ서산 해미면ㅡ해미 순교성지

문성식 2022. 6. 26. 11:13

천주교 순교聖地ㅡ서산 해미면ㅡ해미 순교성지




▲해미 순교 성지


해미 성지는 100년 동안 무려 3천 명으로 추정되는 천주교 신자들을 참혹하게 처결한 조산리 순교 현장이다.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수많은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던 거룩한 순교터다.


해미읍내에는 순교 기념지가 여러 곳이 있다. 서문 밖과 옥터, 그리고 소위 생매장지라고 전해지는 조산리다. 조산리는 해미읍에서 좀 떨어진 내 건너편 벌판에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있는 곳이었다. 바로 현재 해미 성지로 조성된 곳이다.


▲해미읍성 서문


해미순교성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기에 처형된 해미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된 순례지이다. 1935년 서산성당 신부 범바로의 조사와 발굴에 의해 해미 순교지가 널리 알려진 이후로,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순교지에 대한 기념과 순례가 지속되고 있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諡聖)하고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신앙 활동의 모범으로 공경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 천주교의 순교 성인들에 대한 기념사업이 본격화되었으며, 같은 해 생매장터를 매입하였다.

해미순교성지가 위치한 자리는 여숫골 혹은 생매장터로 알려진 순교 장소로, 1935년의 발굴을 통하여 유골과 유물이 확인된 곳이다. 서산 해미읍성(瑞山海美邑城) 서문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1㎞ 지점에 위치해 있다. 서산 해미읍성의 진남문에서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약 500m 진행한 뒤, 국도 29호선으로 진입하여 서산 방면으로 800m 정도 가면 이정표가 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100m쯤 들어가면 해미순교성지에 이른다.


▲해미 순교 성지 위치도


▲해미순교성지 위치도


▲해미읍성 서문


남동에서 북서로 서산시 해미를 관통해 흐르는 해미천 변에 인접해 있는데, 박해 당시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늪과 숲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읍성과 그 주변에 비해 인적이 드물고 시신을 따로 수습할 필요가 없어 많은 인원의 신자들을 처형하기에 유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미천을 따라 기다란 모양으로 조성된 성지는 약 2만 8400㎡의 부지에 기념 공원 형태로 되어 있다. 천변의 특성상 지대가 낮고 평평하다. 성지 내에는 순교를 기념하는 여러 가지 건축물과 조형물 그리고 유적들이 분포해 있다.


▲서문 건너편 자리갯 돌 성지


옛날 미신에 따라 부정한 것은 서문으로 내다 버렸다 천주교 신자들도 서문밖에 끌어내어 처형하였다. 신자들은 이 서문을 통하여 끌려 나가면서 배교의 표시로 성물을 모욕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잡아들일 때 빼앗았던 십자가와 묵주 등을 이 문의 난간에다 넣어놓고, 지나가며 밟게하여 천주학을 버리고 목숨을 살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그님들은 성물에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문턱을 넘어 가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이 문의 누각에는 지성루(枳城樓)라 쓰여 있는데, 본래 탱자나무(枳)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이 서문이란 그 님들이 가시밭 이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그 님들을 밀어넣고 돌로 찧던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하수구를 가로 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는 그야말로 사람 도마였고, 여기저기 시체가 쌓여 썩고 피가 땅에 젖어 남아 흐르는 곳이 서문 밖이었으니 여기서 죽은 목숨을 몇 천이나 되었는지 헤어릴 수 없어 그저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던 곳이었다'라는 말만 남아 있다. 1790년 부터 1880년까지 약 2천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이곳에서의 사형방법은 돌위에 매어치는 방법, 참수 및 교수, 겨울에 얼려죽이는 것이었다.


▲서문 건너편 자리갯 돌 성지


▲서문 건너편 자리갯 돌 성지


▲순교 현양비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지금은 해미 진영 서문 밖 바로 앞에 있는 칠십평 좁은 순교지에 자리개질해서 죽였던 돌다리가 보존되어 있는데, 1956년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보존되었다가 1986년 9월에 원위치로 귀환되었고 바로 그 곁에 1989년에 세운 순교 현양비가 있다.


▲서문밖 순교 현양비


▲서문밖 순교 현양비


▲순교현양 비문


▲순교 자리갯돌 안내판


▲순교 자리갯돌 안내판


▲2009. 1월 해미성지로 옮긴후 모형물이 설치 됐다


▲서문밖 사형장 개울 위에 있던 돌다리이다. 길이 420cm, 너비 150cm, 두께 30cm이다. 몇명의 병사가 신자의 몸을 들어 올려서 내려뜨리면 머리가 깨져서 죽어갔다


▲순교 자리갯돌


▲순교 자리갯돌


▲자리갯돌 설명문


▲순교 자리갯돌


▲순교 자리갯돌


▲순교 자리갯돌


▲해미성지 인근의 해미읍성 곳곳에 설치된 십자가의 길


해미 고을은 조선 중기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위한 진영이 있던 곳으로 진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며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는데, 공식적인 박해 외에도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의 옥사에는 늘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나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자리개질 등으로 죽어갔습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이나 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순교한 이들의 정확한 신원과 행적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수천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의 이름과 출신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생매장과 수장으로 숨져 간 진둠벙 주변에는 십자가의 길 14처와 노천 성당이 조성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 읍성에는 동헌과 교우들을 가두었던 옥사가 복원되었고, 그 앞에는 고문대로 쓰던 호야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서문 밖 순교지에는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하여 보존하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2009년 1월 다시 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고, 1989년에 건립한 순교현양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1935년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원래의 순교 터인 해미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었습니다.


해미 성지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무명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성당 뒤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을 건립했습니다.


유해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2008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해미 성지는 2015년까지 지자체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순례지로 개발할 예정입니다.


▲해미 읍성 곳곳에 설치된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2처


▲십자가의 길 4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6처


◆십자가의 길 14 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


▲해미읍성 진남문


해미읍성은 사적 제 116호의 성으로 성곽길이 1,800m, 성곽 높이 5m, 면적 60,000평으로, 이 성은 1421년(세종 3년)에 왜구의 해안 지방 침투를 막기 위하여 축조하였으며, 조선 시대 평지에 축성한 석성으로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성이다.


충청남북도의 군사를 통할하던 병마절도사가 230여년간 주둔하였다. 1651년(효종 2년)에 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고 이어서 반양리에 있던 해미현이 이곳으로 옮겨와 읍성이 되었으며 겸영장이 현감이 되고 호서좌영으로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군사권을 관장하였다.


성벽 주위에는 탱자나무를 심어 적병을 막는데 이용하였다 하여 ‘탱자성’이라고도 불렀으나 현재는 대부분 없어지고, 진남문에서 관아문에 이르는 진입도로 주변에만 탱자나무가 있을 뿐이다.


당초 성읍 내에는 학교, 면사무소 등의 관공서와 민가가 많이 있었으나, 정비 복원 사업 추진을 위하여 모두 철거되고 현재는 관아문과 동헌 등이 있다.


또 이 읍성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 간 근무하였고,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정조 대왕 당시 잠시 유배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미읍성은 이러한 군사적, 행정적인 측면과 아울러 천주교 박해 80년간에 1천명의 순교자가 처형된 성지로도 유명하여 신앙적인 측면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다.


▲진남문


▲해미읍성 안내문


▲해미읍성 내부 전경, 정면이 동헌쪽, 감옥(우측), 서문(좌측)?


▲해미 동헌


▲해미 동헌


▲해미 동헌


▲감옥 밖 순교 기념비


▲기념비 뒷면


▲감옥앞 호야나무


감옥터에서 당시 손발을 묶이고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리어 고문대로 쓰여지던 호야나무이다.


▲감옥앞 호야나무 이력서


▲해미감옥


높이 5m, 길이 1,800m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이조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쌓인 울 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 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쓰러져 가던 감옥은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만 남아 있다.


▲해미감옥


1950년대에 해미 공소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하여 감옥터 1800여 평을 확보하고 공소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에 정부가 문화재 관리 정책의 명목으로 공소 강당을 철거하고 그 터를 일부 보상, 일부 징발하고 순교 기념비만 새로 세워주었다


▲안내판


▲동헌 형장(刑場)


▲동헌 형장(刑場)


▲동헌 형장(刑場) 임시 옥사


▲동헌 형장(刑場) 임시 옥사


▲동헌 형장(刑場) 임시 옥사내


▲해미감옥 십자형틀


▲당시 민가를 재현


▲당시 민가를 재현


▲당시 민가를 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