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충남 천안시***한국 천주교 순교聖地 순례ㅡ천안시 북면 성거산 순교 성지

문성식 2022. 6. 26. 11:33

천주교 순교聖地ㅡ천안시 북면 성거산 순교 성지




▲성거산 성지 입구


▲성거산 성지 위치도


성거산 순교 성지는 천안시 북면 성거산 상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두 군데의 순교자 묘소와 소학동 교우촌 유적지가 있다. 성거산(聖居山)이란 말뜻 그대로 교우들이 거룩하게 살던 산이다.


순교자 묘소에는 제1묘역 38기, 제2묘역 36기의 순교자 및 교우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묘소에서 1km 정도 거리에 있는 소학동은 병인박해 전부터 있었던 교우촌이다. 천안 일대 여러 교우촌의 중심지였고 선교사들이 은거하면서 사목했던 곳이며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교우촌이다.


소학동 출신 유명 순교자는 1866년 음력 11월 8일 교수형으로 공주 감영에서 순교당한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 형제와 배문호(베드로), 고의진(요셉), 그리고 최천여의 며느리이다. 목천의 '소학골'(일명 씨아골 도는 쇠약골)은 현재의 행정 구역은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 독립 기념관 뒤편의 흑성산 가까이 있는 성거산(579m)의 동쪽 계곡이다.


지금 이곳을 가려면 북면 도촌리를 거쳐 도보로 가거나 천안에서 성거읍을 거쳐 입장으로 가다가 오른족으로 나 있는 성거산 통신 도로(입장면 시장리)를 타고 가면 된다. 차량을 이용하려면 두 번째 노정을 택해야 한다. 이제 소학골은 폐동이 되었고 그 아래 '사리목'에 세 집이 남아 있는데, 그마저도 농한기에는 두 집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1910년 무렵만 해도 소학골과 사리목에서 모두 공소가 치러졌으며, 성거산 남쪽에 있는 옛 교우촌인 목천의 서덜골(일명 서덕골)과 매일골, 먹방이(현 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에도 많은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후 1930년대까지 신자들이 계속해서 이주하면서 공소는 그 아래쪽의 마을로 이전되었고, 지금은 목천의 송전 공소만이 유지되고 있다. 성거산 자락의 깊은 산중에 신자들이 정착하여 신앙 공동체를 일구기 시작한 것은 교회사에서 전이형(轉移形) 공동체가 사라지고 정주형(定住形) 공동체가 형성되는 1830년대였다.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백부인 최영렬도 이 무렵에 '서덜골' 교우촌으로 이주하였으며, 기해 박해 이후에는 최 신부의 둘째 아우인 최선정(안드레아)이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박해가 계속되면서 서덜골 이웃의 소학골에도 신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 척박한 골짜기에서 움막을 짓고 생활하거나 화전을 일구어 얻은 오죽잖은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신앙만은 잃지 않았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이 깊고 높은 산중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덜골과 소학골 교우촌은 산자락과 골짜기로 이어지는 진천 백곡의 배티, 삼박골 교우촌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1864년 칼래(Calais, 姜) 신부는 자신의 거처를 경기도 손골(현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에서 소학골로 옮겼다.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사목 관할 구역을 조정하면서 경상도 서부에서 충청도·경기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비교적 건강이 좋은 칼래 신부에게 위임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소학골은 칼래 신부의 여름 휴식처요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칼래 신부는 때때로 백곡의 삼박골로 가서도 휴식을 취하였다. 이처럼 소학골·삼박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칼래 신부는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던 도중에 1866년의 병인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신부는 그때부터 포졸들에게 쫓기면서 문경 인근의 교우촌과 동굴을 오가며 은신하였으나, 발각될 위험이 커지자 여름 휴식처가 있는 소학골 교우촌에 가서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1866년 5월 10일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을 출발한 칼래 신부는 이틀에 200리를 걸어서 연풍, 괴산, 진천을 거쳐 배티의 삼박골에 도착하였다.


신부는 삼박골의 거처에서 신자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5월 말까지 보름 남짓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목천 소학골로 거처를 이전하였다. 한편 그의 동료 페롱(Feron, 權) 신부도 7월에는 소학골로 와서 칼래 신부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10월 초에는 둘이 함께 소학골을 떠나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소학골에 박해의 풍파가 몰아친 것은 이로부터 얼마 안 되어서였다. 이때 포졸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신자들이 풍비박산하여 도망하였으나, 최천여(베드로)와 최종여(라자로) 형제, 칼래 신부의 복사를 한 배문호(베드로), 고 요셉, 채 서방 며느리 등은 교우촌에 남아 있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즉시 이들을 공주로 압송하였고, 4명 모두 공주 영문의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아 1866년 12월 14일(음력 11월 8일)에 순교하였다. 순교 후 이들의 시신은 한 신자에게 거두어져 소학골에 안장되었다. 그 후에도 소학골에서는 다시 몇몇 신자가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배문호의 무덤은 현재 사리목에서 소학골로 가는 길목에 안장되어 있다. 그러나 나머지 순교자들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다. 후손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타지로 떠돌다가 신앙의 자유 이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탓에 선조들의 무덤에 대해 전혀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해가 끝난 뒤 선교사들은 다시 성거산 골짜기에 흩어져 살고 있는 신자들을 찾았다. 특히 두세(Doucet, 丁) 신부는 서덜골에 여름 휴식처를 두었으며, 베르모렐(Vermorel, 張) 신부도 한때 이곳에 거처하였다.


1900년 1월 8일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 지역을 순방하고 이러한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곳 순교자의 무덤과 교우촌 신자들의 줄무덤이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였다.


▲성거산 순교지 안내문


▲순교자의길 조각품, 순교자


▲그들의 빈자리


▲ 길


▲순교의 길


▲잠행


▲순교의 꽃


▲거룩한 손


▲거룩한 발


▲순교자의 길, 제 2 줄 무덤에서 교우촌으로 넘어가는 길에 나열되어있다


▲성모광장 소학골 


▲성모광장 야외 제대


▲줄 무덤


▲줄 무덤


▲줄 무덤


▲줄 무덤


▲십자가의 길, 제 1 줄 무덤에서 제 2 줄 무덤으로 가는 길가에 위치해있다.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2처


▲십자가의 길 3처


▲십자가의 길 4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6처


▲십자가의 길 7처


▲십자가의 길 8처


▲십자가의 길 9처


▲십자가의 길 10처


▲십자가의 길 11처


▲십자가의 길 12처


▲십자가의 길 13처


▲십자가의 길 14처


▲십자가의 길 15처


◆십자가의 길 14 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