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경기 양평군***한국 천주교 순교터 聖地ㅡ양평읍 오근리ㅡ양평 양근 순교터 성지

문성식 2022. 3. 27. 07:22

한국 천주교 순교터 聖地ㅡ양평읍 오근리ㅡ양근 순교터 성지




▲양근성지


신앙 선조들의 순교 기록에 보이는 '양근'이라는 지명은 대체로, 초기 한국 천주교회 지도자 권철신(權哲身,암브로시오, 1736-1801),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42-1792) 형제의 고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는 양평군이다.


권일신의 친아들로 권철신의 양자가 되었었고, 순교한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노, 1769-1802)의 고향이기도 하다.


기록에 보면 권상문이 '양근 한강포' 출신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서양 기록에는 권씨들이 '한감개(Han-Kam-Kai)'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들은 한강개 즉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태어나 살았던 것이다.


이 곳에 전국각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 문하에 모여들 정도로 권철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 중의 하나였으므로, 권철신, 권일신 형제의 영향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가 배출되었다.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 전라도 완주의 유항검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양근 순교성지 위치도



▲양근성지


이곳은 1801년 신유(辛酉) 박해 때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1801)와 그들의 사촌 누이 윤점혜(尹點惠, 아가타, ?-1801), 윤운혜(尹雲惠, 마르타, ?-1801) 자매 등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애초에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태어났는데, 그리 멀지 않은 양근 한강개로 이사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권철신의 이웃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웃인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간 윤유일은 학문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스승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기에 이른다.


영세 후 그는 조선 신자 대표로 북경(北京)을 방문하여 1790년 북당(北堂) 성당에 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후 선교사를 맞아들이는 일에 매진하다가 5년 만인 1795년 드디어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려 하다가 그해에 순교를 당하게 된다. 윤유일의 순교 이후에도 신앙 생활을 굳건히 하던 윤유오와 사촌동생 윤점혜, 윤운혜도 결국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특히 언니 윤점혜는 최초의 여회장인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0~1801)을 도와 여성 신자들의 교육에 힘썼었을 뿐만 아니라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윤운혜는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 ?~1801)와 혼인하여 교리서와 성물을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던 최초의 양반 부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1785년 봄에 일어난 명례방 사건으로 신앙 공동체가 와해되고, 교회 지도층에서 다시 재건을 꾀하기 시작한 것은 1786년부터였다.


이때 그들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수립하였고, 이승훈을 비롯하여 다른 10명의 신자들은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788년 무렵에 류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이 그 오류를 지적하여 성사 집전이 중단되고, 이어 북경에서 성직자를 영입해 와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고난의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로 선발된 사람이 바로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었다.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楊根)의 '한강개'(漢江浦, 지금의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곳은 바로 그의 스승이자 이벽과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루가), 류항검,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고향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녹암계(鹿庵系) 인물들이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토론하던 마을이었으니,


1784년에 이벽이 이승훈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찾아간 곳이 바로 여기였다. 이에 앞서 녹암계 인물들이 권철신, 이벽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던 곳은 한강개 뒤편에 위치한 앵자봉 자락의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이었다.


▲양근성지


양근은 주문모 신부님을 모셔오기 위하여 두 차례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바오로)과 그 동생 윤유오(야고보)와 4촌 여동생 윤점혜(아가다), 윤운혜(마르타)와 유한숙, 권상문(세바스티아노), 김일호, 이 아가다, 그리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 등이 태어나거나 살다가 체포되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곳이다.


그 중 윤유일, 윤유오, 윤점혜, 윤운혜, 권상문 등은 현재 시복 추진중인 분들이다. 윤유일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밀사였다. 이후 윤유일은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을 다녀왔으며, 1789년에는 라자로회 의 북당 선교 단장인 로(Raux, 羅黃祥) 신부에게 조건 세례를 받고, 남당(南堂)에 있던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어 1790년에는 다시 구베아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약속받고 귀국하였다. 또한 성녀 조증이(발바라)는 양근 조동성 집안 출신으로 남이관 성인의 아내, 유방제 신부의 복사로 치도곤 합 150도를 맞고 옥에 갇힌지 6개월 후 11월 14일 순교하였다.


윤점혜 아가다는 윤유일의 4촌 여동생으로 천주교를 신앙하기 위해 처녀의 몸으로 밤에 몰래 서울로 도망쳐와 강완숙의 집에 머물며 동정녀 소공동체를 만들고 동정녀들을 지도하였고, 고향 양근으로 이송되어 참수할 때 목에서 흰피가 나왔다고 한다.


그 동생 윤운혜 마르타는 순교자 정광수와 결혼한뒤 서울로 이사하여 자기 집에 공소를 마련하고 주문모 신부님을 모셔다가 미사를 드리며 성물을 만들어 신자들에게 보급하다가 1801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권철신의 양아들(권일신의 아들)로 처음 양근 옥에 갇혀 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 당하였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음으로 양근으로 이송되어 1801년 12월 27일 23세로 순교하였다.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는 1801년에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전주 중바위 성지 참조)와 쌍벽을 이루는 분들이다. 이 동정 부부는 모두 양근 출신으로 조숙은 조동성 유스티아노의 친척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다.


이들 두 동정 부부는 1819년 5월 21일 참수로 순교하 였다. 권 데레사의 머리를 찾아다가 성녀 조증이 발바라의 집 대바구니에 담아 두었는데, 그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달레는 전하고 있다.


이처럼 양근 성지는 순교 성인의 탄생지이고, 순교자들의 피로 신앙이 뿌려진 곳이고, 윤점혜 아가다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수도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를 통하여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는 곳이다.


양근 권씨 집안의 제자였던 이존창과 류항검은 이후 자신들의 고향인 '여사울'(餘村, 현 충남 예산군 신종면 신암리)과 '초남'(草南, 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을 중심으로 각각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이존창은 내포(內浦)의 사도로, 류항검은 전라도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강개 마을에서 비롯된 천주교 신앙이 수표교와 명례방에 이어 여사울과 초남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양근성지 성지 마당의 순교 조형물과 순교자상


왼쪽부터 동정 순교자 윤점혜 아가타상, 순교의 큰칼 아래 조형물(이숙자 수녀님 작), 순교자 신앙고백비,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 순교부부상이 설치되어 있다.


▲양근성지 성지 마당의 순교 조형물과 순교자상


▲순교자 윤점혜 아가타상 


▲순교자 윤점혜 아가타상


▲순교자 윤점혜 아가타상


▲순교의 큰칼 아래 조형물


▲순교자 신앙고백비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순교부부상


◆동정녀(童貞女)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로서 종교적 목적을위해 동정을 지키며 정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2세기말까지 초대 교회에서의 동정녀들은 기도와 금욕 생활을 위해 모임을 가졌고, 과부들은 특수한 교회 활동을 위해모임을 가졌다.


그 후 3세기경에 이르러 동정녀들은 공식적인 축성식을 갖게 되고, 또한 동정녀들의 모임도 주교가 직접 관할하는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어 이후 동정녀들의 모임은 여자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교회 창설 이후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출하기 전까지 많은 동정녀들이 나타나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한국 교회 최초의 동정녀 회장 윤점혜(尹占惠)를 비롯, 1839년 기해박해 때 동정으로 순교하여 성녀(聖女)가 된 김효임(金孝任)·김효주(金孝珠) 자매, 이인덕(李仁德), 이경이(李瓊伊) 등이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동정녀들이다.


▲대형십자가, 성모상, 십자가의 길


▲대형십자가


▲성모상


◆참수터


양평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참수터의 위치는 이기경(李基慶)의 《벽위편(闢衛編)》에 수록되어 있는 1801년 3월 15일자 경기 감사 이익운(李益運)의 장계 내용을 통해서 살필 수가 있다.


“양근 관아의 문에서 서쪽으로 2리쯤 떨어진 큰길가에서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죄인 유한숙과 윤유오 등을 법률에 따라 참수하였다”고 언급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현 양평 군청 서쪽 200~300m지점(양근 4리)의 양평 휴게소와 양평 주유소 인근, 즉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에 놓여 있는 일명 오밋다리(서울로 가는 다리)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2처


십자가의 길 3처


십자가의 길 4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6처


십자가의 길 7처


십자가의 길 8처


십자가의 길 9처


십자가의 길 10처


십자가의 길 11처


십자가의 길 12처


십자가의 길 13처


십자가의 길 14처


◆십자가의 길 14 처 (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


▲한국천주교회창립성현 권신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동상


▲성지 성당


▲성지 성당


▲십자고상


▲성지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대형십자가


▲십자가의 길


■ 순교자

◆ 복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769∼1802년)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 출신으로 권철신(암브로시오)이 큰아버지이고,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그의 아버지였다. 훗날 권상문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윤유일(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복자 권천례 데레사(1784∼1819년)
권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중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4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 하였으나 친척들의 설득으로 동정을 포기하고 21세 때 조숙(베드로)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하는 날 밤 권 데레사는 남편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자 베드로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후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동정으로 지냈다.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다 1817년 3월 말경 체포되어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나이는 36세였다. 순교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거두었는데 데레사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 복자 조용삼 베드로 ( ?∼1801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수조차 없었다. 그 후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정약종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에 불과했을지라도 조용삼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친을 끌어내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 무렵 그는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받아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 복자 홍익만 안토니오 ( ?∼1802년)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의 순교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 서(庶) 동생이요, 홍필주(필립보)와 이현(안토니오)의 장인이다. 그는 1785년 김범우(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796년 그는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웠고,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복자 조숙 베드로 (1787∼1819년)
조숙(趙淑) 베드로는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이다. 이후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8세 때 권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였다. 혼인날 밤, 아내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는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 바오로는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한양에 있는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온갖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정 바오로가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아내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다. 문초중에 데레사는 남편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그들은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33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