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경기 화성시***한국 천주교 순교자묘 聖地 순례ㅡ양감면 요당길ㅡ요당리 순교자묘 성지

문성식 2022. 3. 24. 07:42

한국 천주교 순교자묘 聖地 순례ㅡ양감면 요당길ㅡ요당리 순교자묘 성지




▲요당리 순교 성지


span style="color: #000000;">경기도 화성시 양감면의 요당리 성지는 신유박해(1801년)를 기점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서깊은 교우촌(옛지명 : 양간 공소)으로서, 장주기 요셉 성인과, 하느님의 종 장 토마스를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의 출생지이자 신앙의 터전이었다. 장주기 요셉 성인을 비롯한 이들의 교회 정신과 순교신심을 현양하기 위하여 2006년 9월 수원교구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이곳을 성지로 선포하였다.


▲요당리성지 위치도


▲요당리 순교 성지


요당리(蓼塘里)는 조선후기 이래 장주기 요셉 성인이 탄생한 '느지지' 마을(소만촌)을 비롯하여 그 인근의 '장승백이'(대만촌), '요댕이', '작은 돌내' 등 모두 4개의 자연 부락으로 구성된 행정구역의 명칭이었다.


이곳은 최소한 기해박해 이전부터 장씨(張氏)들의 집성촌이자 교우촌으로 형성되어, 박해가 끝난 후 최근까지도 인근 교우촌들의 성사적, 사목적 중심지 역할을 담당해온 공소가 설립되어 있었다.


그간 몇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을 거치면서 현재(2007.4)는 요당1리(요댕이, 성지가 위치한 곳), 요당2리(장승백이, 대만동), 요당3리(느지지, 소남동)으로 재편되었다. 느지지 마을은 계속된 천주교 금압정책과 시대의 격변에 따라 장씨들은 외지로 다 나가고, 현재는 달성 서씨들의 마을이 되었다.


'요당리'(蓼塘里)란 지명은 '여뀌 풀(蓼)이 무성한 못가의 마을'이나 '여뀌 풀이 자라는 저수지의 제방(塘, 둑)이 펼처져 있는 마을'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의 경우 서해 바닷물이 아산만쪽에서 현재의 발안천을 따라 고잔 저수지를 거쳐 양감면 요당리 느지지 일대까지 밀려들어 왔다. 현재는 남양 방조제로 가로막혀 바닷물의 유입은 중단된 상태다.


▲성지입구 안내도


▲장주기 성인 기념성지


한국의 성지중 장주기 성인을 현양하는 곳으로 요당리 성지가 최초는 아니다.


장주기 성인이 성 요셉 신학당의 회장으로서 활약했던 배론 성지(원주 교구)와 성인이 순교했던 갈매못 성지(대전 교구)에서 이미 현양하고 잇다. 또한 황석두 루카 성인의 고향인 연풍 성지(청주 교구)에서도 황석두 루카와 같이 순교했던 다블뤼 주교, 오메트로 신부, 위앵 신부와 같이 장주기 성인의 석상(石像)이 모셔저 있다.


그리고 요당리가 속해 있는 발안 성당에서도 1986년 장주기 요셉 성인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보관하고 있다가 최근 요당리 성지로 모셔왔다. 그러나 다른 성지에서는 장주기 성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인의 현양 사업에게 더 초점이 맞춰져 부각되기 때문에 장주기 성인에 대한 현양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었다.


따라서 장주기 성인의 삶과 믿음이 온전히 모든 교우에게 전달되는 데에는 기존 성지의 현양 사업만으로 아쉬움이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성인의 탄생지이자 신앙의 고향인 요당리 성지를 성역화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며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곳은 장주기 요셉 성인과 장 토마스(장주기 성인의 6촌)외에도, 순교자 지 타데오, 임 베드로, 조명오 베드로, 홍원여 가롤로의 고향이기도 하다. 장경언(장주기 성인의 7촌), 장치선(張致善, 조카)과 그 가족, 장한여(6촌), 장 요한(7촌), 방씨(장주기 성인의 숙모) 등이 체포되었던 지역과 순교지는 각각 달라도 장주기 성인의 신앙과 모범을 뒤 따른 순교자들이다.


또한 이곳은 한국 교회 최초로 교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서 그 책임을 맡았고 끝내는 순교한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과 이곳에서 공소회장을 맡으며 신앙전파에 힘쓰다 순교한 정화경 안드레아 성인이 활동하던 곳이다.


엥베르 범 라우렌시오 성인도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셨다가 순교하셨으며, 성인의 피신을 돕다가 순교한 손경서 안드레아 순교자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주기(일명 낙소樂韶) 요셉 성인


1803년 요당리 느지지(현 요당3리) 마을에서 태어난 장주기(일명 낙소樂韶) 요셉 성인은 1826년경에 세례를 받았고 모방 신부에 의해 회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1843년부터 제천 배론에 정착하였다. 1855년 '성 요셉 신학당'이 설립되자 메스트르 이(李) 신부에게 초가 3칸짜리 자기 집을 학교 건물로 내주었으며, 자신은 한문교사와 공소회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866번 병인박해로 신학당의 푸르티에 신(申) 신부와 프티니콜라 박(朴) 신부가 체포될 때 같이 잡혔다가 신부의 부탁으로 풀려났다. 이튿날 신부가 떠날 때 그 일행을 뒤쫓아 갔으나 신부의 엄명으로 되돌아왔다.


며칠 후 식량을 구하러 이웃 마을[노럴골]에 갔다가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다블뤼 안(安)주교, 오메트르 오(吳)신부, 위앵 민(閔)신부, 황석두 루카와 갈이 충청도 수영(水營, 보령 갈매못)으로 내려가 64세의 나이로 3월 30일에 참수 치명하였다.


그의 시신은 다른 순교자와 같이 형장의 모래밭에 묻혔으나 뒤에 신자들에 의해 두 번 이장되었으며, 1882년 블랑 주교의 명으로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보내졌다가 1894년 용산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1900년 명동 성당에 옮겨졌다가 1967년 절두산 지하 성당에 모셔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지 안내


▲1. 대형십자가 2. 성인묘지 3. 성모상 4.5. 대성당 6. 사제관 7. 관리동 8. 기도광장 9. 묵주기도길 10. 십자가의 길


▲성인 묘소 야외 제대


▲야외제대


▲순교자 묘역 


▲순교자 묘역


성인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 


▲성인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


일명 '낙소'(樂韶)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재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순교자 장사진, 장경언, 장한여, 장치선, 방씨 묘 


▲순교자 장사진, 장경언, 장한여, 장치선, 방씨 묘


아래의 다섯 순교자는 장주기 요셉의 친척으로 장주기 성인과 그의 육촌으로 순교자인 장 토마스 등이 수원 고을의 양간 느지지 출신인 점으로 보아 이들도 양간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기록에 명시된 바가 없으므로 향후 좀더 세밀한 고찰을 요한다.


① 장경언(?~1866)

성 장주기 요셉의 재당질(7촌)로, 병인박해기 서울의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② 장치선(?~1866)

성 장주기 요셉의 조카로 병인박해기에 포청옥(?)에서 5명의 가족이 함께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③ 장한여(?~병인박해기)

성 장주기 요셉의 재종(6촌). 병인박해기에 부인 홍씨와 함께 교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④ 장 요한(?~병인박해기)

성 장주기 요셉의 재당질(7촌)로 아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교수형을 당해서 순교하였다.


⑤ 장 요셉의 숙모(방씨) (?~1869)


▲순교자 장 토마스(1815-1866년, 시복추진자) 묘


장 토마스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재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張)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요셉)의 6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 생활을 위해 이곳 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이때부터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면서 하나 있는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이 무렵 가까운 인척과 친구들은 그의 본심이 순량한 탓에 언제나 그에 대해 말할 때면 ‘착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안되어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 때에 다시 영장이 “천주교를 배반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묻자, 여전히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토마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청주시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토마스는 대자 되는 사람이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


▲성인 정화경 안드레아(1807-1840)


충청도 정산(定山)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정화경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을 뿐더러 장성해서는 더욱 자유스러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


거기서 회장 일을 맡아보며 자기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또 서울을 왕래하며 힘 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화경은 매일같이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시켰고, 박해를 피해 내려온 범 라우렌시오 주교를 위해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 해 8월 주교를 찾고 있던 밀고자 김순성(일명 여상)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서양 신부를 잡으려던 김순성 일당은 정화경을 이용하여 신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챈 정화경은 도망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았다.


그러나 9월 체포된 정화경은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1840년 1월 23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성인 민극가 스테파노(1787-1840)


민극가 스테파노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과 함께 입교했다.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 7년 후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자 집을 나와 서울, 인천, 부평, 수원 등지를 전전하며 교리서적을 팔아 생활해 나갔다. 또 어디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민극가는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 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했거나 마음이 약한 교우들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중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밭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성인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Lurent Marie Joseph) 주교(1796-1839)


한국명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 2대 교구장. 주교로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같이 선교에 종사하던 나(모방), 정(샤스탕) 두 신부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한강변 새남터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그는 조정에 의해 대박해가 일어나 더 이상 전교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은 물론 나중에는 두 동료 신부들에게까지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말로 자헌을 권유하였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교황청에 의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그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만에, 그리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전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에 힘쓴 결과 신자수는 1839년 초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말미암아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범 주교는 1796년 4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다음 해 3월 파리를 떠나 조선에 입국하기까지 중국 사천(四川) 교구에서 10여년 간 사목활동에 종사하였다.


1839년 대 박해가 일어났을 때 지방을 돌아보고 있던 범 주교는 조정에 의해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사실이 알려져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고 교우들에 대한 박해가 가열되자 하는 수 없이 수원에서 가까운 바닷가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기었다.


여기서 그는 나, 정 양 신부를 불러 두 사람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며 두 사람을 각기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그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그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으며 나 신부와 정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만이었다.


▲순교자 손경서, 지 다태오, 림 베드로, 조명오, 홍원녀의 묘


손경서 안드레아 순교자(1799~1839.12.21)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유방제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1838년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을 때 거짓으로 배교하고 돈을 주어 풀려났다. 1839년 처남인 정화경 안드레아와 함께 앵베르 주교를 양간(상게)로 은신시켰다. 앵베르 주교가 체포된 후 가족들이 체포되자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고 1839년 12월 21일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했다.


지 타대오 순교자(1819~1869.5.23)

양간 용소말(현재의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 출신으로 안중 공소의 인광리(현재의 평택시 현덕면 인광리)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6년 체포되어 1차 배교 후 석방되었으나, 이를 후회하고 순교를 다짐하던 중 1869년에는 피신하라는 주위 권고를 만류하고 포졸들에게 잡혀가서 진위 감옥에 수감, 그곳에서 아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수원으로 이송되어 화성 북문 밖에서 1869년 5월 23일 공개 처형을 당했다.


림 베드로 순교자(?~병인박해기)

양간 용소말 출신으로 양지 고을 응다라니에 거주하던 중에, 정 안드레아, 림 요한, 림 안토니오, 이중화 등 총 12명의 교우가 함께 피체되어 수원으로 이송되었고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조명오 베드로 순교자(1823~1872.4)

양간 출신으로 1872년 3월 26일에 체포되어 서울 우포청에서 순교했다. (*또는 1871년 4월 홍원여와 함께 우포청에서 순교했다고도 전한다.)


홍원여 가롤로 순교자(1849~1871.4)

양간 출신으로 1871년 23세로 경포에게 피체 그해 4월 서울 우포청에서 조명오와 함께 순교했다.


▲대성당과 성모상


▲성모상


▲요당리 성지, 건너편 언덕위에서 바라보았다


▲대성당, 2009년에 새롭게 축성하였다


▲대성당


▲대성당


▲대성당


▲대성당


▲대성당 정면


▲대성당 성수대


▲대성당 내부


▲대성당 내부


▲대성당 내부


▲대성당 내부


▲장주기 요셉 유해


▲관리동, 사무실


▲소성당, 관리동 내부에 있다


▲소성당 제대


▲소성당 십자고상


▲소성당 내부


▲소성당 내부


▲소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소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소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소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소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묵주기도의 길, 십자가의 길 반대편으로 조성되어있다


◆십자가의 길 14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


▲십자가의 길


▲야외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2처


▲십자가의 길 3처


▲십자가의 길 4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6처


▲십자가의 길 7처


▲십자가의 길 8처


▲십자가의 길 9처


▲십자가의 길 10처


▲십자가의 길 11처


▲십자가의 길 12처


▲십자가의 길 13처


▲십자가의 길 14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