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의 빛
「빛 속에서」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작가의 펜팔이 써 보낸 편지입니다.
"나는 요즘 오랜 소원이 이루어져서 나병 수용소에서 1박(泊)하고 왔습니다. 나의 소망은 병문안하는 것이었는데, 도리어 내가 위문을 받고 왔습니다. 그중 A라는 분은 참으로 멋진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벌써 오십은 훨씬 넘으신 분 같았습니다. 눈도 못 보고 손끝도 마비되고 꼬부라진 혀끝으로 점자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혼자서는 서지도 못하고 돌아눕지도 못했습니다. 밥도 혼자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호흡을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분의 얼굴은 빛나고 기쁨에 넘쳐 있었습니다. 저는 호흡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그처럼 광채가 도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자기 혼자서는 호흡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어째서 그렇게 빛날 수 있을까? 그 비결은 그의 머리끝에 있는 점자로 된 성경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여기 보다시피 '그분'이라는 사람은 나병환자로 수족이 마비되고, 눈도 멀고 코도 없는, 자기 힘으로는 호흡밖에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폐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누구도 지니기 힘든 내적 빛에, 참된 생명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 말씀의 덕입니다. 바로 그는 하느님 말씀을 먹고사는 사람, 그것도 진짜 혀끝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요,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인간으로서는 폐인과 다름없는데 그런 그가 가장 강한 복음의 전달자가 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진실히 어떤 지식만이 아닌 정말 옆에 있는 사람의 존재 깊이까지, 실존적 어둠에까지 빛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다 아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우리 자신의 부족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지식, 우리의 능력, 우리의 언변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당신으로 가득 차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당신 복음의 도구로 쓰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보내실 뿐 아니라 같이 가십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당신의 성령을 주심으로써 함께 가시고 함께 일하십니다. 예수님도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 않는다"(요한 8,29)고 하셨습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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