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인천 강화군***한국 천주교 순교 聖地 순례ㅡ강화읍 북문길ㅡ강화 진무영(鎭撫營) 순교 성지

문성식 2022. 3. 24. 08:06

한국 천주교 순교 聖地 순례ㅡ강화읍 북문길ㅡ강화 진무영(鎭撫營) 순교 성지




▲천주교 강화성당


▲강화 진무영성지 위치도


▲강화성당


▲그리스도상


▲성모상


▲강화성당


▲강화성당


▲강화성당


▲강화성당 내부


▲강화성당 내부


▲강화성당 내부 제대


▲강화성당 내부 출입문


▲옛 진무영(鎭撫營) 부근


▲옛 진무영(鎭撫營)


▲옛 진무영(鎭撫營) 순교 성지


▲옛 진무영(鎭撫營)


조선 시대에 해상 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이다. 1700년(숙종 26년) 강화부(江華府)에 그 본영을 설치하고, 1779년(정조 3년) 통어영(統禦營)을 병합하였다가 1789년(정조 13년)다시 분리하였다. 특히 1866년의 병인양요 이후, 외국 선박의 출입이 빈번하여 쇄국 정책을 쓴 당시로서는 수도의 관문을 지키는 국방상 중요한 군영이었다.1887년(고종 24년) 심영(沁營)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진무영에는 강화유수가 겸임하는 사(使 : 정2품) 1명, 중군(中軍 : 정3품) 1명, 진영장(鎭營將 : 정3품) 5명, 경력(經歷)이 겸하는 종사관(從事官) 1명, 총관(摠官) 4명, 파총(把摠) 10명, 초관(哨官) 63명, 교련관(敎鍊官) 10명, 기패관(旗牌官) 71명, 군관(軍官) 15명이 배치되었다. 진무영(鎭撫營)은 성당 부근 농협 자리(현재 은혜교회 자리) 근처로 추정된다.


▲강화성당 진무영 순교지 


인천교구 강화 성당 구내에 있는 진무영 순교성지는 조선시대에 해상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이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다.


진무영은 1700년(숙종 26년) 강화부(江華府)에 그 본영을 설치하고, 1779년(정조 3년) 통어영(統禦營)을 병합하였다가 1789년(정조 13년) 다시 분리하였다. 특히 1866년의 병인양요 이후, 외국 선박의 출입이 빈번하여 쇄국정책을 쓴 당시로서는 수도의 관문을 지키는 국방상 중요한 군영이었다.


강화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하지만 육로의 경비와 기찰이 심해지자 해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는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외세와 충돌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박해 또한 극심하였다. 1866년 병인년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진무영에서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5월 22일 서울 애오개 회장인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주기(張周基, 요셉, 1803~1866) 성인의 조카 장치선이며,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1830~1911)의 형 박 서방, 조 서방 등도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1866~1871)로 성직자 12명중 9명과 신자 수천 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명인 리델(Ridel, 李福明, 1830~1884, 펠릭스) 신부를 배로 천진으로 탈출시키고, 상해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리델 신부는 박해 참상을 프랑스 공사에게 알려 로즈(Roze, 魯勢) 제독의 강화도 출병을 촉발하였다. 현재 이들 네 순교자를 기념하는 야외제대와 현판이 강화 성당 구내 한편에 마련되어 있다. 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년) 9월(양)과 10월 등 2차에 걸쳐 프랑스 함대가 서울 한강 연안(1차 정찰)과 강화도를 침범(2차 점령)한 사건을 일컫는다.


프랑스 성직자 9명이 처형된 사실을 추궁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는 함대 7척에 병사 800~1,200여 명을 파견하였다. 10월 초 강화도 근해에 정박한 함대는 포함과 연락선을 강화 갑곶에 파견, 마침내 상황은 전투로 발전하여, 강화부를 점령하였지만, 문수산성 전투(10월 26일)와 정족산성(전등사) 전투(11월 7일)에서 패한 프랑스 군은 강화읍을 불 지르고 11월 11일 강화 점령 1개월 만에 후퇴하였다. 이로 강화 지방에서는 새로운 박해가 일어났다.


◆성모상

▲그리스도 십자고상


◆ 병인양요와 병인박해

1866년(고종 3년) 병인년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을 일컫는다. 프랑스 성직자 9명이 처형된 사실을 추궁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는 함대 6척에 병사 600여 명을 파견하였다.


10월 강화도 근해에 정박한 함대는 포함과 연락선을 강화 갑곶에 파견, 마침내 상황은 전투적으로 발전하여 전등사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은 강화읍을 불 지르고 10월 10일 후퇴하였다. 이로 인해 강화지방에서는 새로운 박해가 일어났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어, 주교를 비롯한 9명의 선교사와 남종삼 등 저명한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잡히어 처형되는 참사가 계속되었다.


리델 신부는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함께 선편으로 조선을 탈출하여 천진으로 가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을 만나, 조선에서의 박해소식을 알리는 한편, 살아남은 두 신부를 구출하고, 또한 가능한 한 조선 교회를 구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로즈 제독은 10월 11일(음) 모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출발, 물치도에 정박하고서, 14일(음)에는 강화도 갑곶에 육전대를 상륙시키는 한편, 한강 입구를 봉쇄하여 16일(음)에는 강화부가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이용희는 19일(음) 로즈 제독에게 격문을 보내어 조선 침공의 부당성을 항의하고 곧 철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로즈 제독은 동일자로 회답하면서 선교사 살해를 문책하는 한편, 그 주모자를 엄벌하고 전권대사를 보내어 조약의 초안을 작성케 할 것을 요구하였다. 문수산성과 전등사에서 연이은 패전과 곧 닥쳐올 추위로 염하(鹽河)가 얼어붙어 보급이 끊길 우려가 있었으므로 로즈 제독은 마침내 철군을 결심하게 되어 10월 21일(음) 완전히 조선 해안으로부터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병인양요는 끝을 맺었다. 프랑스는 위신은 추락되었으나, 그들은 재차의 침략을 도모하지 못하고, 통상의 요구 등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방향으로 조선과의 접촉 협상을 시도함으로써, 조선의 국제적 지위와 청국과의 관계에서 조선의 독자성이 뚜렷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러나 대내적으로는 병인양요로 인해 종래의 쇄국양이 정책이 더욱 확고하게 되었고, 천주교를 더욱 박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은 프랑스 군함이 양화진까지 침범하였다 하여 그 곳을 새로운 형장으로 정하고, 이후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그 부근 절두산에서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

■ 순교자

◆ 최인서 요한 (1811~1858)


일명 영준(英俊). 경기도 용인 굴암 태생으로 7~8세 때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1839년경에 용인 교우 이학진의 권유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김씨와 혼인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상처 후 주 데레사와 재혼하였고. 서울 아현에 거주하며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물론 홍봉주(토마스)?정의배(마르코)?최형(베드로)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서상기(베드로) 등과 함께 수차례 변문(邊門)을 왕래하며 중국 교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66년 초 병인박해가 일어났으며, 10월에는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이때 최인서는 강화도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리델 신부를 만났고.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에는 교우들과 함에 리델 신부를 따라 중국 상해로 갔다.

1867년 4월(음)에 장치선, 김계쇠 등과 함께 귀국한 그는 1867년 10월(음) 서울 산막리로 이사하여 쌀장사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 4월 10일(음)에 아내 주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어, 5월 22일(음) 박순집의 형, 조 참봉의 부친과 함께 58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 장치선 (1830~1868)


세례명은 미상, 그는 장주기(요셉)의 조카로 5세 때 경기도 양지 언리에 사는 오자현에게 천주교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이때 세례명도 분명히 지었을 것이나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자라서 어른이 된 뒤에 허다한 경문을 보고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그가 만나보지 않은 선교사가 없었으니 페레올, 베르뇌, 다블뤼 주교.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리델, 칼레, 페롱, 오메트르, 볼리외, 위앵,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을 경향 각처에서 만나 보았다. 그는 체포되어 1868년 4월 18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때 그는 모든 사실을 숨기지 않고 순순히 자백하였다. 그는 리델 신부를 탈출하게 하고 프랑스 함대를 불러들여 침략하게 하며 국내의 정세를 중국에 있던 리델 신부 등에게 긴밀히 연락하는 등의 일을 도맡아 실행한 교인이었기 때문에 연루자들이 모두 잡힐 때까지 포도청에 갇혀 있다가 7월 13일 강화도에서 최인서와 함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순교할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진무영 순교성지


◆십자가의 길 14 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