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계보도 태조부터 순종까지
존칭명 : 왕(王) - 성(性) : 이(李)
27대 518년(환기8589~9107, 서기1392~1910)
대 |
왕 명 |
즉위년도 |
재위기간 |
약 사 |
1 |
태조(太祖) |
8589-1392 |
6 |
휘는 성계(成桂). 고려 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92년 조선왕조를 세움. |
2 |
정종(定宗) |
8595-1398 |
2 |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
3 |
태종(太宗) |
8597-1400 |
18 |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
4 |
세종(世宗) |
8615-1418 |
32 |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 함. 외치에도 힘을 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
5 |
문종(文宗) |
8647-1450 |
2 |
휘는 향(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
6 |
단종(端宗) |
8649-1452 |
3 |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 후인 숙종 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
7 |
세조(世祖) |
8652-1455 |
13 |
휘는 유. 단종을 좇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
8 |
예종(睿宗) |
8665-1468 |
1 |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
9 |
성종(成宗) |
8666-1469 |
25 |
휘는 혈.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
10 |
연산군(燕山君) |
8691-1494 |
12 |
휘는 융.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
11 |
중종(中宗) |
8703-1506 |
38 |
휘는 역.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 |
12 |
인종(仁宗) |
8741-1544 |
1 |
장경왕후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
13 |
명종(明宗) |
8742-1545 |
22 |
휘는 환. 중종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겪음. |
14 |
선조(宣祖) |
8764-1567 |
41 |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
15 |
광해군(光海君) |
8805-1608 |
15 |
휘는 혼.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
16 |
인조(仁祖) |
8820-1623 |
26 |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격음. |
17 |
효종(孝宗) |
8846-1649 |
10 |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 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8 |
현종(顯宗) |
8856-1659 |
15 |
휘는 연.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
19 |
숙종(肅宗) |
8871-1674 |
46 |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
20 |
경종(景宗) |
8917-1720 |
4 |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
21 |
영조(英祖) |
8921-1724 |
52 |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
22 |
정조(正祖) |
8973-1776 |
24 |
휘는 성.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 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함. |
23 |
순조(純祖) |
8997-1800 |
34 |
휘는 공.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 차례의 천주교 대 탄압이 있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
24 |
헌종(憲宗) |
9031-1834 |
15 |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
25 |
철종(哲宗) |
9046-1849 |
14 |
휘는 변.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됨. 진주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병사함. |
26 |
고종(高宗) |
9060-1863 |
44 |
휘는 희(熙).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임오군란이 일어남. |
27 |
순종(純宗) |
9104-1907 |
3 |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 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
(멸망) |
▥ 조선왕조 제1대 태조 ▥
이성계의 등장과 그의 활약상
1398년에 일어난 이사건을 두고 흔히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와병 중에 일어난 이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그 2년 뒤인 1400년, 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 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흥)에 머물렀다. 이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수 있겠다. 그러나 이성계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 덕안전 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일기를 마쳤다. 태조의 능은 건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신덕왕후 강씨가 묻혀 있는 정릉은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묘역을 조성 할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릉동 자리로 정해지게 되었다. 능이 정릉으로 이장된 것은 이성계가 죽은후 태종9년 때의 일이다. 태종이 강씨의 무덤을 여러차례 이장한 것은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분풀이 였다.태종은 능을 옮긴 뒤에도 정자각을 헐고 십이지신상 같은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드는 등 강씨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를 표출 했다. 그때문에 정릉은 현종때 복구될 때까지 2백여 년 동안 주인 없는 무덤으로 버려져 있어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은 모두 8명으로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이 6명,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 2명이다. 이들 8명의 형제들은 조선 개국 이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여 노년의 이성계를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한씨 소생의 형제들이 단합하여 강씨 소생의 왕자들을 참살한 '제1차 왕자의 난'은 조선 개국의 역사를 피로 얼룩지게 만든 첫번째 사건 이었다.
http://boinp.netian.com 출처 |
▥ 조선왕조 제2대 정종 ▥
이성계의 세자책봉과 화근의 시작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 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 이었다.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 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 보냈다가 방석의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여 버렸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 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 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 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정종은 재위시에 정무 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 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 이었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수 있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방원에게 왕좌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 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람 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인덕궁에 거주 하면서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
▥ 조선왕조 제3대 태종 ▥
제2차 왕자의 난 세제로 책봉된 방원은 병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 나갔다. 그 일환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 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도록 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 시켰으며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 시키기 위해 노비 변정도감을 실시해 노비의 변속을 관리 하기도 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등극했다. 태종의 업적 1. 중앙제도와 지방제도 의 정비로 고려잔재 완전청산.
민무구형제의 옥 태종이 선위를 표명하자 왕비 민씨의 동생인 민무구, 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를 통해 이른바 협유집권, 즉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 집권 이전에는 남편의 등극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태종이 보위에 오른후 잉첩들만 가까이 하자 이에 심한 투기심을 드러내 태종과 불화가 잦았다. 이 때문에 외척 세력으로서 아버지 민제와 왕비인 원경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할 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이 발생 하게된 사건 이다. 옥발생 후의 진행 민무구를 연안에 방치- 공신녹권을 빼앗음-직첩을 수취하여 서인으로 전락 시키고 여흥에 유배 시킴-1413년 자진 -민무구, 무질 형제가 죽은 후 그의 형제들이 형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태종은 무휼, 무회 형제도 사사 시켰으며 그들의 처자도 변방으로 내쫓음-옥사 종결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진 육조장관들을 정3품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다. 이에 따라 전곡 과 군기를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 시켰으며 좌우 정승이 장악하고 있던 문 무관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이관 시키기에 이른다. 또한 같은 해에 대언사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나눠 관장 하도록 했다. 또한 육조의 각 조마다 각각 3개의 속사를 설치하고 당시 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 시켰다.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태종실록'부터이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거북선은 왜구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종대에 이 거북선의 조성 흔적이 있는 것은 왜구와의 수전에 대비한 것이거나 또는 대마도 정벌 같은 왜구 토벌 작전을 감행하기 위한 준비책이었을 것이다. 신문고는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때 자유롭게 청원할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태종은 훈신과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전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 하려고 했다. 신문고는 태종의 이런 정치사상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이며 1401년 8월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따 설치 되었다. 건국 초에 조선 조정은 세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 했다가 1398년 정종 원년에는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다시 왕궁을 옮겼다. 이 때 개경으로 다시 옮겨간 이유는 우선 한양의 시설이 미비하여 개경을 그리워하는 신민들의 정이 심각 하다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실의 큰 불상사인 골육상잔의 참변이 일어 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경으로 옮겨 간 이후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세제 방원에게 왕권을 물려 주었다. 태종은 등극 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4년(태종5년) 9월에 경복궁이 준공되자 한양 천도를 단행 하였다. 이 후로 한양은 5백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원경왕후 민씨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는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서 1365년 여흥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382 년(우왕8년)에 방원에게 출가 하였으며 1392년 조선개국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그녀는 1400년 2월에 방원이 세제에 책봉되자 세제빈으로 정빈에 봉해 졌으며 이해 11월 에 방원이 조선 제3대 왕에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태종보다 두살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준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398년 8월 그녀 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것이 라고 판단하고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 시켰다. 이 정보 덕분에 방원은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수 있었다. 또한 왕자의 난 10일 전에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를 혁파하고 그들의 군 장비를 불태울 때 그녀는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거사 직전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어 선수를 치도록 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는 태종과의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불화는 우선 궁녀 문제에서 출발하여 태종의 후궁 간택 문제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왕비의 동생 민무구 형제 사건으로 불화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태종은 외척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나갔고 민씨는 이에 노골적인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것이 곧 그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급기야 민무구 형제가 죽게되자 그녀는 그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 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 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민씨는 4남 4녀를 낳았으며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의 왕자들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 등의 공주가 그녀의 소생이다. 그녀의 능은 헌릉으로 태종의 묘와 함께 쌍을 이루며 현재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남아 있다.
1465년엔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고 그 해 '원각경'을 수교 하기도 했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왕을 거치며 91세까지 살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섯 왕의 연고존친 으로서 극진한 존경과 대우를 받았으나 불교를 숭상하고 선가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 하였기 때문에 유생 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왕 들의 보호 아래 꾸준히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시호는 정효이다. |
▥ 조선왕조 제4대 세종 ▥
세종이 등극한 배경 태종은 일찍부터 왕권 안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양녕을 세자로서 신뢰하지 않았다.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세자 사건이 곧 네번째 선위 파동으로 이때 황희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세자를 반대 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태종이 일방적으로 세자를 폐한 것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 나갈수 없다고 판단했던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폐세자 사건과 관련한 야사에의 실록 기록 양녕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진노를 자초 했다는 것이다. 또 일설 에는 양녕이 부왕 태종과 모후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 때부터 미치광이 짓을 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양녕은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 시간에도 동굴 뜰에 새덫 을 만들어 새잡기에만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녕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찾는가 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 채기도 했다고 한다. 세종의 업적 집현전을 설치해 그곳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약 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 나갔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기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이 설치되어 '혼천의' 같은 천체 관측 기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비단 이런 학문적인 사업에만 치중 하지는 않았다. 국토의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 또한 심혈을 기울인 정책 중의 하나였다.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 했으며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어 냈다. 이와같은 업적을 이룰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에 편중하지 않고 군사 훈련, 화기의 개발, 성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을 소흘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세종은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 했다. 또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불서 번역 사업을 펼치는 한편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섬기게 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묘를 사전에 올려 제를 올리게 하였다 천문학의 발전 천문학을 주과하던 곳은 서운관 이었다. 서운관에는 조선초에 이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곳의 간의대가 설치된 바 있었지만 미흡한 점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431년 부터 시작된 대규모 천문의상 제작과 2년뒤에 이루어진 석축간의대 준공에 의해 본격적인 천문 연구에 돌입 할수 있었다.
소헌왕후 심씨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의 본관은 청송으로 문하시중 심덕부의 손녀이고, 영의정 심온의 딸이다. 1408년 충녕군 도와 가례를 올려 빈이 되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1417년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지고 이듬해 6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에 봉해 졌으며, 같은 해 8월에 내선을 받아 세종이 즉위하자 12월에 왕후로 책봉되어 공비로 불려 졌다. 하지만 1432년에 중전에게 별칭을 붙이는 것이 관습에 없다 하여 공비라는 호칭은 없어지고 그냥 왕비로 개봉 되었다. 심씨의 아버지 심온이 세종 즉위 초에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로 명나라에서 귀환 하던중, 아우 심청이 군국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 한다고 불평을 했다가 옥사가 일어났다. 심온은 이 사건의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사사 되었다. 이 때문에 심씨를 폐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녀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폐비 사태는 면하였다. 심씨는 8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향(문종)을 비롯하여 수양(세조),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 등 아들 8형제와 정소, 정의 등 딸 2자매가 그들이다. 소헌왕후 심씨는 1446년 52세로 죽었으며, 그녀의 능은 영릉으로 세종이 승하한뒤 합장하여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다. 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 아들을 가장 많이 둔 왕이었다. 18명의 아들 중에 정비 심씨의 소생이 8명, 영빈 강씨의 소생의 화의 1명, 신빈 김씨의 소생이 계양, 의창, 밀성, 익현, 영해, 담양 등 6명, 혜빈 양씨의 소생이 한남, 수춘, 영풍 등 3명 이었다. 이들중 소헌왕후 소생인 향과 수양은 등극하여 문종과 세조의 묘호를 얻는다.
안평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 서, 화 모두에 능해 삼절이라 불리었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서풍은 고려말의 조맹부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개성을 강조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그의 서풍이 크게 유행 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발문'이 대표적이며, 법첩과 각첩으로 전하는 작품들이 다수 있다. 금석문으로는 경기도 광주구 영릉터에 있다가 현재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옮겨놓은 '세종대왕 영릉신도비'의 비문이 대표적이다
|
▥ 조선왕조 제5대 문종 ▥
문종의 등극 배경 첨사원의 설치와 함께 세자 향의 섭정이 시작 되었다. 세자의 나이 29세 때였다. 세종은 이 섭정 기간 동안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 조회를 받도록 하는 한편, 모든 관원을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고, 또한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세자의 결재를 받도록 했다. 세자 향은 1442년 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무를 익혔고, 여러가지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적 치적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이렇듯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언로를 더 넓히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윤대 (돌아가면서 왕을 만나는 것)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 했다. 이와 같이 관대한 정책을 기본 통치 방향으로 설정한 문종은 우선적으로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 의주석' 등을 편찬하게 했다. 또한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진법을 편찬 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동국병 감'의 편찬은 병법의 정비와 군정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그는 즉위 초에 스스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해 총 12사로 분리돼 있던 군제를 5사로 집약 시키고, 군제상의 세세한 부분들을 개선, 보완하기도 했다. 문종은 이렇듯 유연함과 강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 했으나, 건강악화로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야만 했다. 이때가 1452년 5월 이었다. |
▥ 조선왕조 제6대 단종 ▥
단종의 탄생과 세손으로의 책봉
계유정난으로 고명 대신들이 거의 참살 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수양은 자신의 집권 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정난공신에 봉하고, 그들이 지칭한 난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로 유배 시켰다가 안평대군은 사사 시키고 우직은 진도에 유폐 시켰다. 중앙을 장악한 수양은 변방에 자신의 세력을 심기 위해 함길도 도절제사를 교체 하였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이 소식을 듣고 신임 절제사로 부임하던 박호문을 참살하고 난을 일으켰다. 이징옥은 원래 4군과 6진 개척에 공로가 컸던 인물로 김종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수양이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 수양을 치기로 작정 하였다. 하지만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에 의해 살해 당하고, 이징옥의 난은 무위로 끝난다.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 했다. 그러나 이듬해 윤6월에 수양대군이 자기 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 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이후 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 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 되었다. 그러나 1457 년 9월, 유배 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 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 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 세의 나이로 사사 되었다. 단종의 부인은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로 두사람 사이엔 후사가 없었다. 단종은 1681년(숙종7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 되었다. 그의 능은 장릉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수양대군은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에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 들이는 한편,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기 시작 했고, 6개월 뒤에 드디어 거사를 감행 했다. 그는 우선 김종서를 제거 했다. 당시 김종서는 병권을 쥐고 있었고, 조정 대신들의 구심체 였기에 그를 제거하지 않고는 거사를 성공 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해 10월 10일 밤 유숙, 양정, 어을운 등 을 데리고 김종서를 찾아가 간계를 써서 그를 철퇴로 죽였으며, 영의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은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 했다. 또한 친동생 안평대군을 붕당 모의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사 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형제들 중 뜻을 달리했던 금성대군을 유배 시켜서 죽였으며,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 낸후 다시 노산군으로, 그리고 서인으로 전락시켜 죽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수양대군이 왕권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 면 일어날수 없는 일들 이었다. 또한 비록 의정부 대신들이 조정을 쥐고 있었다고 해도 이는 적어도 왕권에 대한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왕이 권한을 펼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한시적인 일이 었다. 조선이 개국 초부터 재상 중심제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점을 감안 할때 사실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어도 통치 에서는 별문제가 없는 것이 었다. 따라서 계유정난은 수양과 그주변 무리들이 왕권을 탐한 나머지 저지른 비 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
▥ 조선왕조 제7대 세조 ▥
왕위찬탈의 조짐
이 같은 중앙 문신 위주의 정책은 지방 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함경도 길주에서 일어난 이 반란으로 한때 조선은 전운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 나갔다. 세조는 민정 안정책에도 소흘하지 않았다. 우선 민간에 만연해 있던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또한 누에 농업을 위해 '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 '오륜록'을 찬수해 윤리기강을 바로 잡았다. 명, 왜 등의 외국과는 유화 정책을 통해 변방의 안정을 꾀했으며, 문화 사업도 활발히 벌여 '역학계몽', '주역구결 '대명률강해', '금강경언해', '대장경' 등을 인쇄 간행했고,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왕들이 지은 시들을 결집한 '어제시문'을 편집 발간했다. 이처럼 세조는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 활동 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 사업으로 사회를 일신 시켰다.
|
▥ 조선왕조 제8대 예종 ▥
예종의 즉위
|
▥ 조선왕조 제9대 성종 ▥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결탁
성종은 이와같은 도학 정치 사상에 입각하여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을 지어 경전을 소장하게 했으며, 향현 고에 관심을 가져 학문 연구를 후원하고, 1484년과 1489년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교육기간의 경비를 충당케 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과 서적을 나누어 주어 관학을 진흥 시키기도 했다. 또한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 두모포에 독서당을 설치하여 젊은 관료 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 저술에 전념하게 하였다. 이같은 정책은 편찬사업을 융성 시켰는데, 그 결과로 노사신 등의 '동국여지승람'과 서거정 등의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그리고 강희맹 등의 '오례의', 성현 등의 '악학궤범'이 간행 되는등 다양한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바로 이 '을사대 전'을 가리키며 '신묘대전', '갑오대전'을 비롯한 그 이전의 법전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을사대전'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전해 지고 있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일한 법전이 되는 셈이다. '경국대전'은 경제육전과 같이 6분 방식에 따라 '이전', '호전', '예 전', '병전', '형전', '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각 법전마다 필요한 항목으로 분류하여 규정되어 있다. 또 조문은 경제육전과는 달리 추상화,일반화 되어 있어 유권해석이 가능 하도록 되어있다. 이는 20여 년에 걸친 탁마의 결정체로서 손상이 없는 것이며, 명실상부한 조선의 최고 법전으로서 면모를 갖춘 것이라 할수 있다. 그리고 이 를 '신증'이라는 두자를 삽입하여 '신증동국여지승 람'이라고 했다. 이 중종시대본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희귀해져, 현재는 일본 경도대학 소장본이 유일하며, 1611년(광해3년)에 복간한 목판본이 규장각도서 등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책머리에는 진전문, 서문, 교수관원직명과 구본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노사신의 진전문, 서 거정의 서문 및 교수관직명, 찬수관직명, 목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책의 끝에는 홍언필, 임사홍, 김종직 의 발문이 실려 있어 간행 과정과 의도를 살펴볼수 있게 되어 있다. 이책의 몇몇 권에는 경도, 한성부, 경기도, 개성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등 각지방의 군현이 수록되어 있는데, 경도 앞에는 조선전도인 팔도총도가 실려 있으며,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삽입되어 있다.
또한 내용 에서도 각 도의 연혁과 총론에서 부터 성씨, 인물, 풍속, 봉수, 능묘, 교량위치 등 세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인물 속에는 관원뿐 아니라 효자, 열녀 등이 포함되어 있고, 행정구역에 관해서도 지역의 변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만 하다. 여기에는 세종대의 지리지가 지녔던 장점인 토지의 면적, 조세, 인구 등 경제, 군사, 행정적인 측면이 약화된 반면에 인물, 예속, 시문 등이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세종대에 비해 성종대가 그만큼 평화스러웠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 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전의 사서들이 신라 중심의 서술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삼국을 대등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동국통감'은 편년체로 되어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삼한 까지를 외 기,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년)까지를 삼국기, 669 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년)까지를 신라기, 그 이후부터 1392년까지 를 고려기로 편찬하고 있다.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것은 자료가 부족해 체계적인 왕조사를 서술 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기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통일의 의미를 부각 시키기 위함 이었다. 그러나 삼국이 대등 하다는 균적론을 내세워 어느 한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권근의 '동국사략'에서 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것과는 대비되는 점이다. 또한 왕의 연대 표기도 '동국사략'에서는 유년칭원 법을 쓰고 있지만 여기에선 즉위년칭원법을 쓰고 있다. 그러나 '동국통감'의 사론이 지나치게 성리학적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 된다. 중국에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칭송되는 반면에 대항 했거나 사대를 소흘히 한 행정이 있으면 철저하게 비판 하는가 하면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론이 심해졌다. 또한 기자 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 신라 등의 역사적 위치를 높이고, 반면에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낮게 설정 하고 있다. 이러한 지나친 유교적, 사대적 역사관은 낭만적이고 신화 적인 역사관을 받아들여 조선사를 재구성 하려 했던 세조의 의도를 매몰 시키고 말았다. 이에 반해 신숙주 주도 하에 만든 '삼국사절요'에는 낭만적, 신화적 서술체가 남아 있어 그나마 세조의 민족주의적 관점의 일면을 발견할수 있게 한다. 따라서 1484년 서거정이 주도 하여 찬진된 '동국통감'은 편자들이 훈신 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지나친 명분론에 입각한 사서는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 된다. 하지만 성종과 사림 세력에 의해 개찬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1485년판 '동국통감'은 엄격 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준엄한 포폄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세조및 그를 보좌하던 훈신들을 공격하는 의미로 해석되며, 조선초기에 추진 되었던 부국강벽책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의미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사림 세력의 입지를 강화 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며, 그것은 곧 훈신의 압력을 벗어나 왕권을 강화 하려는 성종의 왕권 신장에도 이용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국통감'의 기초는 훈신들이 확립한 것이므로 비록 여기에 명분론 중심의 사론이 가해졌다 해도 이책은 훈신과 사림, 그리고 성종의 합작품인 것만은 부정 할수 없다. 그 때까지 조정 세력의 대립적인 양상 으로 역사관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던 점을 감안 한다면 '동국통감'은 조선 초기의 역사 서술의 완성품 이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동문선'에는 오언율시, 칠언율시, 오언절구 등 총 55종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어 중국 '문선'의 39종보다도 많으며, 뒤의 '속동문선'의 37종 보다도 많다. 그 가운데 단1편의 작품 만으로 된 단락도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의 여건이 허락 하는한 많은 작품을 수록하려 했음을 읽을수 있다. 작가의 경우에 도 최치원 등의 신라 인물에서 부터 이색, 권근 등 이책의 편찬 시점 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의 인물들까지 차례로 싣고 있다. 이들 이외에 승려 29명과 저자를 밝히지 않은 작품을 포함해서 도합 500 명 에 육박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중에 1편만 실린 작가가 220여 명에 이른다. 이 4,302편의 시문 가운데 시는 약 1천편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장이다. 문장을 종류별로 구분하면 조칙, 축문, 첩 등 의례성이 강한 문장이 1,130여 편인데 특히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표전 한 분야만 460여 편에 이른다. 문장의 선택 방향에서 알수 있듯이 '동문선'은 지배층의 봉건적 상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 하고 통치층의 권위를 드러 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관료적 문화의 산물 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도량문, 재사, 청사 등 도교와 불교 관계의 의례문을 195편이나 싣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당시 지배층 의 이념이 철저한 유교주의에 입각 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또한 작품의 선정 기준에 내용은 포함 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 되는데, 최충헌 부자를 미화하고 찬양 하는 시문이 많이 실려 있기도 하고, 또 승려의 비명이나 탑명, 불교의 교리를 설파한 원효의 불서 서문이 승려의 시 82편과 함께 실려 있는 것도 특징이다. '동문선'은 철저히 지배층의 시문만을 망라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삼국시대 이래 조선초까지의 문학 자료를 나름대로 책 한권에 집대성 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우리의 문학 전통을 중국의 그것과 병행하여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신라, 고려시대의 기록과 도교, 불교 관계자료는 중요한 문화물로 인식되고 있다. 5권은 주로 향악을 다루고 있어 속악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처용가', '동동', '정읍' 등을 수록하고 있다. 6권에는 아부악기도설을, 7 권에는 당부악기도 설을 싣고 있는데 악기의 전체 모양을 그림으로 볼수 있어 당시 악기를 재현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8 권의 당악정재의물도설은 당악정재에 쓰이는 복장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그 부분 부분의 치수까지 기록하고 있어 당악에 사용되는 의상 복원을 가 능케 하고 있으며, 향악정재악기도설은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에 대한 그림, 악 기에 쓰인 재료, 치수 등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악기를 복원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지막 9권의 관 복도설은 악공들 의 관복을 복원할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9권의 악집에서 특히 5권에 실린 훈민정음으로 된 '동동'과 '정읍' 등은 '악장 가사'에도 없고 오로지 '악학 궤범'에서만 볼수 있는 귀중한 국문학 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악학궤범'은 당시의 음악에 필요한 사항들을 빠짐없이 총 망라한 것이며 특히 아악, 당악, 향악 등에 차별을 두지 않고 잘 서술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음악을 이해 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악기와 악제가 모두 불에 타서 없어 졌으나 요행히 '악학궤범'을 되찾은 덕분 으로 모든 악기와 악제를 복원했던 역사적 사실이 바로 이책의 중요성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다. 시켰으며, 이사건 으로 후에 연산군이 폐비사건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자 이를 꾸짖으며 만류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 오릉에 덕종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그런데 1482년 조정에서는 그녀의 거처 문제가 새로운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 즉, 왕이 될 세자의 친모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졌고, 한편 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윤씨를 비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폐비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녀에게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 특히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 수대비)와 계비 정현왕 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 줄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터 였다. 그래서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 오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 하였다. 사사한 이후 폐비 윤씨의 묘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뒤 100년 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를 어기고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연산군은 즉위한지 몇달 되지 않아 윤씨의 폐비사건을 알게 되었고, 신원을 모색 했다. 그래서 1497 년 그녀의 묘를 개장하고, 1504년에는 성종의 유명을 어기고 제헌왕후에 추승 했으며 묘도 회릉으로 개칭 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관작도 추탈된뒤 다시는 신원되지 못했 다 폐비 윤씨는 세자를 낳은 왕비이면서도 투기심과 부덕함으로 인해 폐비 당했다가 결국 참극을 당하고 말았고, 이 폐비 윤씨사건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져 급기야 조선 조정에 엄청난 살생극을 불러 일으킨 원인이 된다.
|
▥ 조선왕조 제10대 연산군 ▥
폐비사건의 배경과 윤씨의 사약 한때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 했던 왕비 윤씨는 성종이 다른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일이 잦자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 두었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빈으로 강등될 지경에 처하게 되었으나 성종의 배려로 강등되는 수모는 겪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질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급기야 만백성의 어버이인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국모의 체통으로 있을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중전 으로부터 얼굴에 상처를 입은 왕의 체통은 말이 아니었다. 당시 법도로는 있을수 없는 행위였던 만큼 왕의 분노도 컸지만 그녀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격분은 더한 것이었다. 이 일로 조정에서는 폐비론이 대두 되었다. 여기에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훈구세력과 김종직 등의 사림세력이 가세 함으로써 윤씨를 폐비 시키고 말았다. 폐출된지 3년이 지난 1482년 왕자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자 조정 대신들 간에는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 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윤씨의 명줄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윤씨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의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상황으로 몰아 넣었다. 말하자면 윤씨가 사가에 나간 뒤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의 빛이 없다는 내용을 꾸며 왕에게 고해 바치기에 이르렀고, 이에 분개한 왕은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연산군의 성격을 나타내 는 두가지 일화 성종이 어느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때 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때 난데 없이 사슴 한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등을 핥아 댔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 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 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그는 가장 먼저 그사슴을 활로 죽여 버렸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이다. 융에게는 허침과 조자서 두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 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 었다. 그런데 이들 두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 이었다. 조자서는 엄하고 깐깐한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 이었다. 융은 장난 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자주 수업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자서는 툭 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조자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사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 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융의 이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다. 융은 왕위에 오르자 조자서를 가장 먼저 죽여 버렸던 것이다. 연산의 폭정과 폐출 어린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 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 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중 두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 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 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 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 되었고 마침내 박원종의 반란으로 폐출 되기에 이른다. 연산군의 업적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 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 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화 정책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 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 다. 흥청의 내력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 들였으며 심지어는 여염집 아낙을 겁탈 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 하는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 했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 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 거리다'라는 말이 생겨 났다. 연산군의 폭 정 그는 막상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 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 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 하기도 하는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사림파의 개념과 존립 의미 사림파 라 함은 일반적으로 16세기에 훈구파 내지 훈신, 척신 계열과 대립한 재야사류를 배경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을 일컫는다. 이 사림이라는 용어는 고려말, 조선초에도 간혹 쓰이긴 했으나 무오사화 이후 사화가 거듭 되면서 사화를 당한 선비 집단을 통틀어 표현하는 용어로 정착 되었다. 그러나 사림파라는 용어는 근대 역사학의 성립후에 비로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학자의 저술에는 조선 전기의 문인, 학자의 유파를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청담파 등으로 구분 했는데 이구분에서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그 대상이 둘로 나누어 지고 있다. 우선 성종대에는 문장, 경술과 관련하여 영남 일대의 종주격이던 김종직 문하를 가리켰고, 다음으로는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의 밑에서 수업한 중종대의 조광조 일파를 지칭했다. 김종직 문하들이 주로 문예를 중시한 영남학자들 이었다면 조광조 일파는 도학의 비중을 절대시 했던 영남, 기호학자들 이라는 점이 둘 간의 차이다. 조선 초기 까지만 해도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을 일컬어 사류 또는 사족 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 이후 도학에 중점을 둔 집단적인 학파를 이룬 사람들을 사림이라고 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림은 현직 관리 보다는 재야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학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의 학습은 관학인 사부학당 이나 향교 보다는 서원이나 서재를 통한 경우가 많았고, 사림파는 신유학(성리학) 중에서도 중국 송대의 정호, 정이 형제 와 주희가 체계화한 정주 성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은 송학, 정주학, 이학, 도학이 한 계통이고 명학, 육왕학, 양명학, 심학이 다른 한 계통을 이룬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자인 정주계의 이 학이 발달하고 상대적으로 육구연, 왕수인 등이 체계화한 육왕계의 심학은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흔히 성리학 이라고 하면 정주계의 이학을 가리킨다. 우리 나라의 성리학사에서 볼때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는 사림파 시대라고 할수 있다. 이른바 사화기 시대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화를 겪으며 사림파 학자들은 15세기 중엽부터 약1세기 동안 성리학 특유의 의리의 실천에 역점을 두고 성장했다. 이처럼 조선 성리학은 일종의 실천 성리학 으로서의 도 학적 특색을 지녔는데, 사림파 학자들이 성리학의 의리관을 실천에 옮기려는 경향을 흔히 사림파 정신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는 사회운동 내지는 정치 사상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당시 사림파 학자들이 체질화 시킨 성리학의 규범은 도덕적 규범의 성격이 강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성격을 지닌 규범 이기도 했다. 사림파의 정치적 활동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향촌 질서의 재확립과 관련되는 사회 운동으로, 일종의 지방자치 기구인 유향소 및 향약의 제도화 라고 할수 있다. 이 사회 운동은 관료제에서 나타나는 모순들을 혁신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군주 정치에 대한 인식 에서도 그 이전의 정주학자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조선왕조 초기의 정치주체는 군주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16세기 이후의 사림파 정신에서는 군주 역시 신하와 마찬 가지로 스스로를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군주가 도학적 인격을 갖추지 못하면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가치관이 성립되어 있었다. 주자의 '대학'정신에서 비롯된 이같은 인식의 전환은 군주제 자체를 부정 하기 보다는 군주의 절대권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도학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군주를 요구 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인재의 등용에서도 과거제 보다는 천거제를 선호 하였다. 그것은 과거제가 인간을 다스리는 능력을 측정 하기에는 부족 하다는 판단 에서였다. 때문에 사림이 공인하는 인재들을 천거의 형태로 등용 시켜야 한다고 주장 했으며, 실제 중종대의 조광조 등은 현량과를 통해 이를 실천으로 옮기기도 했다. 16세기 사림은 정치적으로 훈척 세력과 대립 하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 정치가 종식되자 사림은 내부적으로 학연과 파벌에 따라 나누어지게 된다. 이를 흔히 붕당 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파간의 상호 견제를 통한 새로운 신권 정치를 낳았다. 따라서 사림은 일차적으로 훈척의 대립 세력으로 발생하여 몇번에 걸친 사화를 겪은 다음, 선조 이후 훈척 세력이 거의 사라지자 내부적으로 파벌에 따라 나누어져 붕당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붕당 현상은 한쪽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않는한 조선 조정을 균형있게 끌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는 곧 조선 후기의 정치에서 왕이 붕당의 조정자로 자리매김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오사화 사건은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 되고 이극돈이 실록 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 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 를 폐한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를 조의하는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댄 것으로 은유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 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 되었다. 나머지 상소문은 세조비 정희왕후 상중에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렸 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이었다. 당시 이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그것이 사초에 실려 있는것을 발견하자 그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달려간 곳이 유자광의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함양관청에 붙어있던 자신의 글을 불태운 일 때문에 김종직과 극한 대립을 보였던 인물 이었다. 게다가 김종직은 남이를 무고로 죽인 모리배 라고 말하면서 유자광을 멸시하곤 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읽어보고는 곧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세력과 모의한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뻔했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 부도한 행위를 했으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마찬가지라 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산군은 사림 세력을 싫어하던 차였다. 그래서 즉시 김일손을 문초하게 하였다.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것이 김종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의도하던 바 대로 진술을 받아내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 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으며,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 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같은 죄에 걸린 강겸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그밖에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불고지 죄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양 보냈으며, 이종준, 최보, 이원, 이 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 로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실록 자료인 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죄로 파면되 었으며,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 등도 같은 죄로 좌천 되었다. 이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 당하고 이극돈까지 파면 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람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해서 이를 무오사화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 하려는 의도에서 이다. 갑자사화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기화로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국고가 빈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 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 했다. 왕이 향락과 사치에 마음을 빼앗겨 급기야 자신들의 경제 기반까지 몰수하는 것을 더이상 묵과할수 없다고 판단 하게된 것이었다. 그들은 막상 왕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 하면서 그동안 못마땅 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 줄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단 왕의 의도에 부합 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번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 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 세력중의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종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적이 있 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 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사건을 들추어 낸다. 폐비 윤씨 사건은 성종이 차후에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긴적이 있어 그때까지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이 알게될 경우 윤씨의 폐출을 주도했던 훈구세력과 사림 세력에게 동시에 화를 입힐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임사홍의 밀고로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한다.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 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으며,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다. 이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사람만이 성종 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씨 폐위에 가담 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죄하기 시작 했다. 이 결과 윤씨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 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 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 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성중엄, 이원, 신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에 이르기 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이처럼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 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 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임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 간의 정치 투쟁 이었지만,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한 궁중세력과 훈구.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
▥ 조선왕조 제11대 중종 ▥
연산군 폐출거사의 불씨 거사 계획을 가장 먼저 준비하던 사람은 성희안 이었다. 성희안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 학식이 깊고 치밀하며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 였다. 그는 종사관, 형조참판 등을 거쳐 1504년에는 이조참판직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망원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때, 그의 방탕한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가 종9품 부사용 이라는 미관말직으로 좌천된 상태였다. 성희안이 가장 먼저 접근한 사람은 박원종 이었다. 박원종은 한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주로 국가의 재정 문제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연산군의 사치 행각을 비판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윤 을 역임하고 1506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박원종이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된것은 그의 누이 박씨부인 사건 때문이었다. 박원종의 누이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후실 이었는데 인물이 절색 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소 그녀에 대해 흑심을 품고 있던 연산군은 마침내 큰어머니인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겁간 하였는데, 이 때문에 박씨부인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후로 박원종의 연산군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 되었고, 결국 삭직 되었던 것이다. 성희안은 박원종의 원한과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얻고자 했다. 그는 거사를 도모할 지략은 있었지만 군사력을 동원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박원종은 원래 무신 출신 이었으므로 병력을 동원할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그후 이들은 거사에 참여할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당시 인망이 높았던 이조판서 유순정을 끌어 들였으며, 연산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윤무와 무장 출신 장정, 박문영 등의 호응을 얻어냈다. 거사일은 1506년 9월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을 계획한 날로 잡았다. 하지만 연산군의 석벽 나들이는 갑작스럽게 취소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거사 계획은 일시 유보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 이과 등이 거사를 알리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종, 성희안 등은 혹 선수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군사를 모아 예정일에 거사를 결행했다. 거사 성공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들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 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 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 하는데 성공했다. 반란군들은 사전에 대궐로 진입하여 내응 하기로 약조되어 있던 신윤무 등의 도움을 얻어 쉽게 궐내를 장악 하였다. 거사에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를 찾아가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간언 한다. 정현왕후는 처음에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 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 에서 즉위식을 거행 함으로써 거사는 완결 되었다. 개혁정치의 종말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급기야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엄격한 도학 사상가인 조광조를 앞세운 중종은 그때부터 도학적 사상에 근거한 철인 군주 정치를 표방하며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철저한 유교 정치를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조광조의 주장에 따라 중종은 민간에 유교적 도덕관을 심기위해 여씨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여씨향약' 은 원래 송나라 학자 여대충의 저작 이었는데 후에 주희가 첨삭하고 주석한 '주자증손 여씨향약'이 널리 유포 되었다. 이는 유교 사상을 기반 으로한 일종의 민간 자치 규율 이었다. 또한 과거제가 인재를 등용 하는데 한계가 있다면서 사림들의 천거에 의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천거 등용제인 현량과가 실시되어 신진 사류 28명이 요직에 배치 되었다. 조광조의 이같은 정책은 이른바 사림파를 중심 으로한 지치주의적 이상 정치를 행하려는 시도에서 비롯 되었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 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해서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더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정치 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 까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 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의 반정 공신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 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이로써 조광조를 통한 4년 동안의 중종의 개혁 정치는 종말을 고하였다. 여러가지 사건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 남곤의 일파인 송사련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 되었다. 1524년에 는 심정, 남곤 등에게 쫓겨 났다가 기묘사화 이후에 정계에 다시 복귀하였던 권신 김안로가 파직되고, 이듬해 3월 에는 윤세창 등의 모역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에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심정, 유자광을 제거 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의 변이 일어나 관련도 없는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쫓겨나 죽었다. 이렇듯 정국의 혼란이 가속화 되던 중에도 1531년에는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 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정계는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이에 중종의 외척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김안로와 대립하게 되자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정권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조광조일파의 개혁작업 향약의 실시▷ 향약은 성리학적 이상사회, 즉 중국의 하, 은, 주 삼대에 걸친 이상 사회를 민간 속에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향약은 지방의 자치를 설정한 민간 규약으로 유학적 도덕관의 실 천과 도학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시켜 왕도 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개혁의 실패와 후대의 평가 그의 개혁 작업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명재상 이율곡의 '석담일기'에 잘 드러나고 있다. 율곡은 이 책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의 정치적 실패의 원인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이처럼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사상 보다는 미숙한 정치력과 극단적인 개혁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후세 사람들이 그의 사상은 따르되 그의 극단적인 개혁성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 한다.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비록 실패로 돌아 갔지만 그의 개혁 방향만은 옳게 평가되어 명종 대를 거쳐 선조 대에는 사림이 정치 세력의 중심이 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단경왕후 신씨 단경왕후 신씨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며, 연산군의 비 신씨의 외질녀 이다. 그녀는 1487년에 태어나 1499년 12세의 나이로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렸다. 1506년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 되었다. 반정 세력들은 신씨가 왕후가 될 경우 그녀가 죽은 아버지 신수근의 원수를 갚을 것을 염려하여 중종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신씨를 폐위 시켜야 한다고 주장 했으며, 결국 중종도 공신들의 힘에 밀려 그녀를 폐위하고 말았다. 그녀는 처음에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쫓겨 났다가 본가로 돌아 갔는데, 1515년 장경왕후 윤씨가 죽었을때 한때 그녀를 복위 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으나, 이행, 권민수 등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신씨의 폐위와 관련 해서는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공신들의 압력에 못이겨 신씨를 폐위하긴 했지만 그녀에 대한 중종의 애정은 남 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중종은 그녀가 보고 싶으면 자주 높은 누각에 올라가 그녀의 본가가 있는 쪽을 바라보곤 했다. 신씨의 집에서는 그 사실을 전해듣고 중종의 애틋한 그리움의 정을 달래기 위해 집 뒷동산에 있는 바위 위에다 신씨가 궁중에 있을때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 놓았다. 왕은 바위에 펼쳐진 그 치마를 바라보며 신씨를 보고픈 마음을 삭히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치마바위 전설을 남긴 신씨는 홀로 자식도 없이 외롭게 한평생을 보내다가 1557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영조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녀의 능호는 온릉으로 현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그녀의 이런 지나친 집권욕은 결국 명종 대의 혼란을 가중 시키는 원인으로 작용 하기도 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1550년에 선교 양종을 부활 시키고 폐지 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 하기도 했다. 그리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판서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명종은 그녀의 이런 지나친 정권욕에 불만을 품고 한때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들을 신원하고 신진 사림 세력들을 등용시켜 외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이 그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 조정을 패권 다툼의 장으로 몰아갔던 희대의 악후 문정왕후는 1565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의 소생은 명종을 비롯,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 1남 4녀이며, 능은 태릉으로 현재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
▥ 조선왕조 제12대 인종 ▥
인종의 등극 비록 계모이긴 하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자신을 그토록 죽이려고 하니 자식된 도리로 죽어주는 것이 효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조용히 불에 타 죽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세자의 말을 들은 빈궁은 자신 혼자는 절대 나갈수 없다고 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두사람 모두 졸지에 화형을 당할 지경에 처했는데, 그때 밖에서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자를 애타게 부르는 중종의 목소리 였다. 인종은 그 소리를 듣고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겐 효행이 되나 부왕 에겐 불효이자 불충 이라고 말하면서 빈궁과 함께 불길을 헤쳐 나왔다고 한다. 이 불은 누군가가 꼬리에 화선을 단 여러 마리의 쥐를 동궁으로 들여보내 지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불을 지른 장본인이야 구태여 따져보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종은 범인을 뻔히 알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고,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사건은 유야무야 없던 일로 처리되고 말았다. |
▥ 조선왕조 제13대 명종 ▥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윤원 형의 득세 명종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8년 동안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되자 조정의 대세는 윤원형 일파에게 돌아갔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친동생으로 153 7년(중종32년) 김안로가 실각한 뒤 등용된 인물 이었다. 그는 중종 시대부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세간 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 이라고 했다. 소윤파의 대윤파 제거 인종 즉위 당시에는 한때 대윤파가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반전 되었다. 윤원형은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윤임 세력의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 윤원형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 아들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려 했다고 무고하는 한편, 인종이 죽을 당시에는 윤임이 성종의 셋째 아들 계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이를 구실삼아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 하여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케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일파인 사림 세력들을 유배 시켰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로 조정을 장악한 윤원형은 미처 제거하지 못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 시킨바 있는 송인수,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 등이 사사 되고, 이언적, 백인걸 등 사림세력 20여명은 유배 되었다. 또한 윤원형은 자신의 애첩 정난정을 궁중에 들여보내 중종의 아들 봉성군을 역모와 연루 되었다고 무고하여 사사 시키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도 많은 인물들을 희생시켰다. 윤원형 일파가 이렇게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전횡 시대'가 도래했고 , 이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의 악행 윤원형은 막상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그동안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친형 윤원로를 유배 시켜 사사 시키는가 하면, 자신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 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또한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 매, 모리 행위로 부를 축적 하였다. 이때문에 윤원형의 집에는 뇌물이 폭주하여, 한성 내에 집이 15채나 됐으며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 이었다. 당시 권력을 탐했던 조신들은 정난정의 자녀들과 다투어 혼인줄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 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 하기도 했다. 이량의 등장 윤원형 일파를 견제하 기 위해 영입한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인 이량 역시 청렴한 인물은 아니었다. 명종이 자신을 신임하자 그는 이감, 신사헌, 권 신, 윤백헌 등과 결당하여 세력을 기르고 정치를 농단 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자기 편인 김명윤을 재상으로 삼아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자 우의정 이준경의 사직을 간언 하기도 했다. 게다가 축재에도 열을 올려 그의 집앞은 항상 시장처럼 사람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윤원형, 심통원 등과 함께 '조선의 3흉'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해서 명종은 그를 한때 평안도 관찰사로 내쫓기도 했지만 윤원형의 극심한 권력 독점을 염려한 나머지 1562년 다시 이조참판에 제수하여 중앙으로 불러 들였다. 그러자 이량은 한층 더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고 예조,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된뒤에 그의 권력 남용은 극에 달했다. 이량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자 사림 세력들은 그를 탄핵하기 시작 했지만 그는 오히려 기대승, 허엽, 윤근수 등의 사림 세력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음모가 그의 조카 심의겸에게 발각되어 사화를 획책 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 되었다. 이 때가 1563년 이었다. 사회의 혼란 문정왕후의 악행으로 임꺽정의 등장및 을묘왜변이 발생 하였고 이에 중종때 임시로 설치된 비변사를 상설 기구화 하여 외침에 대비 하도록 하였다. 문정왕후의 죽음및 평화회복 그녀가 죽자 가장 먼저 철퇴를 맞은 것은 승려 보우와 윤원형 일파였다. 승려 보우는 유림들의 탄핵을 받아 병조 판서에서 밀려나고, 다시 승직을 박탈당해 제주도로 유배 되었다가 죽었으며, 윤원형 역시 그의 애첩 정난정과 함께 강음에 유배 되었다가 자살 하였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사라지자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선정을 펴는데 주력 하였다. 그러자 조정은 안정되고 사회도 점차 질서를 되찾아 갔다. 하지만 명종은 그동안 너무 국정에 시달린 탓인지 병을 얻고 말 아 문정왕후가 죽은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명종의 나이 불과 34세 밖에 되지 않았다. 을사사화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중 하나로 1545년(명종 즉위 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정계 전면에서 후퇴하자 심정, 이항 등의 세력과 김안로 세력이 치열 한 권력 다툼을 일으 켰다. 이때 김안로는 심정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심정 일파가 유배 중이던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사형 시키고 다시 정계에 복귀 했다. 정권 장악에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허황, 채무택 등과 결탁하여 권세를 부렸으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 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은 문정왕후를 몰아 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문정왕후의 숙부 윤안임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뒤 사사 되었다. 이때 허황, 채무택 등도 함께 처형 되었는데 이들 셋을 정유삼흉 이라 했다. 김안로가 실각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척신으로 넘어 갔다. 이들 척신들의 세력 다툼은 먼저 세자 책봉 과정에서 발생 했다. 중종에 게는 왕비가 3명 있었는데, 정비 신씨는 중종 즉위 직후 간신의 딸이라 하여 후사 없이 폐위 되었고, 첫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 호 (인종)를 낳고 7일 만에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에 일대 논란이 벌어 졌는데 그 결과 1517년 윤지임의 딸이 두번째 계비로 책봉 되었다. 그녀가 곧 문정왕후로 경원대군(명종)의 어머니 였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그녀의 친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은 경원 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웠다. 하지만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 부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신들 또한 각각 대윤파와 소윤파로 갈라지게 됐는데, 이 양 세력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척인 대윤파가 득세하기 시작 했다. 윤임의 주변 세력은 대개 이언적 등의 사림파가 많았던 관계로 인종 재위 시에는 다시 사림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 했다. 하지만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세상을 떴으며, 12세 밖에 안된 명종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명종은 나이가 어린 탓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고, 때문에 조정의 권력은 자연히 소윤파에게 돌아 갔다. 소윤파는 윤임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대윤파를 궁지로 몰아넣어 제거 하는데 성공 한다. 이 결과 윤임및 그 일파인 유관,유인숙 등을 비롯하여 계림군,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이 처형 되었다. 이 때의 사건을 흔히 을사사화라 하는데 그것은 윤임 일파에 사림 세력이 몰려 있다가 한꺼번에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나머지 사림 세력과 윤임 세력을 제거 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 사건'을 기화로 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완전히 장악 하기에 이른다. 그 후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는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하게 된다.
이에 조선은 왜구 토벌대를 전라남도로 급파 하였지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포로가 되는 등 패전하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 남치훈을 방어사에 임명하여 토벌대를 다시 급파 했다. 이들에 의해 왜구가 섬멸되자 대마도와의 무역 관계는 더욱 악화 되었다. 조선 과의 무역 관계가 악화 되자 난처해진 대마도주는 조선을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며 세 견선의 증가를 간청 해왔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의 생활 필수품을 돕고자 식량 사정 등을 고려하여 세견선 5척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사건 이후에도 일본 내의 혼란은 더욱 심화 되었고, 왜구의 침입도 줄어 들지 않았다. 드디어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 시키자 왜구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대규모 전쟁을 감행해 왔다. 이것이 곧 임진왜란 이었다. 이 난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간의 통교는 거의 중단 되고 말았다. 인순왕후 심씨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 원군 심강의 딸로 1532년에 태어나 14세 나던 1545년, 왕비로 책봉 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그는 13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더 이상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후 1567년 명종이 죽자 대비가 되어 16세된 선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였다. 하지만 1568년 선조에게 친정을 시키고 물러 났으며, 1575년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명종의 능인 강릉에 묻혔다.
|
▥ 조선왕조 제14대 선조 ▥
즉위초의 평화 즉위 초년에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 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 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왕도 정치의 신봉자가 되었으며,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두 밀어 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 하였다. 또한 당시 성리학의 거두로 일컬어 지던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 했으며, 심지어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 하기도 했다. 선조는 친정을 하게 되자 가장 먼저 과거제를 개편하여 현량과 를 다시 실시 하였다. 그리고 기묘사화때 화를 입은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이후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림들을 신원 하였다. 반면에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작은 추탈 하였다. 또한 을사사화 를 일으켜 윤임, 유관 등을 죽이고 녹훈의 영전을 받았던 이기, 윤원형 등을 삭훈 하였다. 이로써 민심은 안정되고 정계는 사림이 득세하여 한때 문치의 깃발 아래 조정은 평화를 되찾았다. 동인과 서인으로의 붕당 동인에는 주로 주리철학적 도학을 펼친 조식과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가, 서인에는 주기철학을 주장 했던 이이와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인물들이 참여 했다. 사림의 분당 사태가 조정을 혼란 시키자 이이는 이들의 중재를 맡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후 이이가 죽자 파당으로 인한 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치열한 대결 양상으 로 치달았고, 그러던중 1591년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 하게 된다. 선조의비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조정은 별수 없이 후궁 소생 중에 세자를 책봉해야 했다. 그때 좌의정 이었던 서인의 거두 정철은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다가 선조의 진노를 사서 삭탈관직 되었다. 이사건 으로 서인의 세력은 실각하게 되었는데,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실각한 서인들에 대해 유혈 숙청을 감행 하였다. 북인과 남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삭탈관직 당한 서인 정철의 치죄 과정에서 사형을 시켜야 한다 는 과격파와 귀양을 보내야 한다는 온건파로 나누어진 것이다. 과격파인 전자를 북인, 온건파인 후자를 남인이라 했다. 북방의 변란과 임진왜란 의 발발 야인들은 1583년과 1587년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이탕개가 주동이된 이 반란으로 한때 경원부가 함락되고 부내의 관할권이 완전히 장악 당하자 조정은 온성부사 신립과 첨사 신상절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 하도록 했다. 한편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 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왜국에 보내어 그곳 동향을 살피도록 했다. 그러나 이듬해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 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대비 해야 한다고 했고, 통신부사 김성일은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 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스럽게 할뿐 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 했던 까닭에 김성일의 주장 대로 전란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성일의 주장과 달리 이듬해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해 왔으니, 이것이 곧 임진왜란 이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에 습격한 고니시 부대에 의해 부산포가 함락 되면서 왜군은 무서운 속도로 북상 하여 보름뒤인 4월 29일에는 충주를 장악 했고, 5월 2일에는 한양을 함락 시켰다. 이 후 개성, 평양 등이 차례로 함락되고 선조는 의주까지 몽양(피난)을 가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급기야 왕이 피난해 있던 의주성 주위만을 남겨 놓은채 함경도 일원까지 점령당해 명나라에 원군을 청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군 이순신의 활약과 의병의 봉기, 명나라의 원군에 힘입어 선조는 적의 포로가 되는 신세는 면할수 있었고, 이때부터 다시 왜군을 남쪽으로 격퇴 하여 1593년 4월에 한성을 수복 했다. 그리고 한동안 소강 상태가 지속 되다가 명과 왜의 화의가 깨지면서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생 했지만,1598년 8월에 도요토미가 병사 하자 왜군은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 했다. 신권정치의 구현 명종 시대까지는 역모에 버금가는 행위로 간주되던 붕당 행위를 선조는 정치적 개념으로 적극 수용해 보다 발전적인 당파 정치로 이끌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이러한 붕당 정치가 과도기적 양상을 띠고 있었기에 다분히 혼란상을 야기 시켰고, 여기에다 임진왜란이 겹쳐 그의 의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쨌든 선조가 구상했던 당파 중심의 신권정치는 근대적 정치 형태인 의회 정치를 이끌어 낼수 있는 기반이 될수도 있었다. 붕당정치의 바른 이해 우리는 당쟁으로 인해 조선이 망했다는 그릇된 인식을 강요 받아 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요된 이같은 식민사관의 근본 문제는 바로 붕당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 되었다는데 있다. 당쟁, 즉 붕당 정치에서는 상호 견제하고 대립하는 것이 곧 상호 공존하는 방법 이었다. 붕당 정치의 본질적인 취지는 바로 일당이 권력을 독점 하는 것을 방지 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리는 현대의 민주정치 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되던 시기를 돌이켜 보아도 이것은 명백해 진다. 흔히 조선말기를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안동김씨, 풍양조씨, 대원군 등의 외척, 인척 세력의 독재가 횡행하던 시기였다. 이 사실은 조선을 망하게 한 원인이 당쟁이 아니라 일당 또는 일부 세력의 독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당쟁, 즉 붕당 정치는 결코 식민사관 에서 강요 받았던 '망국적 권력 다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쟁발발 이전상황 임진왜란이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국이 조선을 침범한 사건을 말하며, 1차를 임진왜란, 2차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포괄적 의미에서 1, 2차를 합쳐 통상 임진왜란 이라고 한다. 이 사건을 일본에서는 '분로 쿠, 케이초의 역'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 의 역'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1589년 9월경에 여러 차례 논란을 거친 끝에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동시에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 했다. 그러나 10월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발생해 이 결정은 다시 지연 되었고, 11월 중순 쯤에 겨우 통신사 일행을 선정 했는데, 통신정사는 황윤길, 부사는 김성일, 서장관에는 허성으로 결정 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1590년 3월에 일본으로 떠나 이듬해 3월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통신사로 갔다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일본 정세에 대한 견해 차이로 조정은 한동안 동인과 서인 사이에 논박을 벌여야 했다. 서인인 통신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침략을 할것이라고 주장한데 반해 동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이 없었을 뿐 아니라 도요토미는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하였다. 이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 이었으나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 하였고, 김성일을 수행 하였던 황진 역시 마찬가지 였다. 이들의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자당의 인물을 비호하기 시작 했다. 그런데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결국은 전쟁설을 퍼뜨려 민심을 혼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 들이게 된다. 그래서 성을 쌓는등 전쟁에 대한 방비를 하던것 마저 각도에 명을 내려 중단 시켰다. 이후 선위사 오억령은 '일본이 다음 해에 조선의 땅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 하려 한다'는 보고를 하기도 했지만 묵살 당하고 도리어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왜관 에 머무르고 있던 왜인들이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어 왜관이 텅 비게 되자 그때서야 조선 조정은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을 감지하고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 윤선각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을 구축하기 시작 했다. 또 한편으로 신립을 경기도와 황해도에, 이일을 충청도와 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때늦은 조치 였다. 전쟁의 발발 조선이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로 인하여 전쟁에 대한 대비가 거의 전무했던 것에 비해 일본은 오랜 전쟁을 통해 연마한 병법, 무술, 축성술, 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서양에서 건너온 신무기 조총을 대량 생산 하면서 전쟁 준비에 총력을 기하고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 일본의 20여만 병력은 모두 아홉 개의 부대로 나뉘어 조선으로 밀려 들었다. 당시 일본의 총 병력이 30여만 이었던 것을 감안 한다면 전 병력의 3 분의 2가 조선 침략에 투입된 셈 이었다. 나머지 병력 중 약10만 여명은 도요토미의 지휘 아래 나고야에 머물러 있었으며, 3만여 명은 교토 를 수비하고 있었다. 20만 대군의 침입을 받은 조선은 불과 20일 만인 5월 2일, 수도 한양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 6월에 평양을 내주고 선조는 의주성에 피난 했다. 조선은 전라도 지역과 평안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지역을 일본군에게 내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전라도 지역의 수군 만큼은 결코 일본에 밀리지 않았다.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은 해전에서 연패를 거듭해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이 완전히 차단 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6월 이후부터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가 보낸 원군으로 전세는 조금씩 역전되고 있었다. 이듬해 2월 평양성을 회복하고, 행주산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4월에 마침내 한양을 탈환 했다. 이때 한성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군은 강원도와 충청도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켜 울산 위쪽의 서생포에서 진주 아래 쪽의 웅천까지 성을 쌓고 화의를 진행 시켰다. 일본은 화의를 진행 시키는 한편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여 진주성을 함락 시켰다. 이 진주성 싸움에서 의병 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 진 등이 전사하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한편 명은 일본의 화의 제의를 일단 수용하고 심유경을 도요토미에게 보내 2,3년간 교섭을 진행시켰다. 화의 진행 과정에서 도요토미는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을것, 무역허가 증명서인 감합인을 복원 할것, 조선8도 중 4도를 할양 할것, 조선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보낼것 등 네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하며 잡아 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 보냈다. 심유경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명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 한다는 내용의 봉공안을 내세워 명의 허락을 얻어 냈다. 이에 1596년 명은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도장을 전하니 도요토미는 분개 하면서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 보낸 뒤 다시 조선 침략을 꾀하였다. 이 때문에 심유경은 명으로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몇년간 지속되던 화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1597년 1월15일 일본은 다시 15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입해 왔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이 다시 침략 하자 명나라의 원군도 다시 압록강을 건너왔고 조선땅은 또 한번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한때 임금이 피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일본군의 기세가 등등 했다. 하지만 그동안 방비책을 마련한 조선군과 명군의 거센 반격으로 일본군은 충청도를 넘지 못 하다가 이듬 해 8월 도요토미가 병으로 죽자 철군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후 겨우 퇴로를 열어 11월에 완전 패퇴 했다. 이로써 6년 7 개월간의 조.일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삼국에 끼친영향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을 거듭하던 사회가 이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 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가 극심해 진다. 전화에 따른 직 접적인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농경지가 황폐화되어 170만 결이던 농토가 54만결로 줄어 들었다. 그래서 난 중에는 국가 재정 마련책의 일환으로 납속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 납속책은 소정의 곡물 이나 돈을 받고 납속한 자에게 일정한 특전을 부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의 시행으로 임진왜란 동안 많은 향리, 서얼, 천민, 노비 등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을수 있었다. 게다가 전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신분에 상관 없이 특전을 주거나 면천의 혜택을 주었기에 조선 사회는 신분 제약이 해이해 질수 밖에 없었다. 전란을 전후해서 민간의 생활은 처참해져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사태가 벌어 지기도 했고, 전란 중에 조정에 불평을 품고 내란을 획책 하는 사례도 있었다. 1594년 의 송유진의 난, 1596년의 이몽학의 난이 당시에 일어났던 대표적인 반란 사건으로 일반 민중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문화재의 소실도 엄청났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이 소실 되고 서적, 미술품 등이 없어 지거나 약탈 당했다. 또 역대 실록을 보관 하던 사고도 전주사고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하지만 전란이 꼭 악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전란의 영향으로 그동안 소흘하게 다루어 졌던 국방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타민족과의 갈등을 통해 애국심이 고취 되기도 했다. 또한 병제를 재편하고 무기의 개량에 착수 했으며 병술을 개혁 했다. 1594년 에는 훈련도감을 설치 하여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예비군인 속오군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고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는 종래의 주무기인 활, 창, 검 등의 무기와 총통, 완구, 화전 등의 화기 외에 난 중에 비격진천뢰 와 화차가 발명 되었고, 일본과의 전투에서 습득한 조총을 제조하여 실전용으로 배치 하기도 했다. 또한 전란때 명군이 지원한데 대한 결과로 숭명사상이 더욱 높아지고, 그들에 의해 관우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한양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 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한편 일본도 전란으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오랫동안의 무리한 전쟁으로 국민 생활을 피폐해져 있었으며,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 되어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서 끌고 간 도공들의 도자기 제조로 도자기업이 크게 발전 하였고, 약탈해간 조 선 활자의 영향으로 활자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 하였다. 거기에다 포로로 끌고간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 하는 밑거름을 마련했다.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서적들을 가져가 일본 문화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기도 했다. 명나라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 조선의 요청으로 대규모 원군을 파병했던 명은 엄청나게 국력이 소모 되었고, 그 때문에 국가 재정이 문란해져 국방에 어려움이 초래 되었다. 그러한 명의 국방력 약화는 여진족의 세력 팽창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아 결국 여진족에 의해 명이 망하게 되는 원인으 로 작용하게 된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17세기 동북아 국제 정세에 커 다란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 이었다. 조선은 비록 일본의 침략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통이 지속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힘이 커지고 양반 중심의 정부의 힘이 약화 되는 현상을 낳았다. 덕흥대원군 이초 중종의 아들로 창빈 안씨 소생이다. 1530년에 태어 났으며 이름은 초, 자는 경패 이다. 1538년 덕흥군에 봉해졌고, 1542년 정인지의 손자인 판종추부사 정세호의 딸과 혼인 하였다.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 등의 세아들 을 얻었으며 1559년 30세를 일기로 병사 했다. 이후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음에 따라 그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이 즉위하여 조선14 대 왕 선조가 되었고, 1570년 덕흥대원군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수락산에 있다.
|
▥ 조선왕조 제15대 광해군 ▥
세자책봉의 음모와 정철의 퇴출 1591년, 좌의정 정철은 우의정 유성룡, 영의정 이산해, 대사헌 이해수, 부제학 이성중 등과 세자 책봉 문제를 놓고 심각한 논의를 벌였다. 그리고 논의 결과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 하기로 결정하 고 선조에게 주청을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음모가 진행 되었다. 서인의 거두 정철을 궁지로 몰기 위해 동인의 중심 인물인 이산해는 은밀히 계략을 짜고 있었다.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인빈을 찾아가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옹위 하려고 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광해군을 세자로 옹위한뒤 인빈과 신성군을 모함하여 죽일 계략을 짜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을 듣고 인빈은 당장 선조에게 달려가 정철이 자 신들을 죽이려고 모략을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인빈을 총애하고 있던 선조는 이 말을 듣고 심하게 분개하며 정철을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한 정철은 경연장에서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세울 것을 주청했다가 선조의 진노로 그만 화를 당하고 만다. 이 때 동인인 유성룡과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인인 이해수, 이성중 등만 정철의 주청에 가세 했다가 강등되어 외직으로 쫓겨 났다. 광해군의 험난한 등극 영창대군 을 지지하는 소북파는 광해군이 서자에다 차남인 까닭에 명나라의 고명도 받지 못했다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 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 버린다. 이후 이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 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 하지만 선조는 미처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게 된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 시키고 수렴청정 할것을 종용 하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 시킨다. 왕권안정에서의 피바람 그는 즉위 하자마자 우선 왕위계승 과정에서 계략을 부린 유영경을 유배시켜 죽이는 한편, 왕의 권위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왕권을 위협하던 동복형 임해군도 유배시켜 죽인다. 또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 시키기에 이른다. 인조반정의 명분 제공 1611년에는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성균과 유생들이 유생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는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사건이 발생 하는데, 광해군은 이 사태에 직면하자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서 쫓아내는 조처를 취한다. 이 때문에 그는 등극 초기부터 유생들과 등을 지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1612년 이른바 '김직재의 옥'으로 소북파 인사 1백여명이 숙청 당하는 대옥사가 발생한다. 이 옥사는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보, 관인을 위조한 서건에서 시작 되었는데 모진 고문과정 속에 사건이 겉잡을수 없이 확대되어 결국 역모 사건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1613년에는 다시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위리안치 (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했다가 증살(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는 것)시키는 한 편,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들을 삭직 시킨다.
이 후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발생해 능창군(인조의 아우)는 물론 이에 연루된 신경희 등이 제거 된다. 능창군은 정원군의 셋째 아들로 일찍이 임진왜란 중에 죽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 이었다. 그는 어릴때 부터 총명 하고 기상이 비범하여 광해군과 대북세력의 경계를 받아왔다. 당시 죄수 소명국이란 자가 무고 하기를 그가 신경희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함에 따라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 되고 이후 살해당할 위험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신경희는 사형 당하고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김이강, 오충갑 등은 유배 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신경희의 옥사'라고도 한다. 1617년 에 이르러서는 폐모론이 대두하여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의 폐모 반대론자 들을 유배 시키고 이듬해인 16 18년에 인목대비의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 시킨다. 이로써 광해군과 대북파는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제거 하는데 성공 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인명을 희생 시키고 패륜 행위를 일삼음으로써 오히려 반정의 명분을 제공 하고 말았다. 민생안정 광해군은 등극 하자마자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 함으로써 민간의 세 금 구조를 일원화 시키고 세무 부담을 줄여 주었다. 1611년에는 농지를 조사하고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는 정책인 양전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국가재원을 확보 하기도 했다. 또 선조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즉위년인 1608년에 준공하고, 1619년 경덕궁(또는 경희궁), 1621년에는 인경궁을 중건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 하는 일이 생기기도해 민간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 으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완전히 소실되어 국사를 월산대군의 서가에서 논의 해야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능양군의 반정 1623년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의 사대주의자들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 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반정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 시킨다. 그들의 반정명분은 광해군이 사대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 했다는 것이었다. 폐위 된후 광해군은 강화도에 안치 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어 18년 동안 생을 연명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 기간 동안 광해군은 아주 초연한 자세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1641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폐위 그 이후 광해군 폐위후 광해군과 폐비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네 사람 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이들을 강화도에 유폐 시킨것은 그곳이 감시 하기에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 세력은 이들 네사람을 한곳에 두지 않았다.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서문 쪽에 각각 안치 시켰다. 이들이 안치되어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시작한지 두달쯤 후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자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기이 하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들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 쪽과 내통을 하려고 한것 같다. 세자 질은 어느날 담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 나가려다 잡히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 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짐작컨대 그는 은덩어리를 뇌물로 사용해 강화도를 빠져 나가려 했던것 같다.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모종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전달 하려 했을 것이다. 세자 질이 황해감사에게 전달하려 했던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수 없지만 추론컨대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평양 감사와 모의를 하여 반정 세력을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목대비와 반정세력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이사실을 전해들은 세자 질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세자빈 박씨도 이사건으 로 죽었다. 박씨는 세자가 울타리를 빠져 나갈때 나무 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세자가 빠져나가는 것을 돕기 위해 망을 보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세자가 탈출에 실패하여 다시 안으로 붙들려 오는 것을 목도한 그녀는 놀라서 그만 나무에서 떨어졌고, 이후 스스 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 반쯤 뒤에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폐비 유씨는 한때 광해군의 중립 정책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하면서 대명 사대정책을 주청 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위되자 궁궐 후원에 이틀 동안이나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것이 아니라 몇몇 인사들의 부귀영화를 위한것이 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나름대로 성리학적 사상에 기반한 가치관이 뚜렷했던 여자였 다. 그러나 유배 생활이 시작 되면서 그녀는 화병을 얻고 말았다. 도저히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유배 생활 약 1년 7개월 만인 1624년 10월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마저 죽자 광해군의 가족은 박씨 일가로 시집간 옹주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 생활에 적응해서 그 이후로도 18년을 넘게 생을 이어간다. 이 과정 에서 그는 몇번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된바 있던 인목대비는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 어 있었고, 인조 세력 역시 왕권에 위협을 느긴 나머지 몇번이나 그를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살해의 기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 스러워 그를 배에 실어 태안으로 이배 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에 안치 시켰으며, 이때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뒤 그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 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 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 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 시켰는지도 모른다. 또 그긴 세월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 질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 하게도 그는 1641년 귀양생활 18년 수 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정적제거 대북파 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첫번째 사건은 1612년 일어난 '김직재의 옥'이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봉산군수 신률 이병역 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 하면서 시작된다. 신률은 그를 체포한후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모반을 획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 했다는 내용의 자백을 받아내고 다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 사건 계획을 자백 받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 여 불시에 한양을 함락 시키고 대북 세력및 광해군을 축출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된 사람이 김백함 이라는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 되었 다. 김백함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 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 신 및 그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 받았으며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모든 내용을 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정언 정호서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했다고 허위자백하기 까지에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하나였던 박동량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하려던 왕이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 되었으며, 그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는 모두 숙청 되었다. 이 옥사로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 당하고 김제,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 당했다. 칠서의 옥과 계축옥사 1613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냥을 약탈한 강도 사건이 발생했 다. 이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명 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리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 달라는 상소를 한바 있는데 이것이 거부 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 에서 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행세하며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 함으로써 이들은 일망타진 되었다. 하지만 이 '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 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 우게 된다. 이이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우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에 하나 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박응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을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바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 시키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 하기로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 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 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의 서인세력 수십명을 하옥 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했던 일이 발각 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강항에게 살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흔히 '계축옥사'라고 한다. 대북파의 능창군 제거작업 신경희 는 당시 수안군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1615년 그가 양시우, 소문진, 김정익 등과 함께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는 소명국의 말에 따라 이들에게 역모 혐의가 씌워진다. 그리고 이때 이들이 추대 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능창군 이라는 자백을 얻어내고 능창군을 유배시켜 죽여 버린다. 이 때 죽은 능창군은 후에 반정을 통해 왕이 된 능양군(인조) 의 동생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능양군이 반정을 도모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것을 알수 있다. 대북파는 정권을 독점 하게되자 1618년, 5년 전의 계축옥사를 다시 거론하며 이를 빌미로 인목대비를 폐위 시켜서 궁에 유폐 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이첨 등의 강경론자들은 인목대비를 사사시킬 것을 간언 하지만 광해군의 반대로 실현에 옮기지 못한다. 이 후 이이첨은 몇번에 걸쳐 인목대비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다른 대신들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은 왕권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거의 모두 제거했고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등은 세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홍길동전'의 대강 이 소설 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 때로 주인공 홍길동은 홍 판서의 서자로 등장 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상이 뛰어나고 무술이 남달랐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한을 품게 된다. 이에 홍판서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객을 시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된 길동은 길을 떠나 도적 두목이 되고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 생활을 하게 된다. 홍길동의 의적 행위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전국 각처에서 같은 이름의 도적들이 나타나 어명으로 잡아들인 홍길동만 해도 3백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길동을 체포하지 못한 조정은 홍판서를 시켜 그를 회유 하기에 이르고 타협 안으로 그를 병조판서를 제수하게 된다. 길동은 한때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다시 남경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게 되는데, 남경으로 가는 도상 에서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하고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요괴를 퇴치한후 율도국 왕이 된다. 이 후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듣고 일시 귀국하여 3년상을 마친 후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왕으로 살게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
▥ 조선왕조 제16대 인조 ▥
능양군의 무력정변의 배경 인빈 김씨와 그녀의 소생들을 총애했던 선조 였지만 임진왜란과 그밖의 여러가지 이유로 광해군에게 세자자리에서 밀린 인빈김씨와 그녀의 소생들은 항상 불만을 갖고 있었다. 후에 광해군이 왕권강화 차원에서 그녀의 소생중에 가장 위험한 존재로 지목했던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능창군을 신경희 사건과 연루시켜 사사하고 인목대비마저 유폐 시키자 능창군의 맏형인 능양군은 영창대군을 지지하고 인목대비를 따르고 있던 서인들과 함께 역모를 도모 한다.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 에 관한 합당한 이유 세가지 첫째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인 자신을 유폐 시켰다는 것. 왕으로 등극후의 수습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복원 했으며, 광해군시절 정권을 독점했던 정인홍, 이이첨 등을 사형 시키고 나머지 대북세력 200여 명을 모두 숙청 하였다. 그리고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다 여주에 유배 중이던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앉히고 반정에 가담했던 서인의 김 류, 이귀 등 33명을 세 등급으로 분리해 정사공신의 훈호를 내렸다. 그는 또한 광해군에 의해 희생된 영창대군, 임해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등을 신원하고, 나머지 희생자들도 대부분 관작을 복구 시켰다. 이렇게 하여 조정은 서인이 제1당, 남인이 제2당이 되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여 그동안 광해군이 유지해 오던 중립외교의 틀을 깨뜨렸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호시탐탐 내침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이 3년 뒤인 1627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을 일으키자 후금군의 기세에 위험을 느낀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 하였다. 그 때 후금은 조선측에 서신을 보내어 자신들의 침략 이유 일곱가지를 밝히며 조선의 만주 영토를 후금에 내 놓을것,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것, 명나라 토벌에 3만 군사를 지원할것 등 세가지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이에 최명길 등이 강화 회담에 나서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으면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다섯가지 사항을 앞세워 약조를 성립시키자 후금은 철군 하였다. 이후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 관계를 폐지하고 새로 군신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 하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 이 제의를 거부하자 그들은 다시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 1 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이때 척화론을 펼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도 함께 청으로 끌려 갔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 되었던 국가기강과 경제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피폐해 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다. 이모든 일련의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이괄의 난때 이괄이 북방 주력부대를 이끌고 난을 일으켰기에 변방의 수비에 많은 허점이 생겼던 까닭일 것이다. 인조의 업적 1624년 에는 총융청, 수어청 등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여 북방과 해안 방어를 보강 했고, 이후 군역의 세납화와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사목을 발표 했다. 이로써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할수 있는 제도가 마련 되었다. 1628 년에는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표류하여 왔는데, 그의 이름을 박연으로 고치고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 넣어 대포 제작법과 사용법을 가르치게해 조선군의 화력을 증강 시키기도 했다. 한편 민생 안정책으로 광해군 당시 경기도에 한정해서 실시하던 대동법을 1623년 강원도까 지 확대 실시해 징세의 일원화를 꾀하고 민간의 부담을 줄였으며, 1634년에는 삼남 일대에 양전을 실시하여 농경지의 면적을 정확하게 측정 함으로써 세금수입을 확대 시켰다. 또한 농토세 징수 규범인 전세법을 폐지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화폐사용을 위해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 했으며, 청인과의 민간 무역을 공인하여 북관 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변의 중강에 시장을 열었 다.(경원개시, 중강개시) 새로운 문화형성 1645년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정두원과 소현세자가 돌아 오면서 화포, 천리경, 과학서적, 천주교서적 등을 가져오고, 송인룡 등이 서양의 역법인 시헌력을 수입하여 새로운 문화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 시기에 '황극경세서', '동사보편', '서연비람' 등의 책들이 간행 되었고,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조선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인렬왕후 한씨 영돈녕부사 한준겸의 딸로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 능양군과 결혼 하여 청성현부인에 봉해지고 1623 년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 되었다. 이후 슬하에 소현, 봉림, 인평, 용성 등 네 아들을 낳고 1635년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은 장릉으로 인조와 함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었으나 영조때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로 옮겨졌다.
하지만 조선조정은 소현세자의 이같은 활동을 친청 행위로 규정하고 그를 비난했다. 당시 조정은 대부분 친명반청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 역시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소현세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그가 조선 국왕으로서 부적격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인조가 총애하던 후궁 귀인 조소용과 세자빈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 시켰다. 소현세자가 9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1645년 귀국 하였을때 인조는 그를 무척 박대 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철저한 친청주의자가 되어 돌아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서양문물 조차도 수용하지 않는 용렬한 모습을 보인다. 입국후 2달 뒤인 4월 23일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드러 누웠고, 와병한지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 하였다. 이때 그의 온 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 에서는 피가 쏟아 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일부 학자 들은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34세의 혈기왕성한 나이로 죽은 이듬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 부터 사약을받고 죽었으며 세아들도 제주도로 귀양가 두명은 병에걸려 죽었다. 이사건 이후 인조는 손자를 죽였다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자 그들을 돌보던 나인을 장살 시켰다. 소현세자는 죽은후 경기도 고양시에 묻혔는데, 처음에는 이무덤을 소현묘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 에 이르러 소경원으로 격상 되었다.
|
▥ 조선왕조 제17대 효종 ▥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볼 모생활에서의 차이 소현세자는 서양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천주교를 알았고, 또한 서양의 과학 문명에 눈을 떴다. 아담 샬은 그에게 천주상과 서양의역서 및 과학서들을 선물로 주었고, 그덕택으로 소현세자 는 서양의 역법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역법이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 한편 조선의 천문학이 초보 단계에 있음을 알았다.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봉림대군 역시 청에서 많은 서양 문물들을 대하고 있었지만 소현세자만큼 깊이 심취하거나 경탄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는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하고 청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여 본국에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청의 대명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명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 하기도 했고, 한편 으로는 패전국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로 부터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이같은 경험들은 반청 사상을 더욱 강하게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하 게된 원인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한 것은 반청 감정 때문 이었다. 원래 인조의 정치적 기반은 대명 사대주의였다.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도 바로 그것 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대모화 사상은 병자호란을 불러 일으켰고, 급기야 왕인 자신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하는 치욕까지 겪게 했으며 자식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 때문에 인조의 반청 감정은 그 어떤 실리주의 노선으로도 무마 시킬수 없을만큼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인조 보다도 소현세자를 더 신뢰 하였던 것이다. 인조는 이같은 소현세자의 행동을 용서할수 없었다. 소현세자 의 행동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뒤흔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의 독살 의문성 이 의문사에 대해 학자 이식은 소현세자 묘지문에 '환궁 이후 계속해서 한증 과 열기가 있었는데 의원의 시술이 잘못되어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고, 인조실록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자가 심양에 있을때에 집을 지어 단청을 하고 포로된 조선 사람들을 모아 밭을 일구어 곡식을 쌓아놓고 진기한 물건들은 사들여 세자가 머무는 관소가 시장과 같았다. 임금이 이를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임금이 총애하는 궁녀 조소용(귀인 조씨)이 예전부터 세자와 세자빈을 미워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금 앞에서 세자빈이 임금을 저주 했다거나 몹쓸 말을 했다는 따위로 헐뜯었다. 세자는 환국한지 얼마 안돼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지 며칠만에 죽 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때 종실인 진원군 이세 완이, 그의 아내가 인조의 전비인 인렬왕후의 동생인 관계로 염습에 참여해 그 광경을 보고 나와서 남에게 말한 것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할때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추론의 증거는 사건에 대한 사후 처리와 소현세자의 장례식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의술을 잘못 사용하면 의관이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 였는데, 인조는 의관의 추고에 대한 논의 자체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대사헌 김광현이 인조의 주치의 이형익 이연일 세자에게 침을 놓은 잘못을 따져야 한다고 말하자 인조는 이형익을 옹호 하면서 김광현에게 몹시 화를 냈고, 나중에 그가 세자빈 강씨의 조카사위라는 이유로 좌천시켜 버린다. 또 소현세자의 장례식도 일반 평민의 장례에 준하는 절차를 밟았을 뿐만 아니라 기일을 단축시켜 초상을 치르게 하 였고, 참관 인원을 일부 종실로 제한 하기도 했다. 게다가 인조는 묘지를 홍제동으로 하자는 신하들의 중론을 무시하고 멀리 고양의 효릉 뒤쪽에 마련 하라는 명을 내렸다. 더욱이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지 3개월 후에 갑자기 대신들을 불러들여 자신은 병이 깊으니 새로운 세자를 책봉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첫아들 석철로 하여금 왕위를 잇는것이 마땅 하다고 했으나 인조는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세손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왕실의 관례를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이 후 소현세자의 주변세력과 세자빈 강씨의 친정 오빠들을 모두 귀양 보내고 마지막 남은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에 유폐 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죽게 하고, 나머지 셋째 아들은 귀양지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그의 가족과 주변세력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인조의 이같은 일련의 행동들은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 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이유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8년여를 심양에 기거 했지만, 소현세자가 거기에서 서양 문물을 배우고 실리외교를 주창 했던것과는 달리 오히려 대명 사대주의에 더 집착하여 반청 사상을 한껏 고조시킨 인물 이었다. 그의 이같은 반청 감정은 인조를 흡족하게 하는 일이었다. 인조는 봉림대군의 반청 감정이 자신의 대명 사대사상과 일치 한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큰아들을 죽이고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던 것이다. 봉림대군은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왕위를 이어 받았다. 그가 바로 북 벌론을 내세우며 국력 강화에 전념했던 조선 제17대왕 효종이다. 김자점의 역모사건 김자점, 그는 인조반정의 공신 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한때 정권을 장악해 권세를 누리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바 있으며, 이 후 김류와 제휴 하면서 다시 정계에 나선 인물 이었다. 김자점은 사은사로 수차에 걸쳐 청나라를 내왕 하면서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소용과 결탁하여 인조의 의심을 받고 있던 소현세자를 비난하여 인조와 이간을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조소용이 낳은 효명옹주와 자신의 손자 세룡을 혼인 시킴으로써 궁중과 유착 관계를 보다 강화 시켰다. 그러나 김자점은 자신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여 김상헌, 송시열 등 반청 인사들을 중용하자 그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 당했다. 그는 유배 후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역관 이형장을 시켜 새 왕이 구신 들을 몰아내고 청나라 를 치려고 한다고 효종을 청에 고발 하였다. 그는 그 증거로 조선이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문서를 보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는 군대를 압록강 근처에 배치하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 하였다. 하지만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 등의 외교 능력에 힘입어 이사건은 무마 되었고 김자점은 다시 광양으로 유배 되었다. 광양으로 유배된 김자점은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한다. 아들 이익으로 하여금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을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계획은 미리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죽었으며, 그를 후원하던 인조의 후궁 조귀인도 사약을 받았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모두 축출 당했다. 효종의 북벌 강화정책 1652년에는 북벌의 선봉 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임금의 호위를 맡은 금군을 기병화하는 동시에 1655 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에 통합하고 군사도 600여 명에서 1천여 명으로 증강시켜 왕권을 강화 시켰다. 또한 남한 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 하여 한성 외곽의 방비를 보강 하였고,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강 시키고자 하였으나 재정이 빈약하여 실현하지 못했다.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조때 설치 되었다가 유명무실화된 영장제도를 강화하고,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정예 인력을 보충시켜 기강을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한양외곽과 강화도 군력을 증강시켜 수도의 안전을 꾀했다. 효종은 이러한 군비 증강을 바탕으로 두번에 걸쳐 나선 정벌을 감행 하기도 했다.(나선은 러시아를 가리킨다) 나선은 흑룡강변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 흑룡강 우안의 알바진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 하는등 불법적인 탈취행위를 하였다. 그 때문에 주변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잦았으며, 나아가서는 청나라 군대와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청은 누차에 걸쳐 나선인들의 국경진입을 막았지만 그들은 점차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노략질을 일삼았다. 청나라 정부는 군사를 보내어 영고탑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축출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총포에 번번이 당하곤 하였다. 청은 별수없이 조선 조총군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청은 조선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하여 영고탑에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심의 끝에 조총군사 100명과 여타 병력 50명을 파견하여 청나라 군사와 함께 나선병력을 흑룡강 이북으로 격퇴 시켰다. 이것이 1654 년 4월에 있었던 제1차 나선정벌 이다.
조선은 1658년 6월 청의 요청에따라 다시 조총부대 200명과 초관 및 여타 병력 60여 명을 파견해 제2차 나선 정벌에 나섰다. 나선 정벌에 나선 청군과 조선 조총군은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지접에서 적을 만났다. 이 때 나선 군은 10여 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다가 왔는데, 청군은 겁을 먹어 감히 그들을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 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력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나선군은 흩어졌고, 이후 흑룡강 부근에서 활동하던 나선군은 거의 섬멸 되었다. 이 두번 의 나선정벌은 조선군의 사기를 한껏 높여 이후에도 나선 정벌을 핑계로 조선은 산성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북벌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충하게 하고 필요한 화약 생산을 위해 염초 생산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이런 집념어린 군비확충 작업은 번번이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쳐 중단되곤 하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군비 확충에만 주력한 나머지 민생을 곤란하게 하는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효종의 업적 두 번에 걸친 외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 질서 확립을 위해 그는 충청도와 전라도 근해 지역에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고,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한편, 문화면에서도 역법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태음력과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하여 24 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을 사용하게 했다. 또 '국조보감'을 재편찬해 치도의 길을 바로잡고, '농가집성' 등의 농서를 마련해 농업 생산을 늘리려 했다. 또한 흐트러진 윤리를 바로잡기 위하여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 김정국이쓴 '경민편' 등을 간행 하였다. 인선왕후 장씨 인선왕후 장씨는 우의정 장유의 딸이며, 13세가 되던 1630년 한살 어린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에 봉해졌다. 1637년 조선이 병자호란에 패전하자 소현세자를 따라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잡혀가 8년여 동안 심양에서 생활 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었으나, 책봉이 제때 되지 못해 사저에서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 뒤 세자빈에 책봉 되었으며,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어 2년 뒤에 정식으로 책봉 되었다. 1659년 효종이 죽은후 1662년 효숙의 존호를 받아 대비로 있다가 1674년 질병을 얻어 죽었다. |
▥ 조선왕조 제18대 현종 ▥
남인과 서인의 예론정쟁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쟁화 되었다. 이무렵 조선조정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과 인조의 중립에 정책으로 기용된 남인 세력으로 양분 되어 있었다. 인조, 효종 대에 남인은 주로 영남학파의 주리론을 주장하고 서인은 기호학파의 주기론을 주장하는 학문적인 대립을 벌였으나, 현종대에 와서는 본격적인 정치논쟁을 일삼곤 했다. 예론 역시 처음에는 학문적인 대립에서 시작 되었지만 나중에는 정쟁으로 확대된 사건 이었다. 당시 조선의 일반사회 에서는 주자의 '가례'에 의한 사례의 준칙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왕가에서는 성종때 제도화된 '오례의'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인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에 있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가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년상을 해야하는 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 이므로 당연히 기년상(1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 했다.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 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 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서인과 남인의 이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싸움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 되었다. 결국 효종의 상중에 일어난 이 논쟁에서 서인의 기년상이 채택 됨으로써 남인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그럼에도 남인의 반발이 심상치 않자 1666년 현종은 기년상을 확정 지으며 더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것을 엄명했고, 만약 이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내렸다.
그러나 복상 문제는 1673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쟁점으로 부각 되었다. 이번에도 서인측은 효종이 차남 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공설(9개 월)을 내세웠고, 남인측은 그녀가 비록 자의대비의 둘째 며느리이긴 하나 중전을 지냈으므로 큰 며느리나 다름 없다면서 기년설(1년)을 내세웠다. 현종은 이때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의 의견에 따라 남인측의 기년설을 받아 들여 자의대비로 하여금 기년 복상을 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서인은 실각 하였고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1674년 8월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의 종래 주장이 옳았음을 피력 하다가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고, 이후 서인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 예론 정쟁의 파장은 '현종실록'에까지 영향을 미쳐 숙종대의 경신대출척(1680년)이후 다시 집권한 서인에 의해 실록이 개수되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현종의 업적 군사적 으로는 효종대에 비밀리에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북벌계획이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 이를 중단하는 대신 군비증강을 위해 훈련별대를 창설 하였으며, 민간경제를 안정 시키기 위해 광해군 이후 꾸준히 실시해 오던 대동법을 호남지방 전역에 확대 실시했다. 문화적으로는 인쇄사업 육성을 위해 동철활자 10여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관 측법과 역법 연구를 위해 혼천의를 다시 제작케 했다. 그리고 예론 정쟁이 활발히 일어나 사회예절이 강조됨에 따라 동성 통혼을 완전히 금지 시켰으며 또한 정실이 개입될 요인을 없애기 위해 친족끼리 같은 부서에 있거나 송사를 맡거나 시험관을 맡는것을 금지 시키는 상피법을 제정 하기도 했다. 한편 이시기에 제주도에 표류해 압류되어 있던 하멜 등 8명의 네덜란드인이 전라도 좌수영을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14년간의 억류 생활을 서술한 '하멜 표류기'와 부록인 '조선국 기'를 발간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되기도 했다. 명성왕후 김씨 명성왕후 김씨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로 1651년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현종과 가례를 올렸다. 이후 1659년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 되었으며 1683년 12월 5일,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는 지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과격하여 궁중의 일을 처리할때 감정적이고 거친면을 보였다고 한다. 숙종 등극 이후에는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 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1675년 '홍수의 변' 때는 대신들 앞에 나와 울부짖는 등 불미스런 사태를 유발하기도 했다. 능은 숭릉으로 현종과 함께 경기도 구리시에 묻혔다. |
▥ 조선왕조 제19대 숙종 ▥
남인중심으로의 변화
숙종 대에는 이미 열거한 당쟁 이외에도 정권을 주도하기 위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복제와 관련하여 송시열의 오례 문제를 둘러싼 '고묘논 란', 김만기, 김석주, 민정중 등 외척 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 정치에 대한 유생들의 공격에서 비롯된 송시열의 '임술삼고변' 공방, 존명 의리와 북벌론의 허실을 둘러싼 명분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비롯된 왕과 신하들간의 충돌, 그리고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일컫는 '회니시비' 등 수많은 정쟁들로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소론과 노론 사이에 왕세자(경종)와 왕자(영 조)를 둘러싼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한편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가지 조치가 취해 졌는데, 먼저 대흥산성, 황룡산성 등 변경지역에 성을 쌓고 대대적인 도성 수리공사를 하였다. 특히 이유의 건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총체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효종시대 이후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설하고 5군영 체제를 확립하여 임진왜란 이후 계속 추진하던 군제 개편작업 을 끝마쳤다. 이밖에도 양역이정청을 설치하여 민폐의 첫번째 요인이던 양역 문제의 해결을 꾀하기도 했는데 그결과 군포 균역절목이 마련되어 이전에는 양전 1인의 군포 부담이 1필에서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던 것이 2필로 균일화 됨으로써 민간의 부담을 줄였다. 이즈음 국방과 관련하여 영토문제가 대두 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군이 설치 되었다. 폐쇄 되었던 폐사군지에 다시 2진을 설치하여 고토 회복운동을 벌였고 이결과 압록강 연변에 조선인의 출입이 잦아지게 되어 청나라 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측과 협상하여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 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 으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 지었다.
문화적 인 면에서 살펴보면 숙종시대는 정치적으로 명분 의리론이 크게 성행 하였기 때문에 명에 대한 은공을 갚는 다는 의미로 대보단이 세워지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복관 되었으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으로 올렸다. 뿐만 아니라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던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시켜 면희빈으로 하는등 왕권 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충역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00 여개의 서원사우가 건립되고 그중에 131 개소가 자연 폐쇄되는 서원 누수 현상이 나타 나기도 했다. 또 이시기에는 '선원계보' '대명례 집' '열조수교' 북관지' 등이 편찬 되었으며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 승람' '신 전자초방' 등이 간행되었다. 이리하여 조정은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붕당이 성립 되었다. 노, 소론에 속하는 사람들은 원래 예악의 태두 김장생의 문인들로 구성 되었고 한편 으로는 청의를 생명으로 하는 산림 사림들의 정치 집단이었던 산당에 속하였던 서인 들이다. 노론의 대표적 인물은 송시열, 김만기, 김만중, 김석주 김수항, 김수홍, 김익훈 등이었고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구만, 박세채, 박태보, 오도일, 윤증, 한태동 등이었다. 서인은 분파 이후 노론이 정권의 주도권을 쥐며 정국을 운영해 가다가 1689년 노, 소론이 함께 희빈 장씨 소생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 하다가 대거 숙청되어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 으로써 실각하게 된다(기사환 국). 이 때 노론의 송시열, 김수항 등이 유배당해 죽고 소론 인사들도 대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5년후 갑술옥사로 남인이 대거 쫓겨나자 서인의 소론이 정권을 앙악하게 된다. 하지만 희빈 장씨와 관련하여 1701년 무고의 옥이 일어 나면서 소론이 밀려나 고 노론이 대거 등용 되면서 노, 소론이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며 정국 을 운영해 나갔다. 그래서 경종, 영조 대에는 노, 소론의 당세가 정국을 양분하는 형국이 되었다. 경종 대에는 주로 소론이 우세한 양상 을 띠게 되는데 대표적인 4대신이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 이었다. 그리고 노론이 우세했던 영조 대의 4대신은 민진원, 이관명, 정호, 홍치중 등 이었다.
하지만 영조 대 중반에 집권당이던 노론은 장헌세자의 폐위와 사사 사건으로 벽파와 시파로 나누어진다. 벽파는 영조편에 서서 장헌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 무리였고 시파는 그의 불행한 죽음을 동정 하는 무리로 이루어 졌다. 이때 세력이 약했던 소론은 시파에 가담했다. 이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 졌는데, 영조 대에는 벽파가 우세 하였으나 정조 대에는 시파가 우세 했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뒤 벽파인 김한구의 딸 영조 계비 김씨가 섭정을 함에따라 다시 벽파가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순조1년(1801년)에 일어나는 신유사옥을 계기로 시파와 이에 동조했던 남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어 노론 독주시대가 전개된다.
기사환국 이후 같은해 5월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 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에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자 서인 오두인, 박태보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참혹한 형벌을 받고 파직 되었으며, 이후 조정은 남인에 의해 완전히 장악 되었다. 이사건 후 숙종은 민비를 폐비한 것을 후회 하였는데, 1694년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이를 눈치채고 폐비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남인의 영수 민암 등이 이 문제를 기화로 조정에 남아 있던 서인세력을 모두 제거 하려고 김춘택을 비롯 수십 명의 서인을 감옥에 가두는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숙종은 민비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던 중이라 오히려 서인들을 옥사로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한후 사사 시켰으며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 시키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환 등을 등용했다. 그리고 중전으로 올랐던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 시키고 폐위 되었던 민씨를 복위시켜 왕비에 앉혔는데 이사건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갑술옥사 이후 숙종은 사사 시켰던 송시열, 김수항 등을 복직 시켰고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날때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속에 폐비 민씨와 관련된 문구가 발견되어 논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일부 신하들은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 했으나 소론의 남구만, 윤지완 등은 세자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용서 하자고 하여 이 사건은 무마 되었다. 1701년 왕비로 복위되었던 민씨가 병으로 죽은뒤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것이 발각 되었다. 숙종은 이일에 관련된 희빈 장씨와 그녀의 오빠 장희재를 사사하고 궁인, 무녀 등도 함께 죽였다. 이사건 을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이로써 궁녀에서 후궁생활을 거쳐 왕비에 오르기까지 했던 희빈 장씨는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채 43세 를 일기로 생을 마감 하였다. 숙종은 그녀의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이후로는 빈이 후비로 승격하는 일을 법으로 금지해 버리기까지 했다. 희빈 장씨가 죽자 그녀를 지지하던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의 소론세력이 몰락하고 다시 노론이 득세 하게된다. 희빈 장씨의 소생 으로는 경종과 옹주 하나가 있다.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에 있다. http://boinp.netian.com 출처 |
▥ 조선왕조 제20대 경종 ▥
경종이 후사가 없는 이유
|
▥ 조선왕조 제21대 영조 ▥
|
▥ 조선왕조 제22대 정조 ▥
'세도'의 유래 홍국영의 몰락과 정조의 계책 규장각의 발전 또한 1781년 규장각 청사는 모든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도총부청사로 옮겨 졌으며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 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하여 보관 하도록 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각 학자들은 승직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저녁으로 왕을 문안 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 하기도 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 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우문지치(학문 중심의 정치)'와 '작성지 화(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라는 규장각의 2대 명문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 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 하고자 한것이다. 신해박해와 벽파의 기세 정조의 업적 정조 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 였다. 그러한 문예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 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 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조선후기는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룰수 있었다. 혜빈 홍씨
.
|
▥ 조선왕조 제23대 순조 ▥
천주교 탄압의 서곡
|
▥ 조선왕조 제24대 헌종 ▥
헌종대의 사회상황 헌종대 에는 17, 18세기부터 시작된 사회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로 농민층의 분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도시나 광산으로 흘러들어가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 빈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농층과 부상인들이 생겨 나면서 천민에서 양민으로, 양민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이 빈번해 졌는데 이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 조짐으로 나타났다. 또한 빈번하게 일어나는 수재와 전염병의 창궐로 민생이 악화 되었으며 삼정의 문란이 가중 되어 살던 곳을 버리고 유랑하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불어났다. 풍양조씨의 세도정치 풍양 조씨는 헌종의 모후 조대비의 일문으로서 조대비의 부친인 조만영이 그 거두이다. 조만영은 어영대장,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헌종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세도를 확립한다. 그 후 5, 6년 동안 풍양 조씨 일문이 현달 하더니 일문의 내부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김씨 일문으로 넘어간다. 헌종 대에 정권을 잡아 안동김씨를 견제한 풍양조씨 일문은 정치 혁신 대신에 안동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하여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도외시 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 시켰다. 그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물론이요 그로 인한 삼정의 문란을 초래했다. 이양선의 출몰과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문서 헌종 11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호가 제주도와 서해안을 불법 측량하고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자 조정은 청나라를 통해 광동에 있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또한 헌종 12년 6월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군함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들어와 왕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해서 한때 조정을 긴장 상태에 몰아넣기도 했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체포되어 사교를 퍼뜨리고 국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7 월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듬해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에 답신을 보내는데 이것이 우리나라가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문서가 되었다. 헌종 14년에는 이양선들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동요되는 등 국내외적인 위기가 조성 된다. 이때부터 조선은 이양선을 앞세운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화 개방 요구를 맞게 되는 등 본격적인 외세 대응기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나 주변 정세에 어두웠던 조정에서는 이 양선의 출몰이나 위협에 별다른 방책도 세우지 않은채 각각 권력의 장악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신정왕후 조씨 익종의 비 이며 헌종의 어머니로서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이다. 12세때 효명세자의 비로 책봉되어 세자빈이 되었고 효부라는 칭찬을 들었다. 1827 년 순조 27년에 헌종을 낳았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에 추존되자 왕대비에 봉해 졌는데 이때부터 풍양 조씨 일문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 하면서 세도를 이루게 된다. 1857년 순조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왕실의 권한을 쥐게 되었다 이때 조대비는 전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못마땅해 하던 흥선군 이하응, 조카 조성하와 손을 잡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1866년 2월까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제 정권은 모두 흥선대원군이 잡도록 하교하고 있었다. 그 후 조대비가 대거 기용한 친정 세력들이 잇따른 정변에 희생되어 조씨 가문이 쇠락해지자 그것을 슬퍼 하였으며 나라가 재난에 시달리자 자신이 죽지않는 것을 한탄 하였다고 한다. 1890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
▥ 조선왕조 제25대 철종 ▥
안동김씨 세력연장을 위 한 철종의 즉위 배경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럴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명 있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것이 원칙 이었다. 왜냐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때 항렬이 높은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법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동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 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안동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왕가의 법도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민진용의 옥 순조 말기부터 김유근과 김홍근에 의해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이루어 지다가 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나자 권력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틈을 이용하여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있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철종의 대민 노력 친정을 시작한 다음해인 1853년 봄에는 관서 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 전 5만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냥을 민간에 대여해 주도록 하였고 또 그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재물과 곡식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1천여 호의 민가에 은전과 약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으며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냥을 지급 하였다. 그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 지역에 내탕 금2천냥, 단목 2천근, 호초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등 빈민 구제에 성의를 다했다. 토지세에 대한 징수인 전정은 본래 토지1결당 전세 4두 내지 6두로 정해진 전세 보다도 부가세가 훨씬 많았다. 부가세의 종류만 해도 총 43종류에 달했는데 본래 그것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물게 되어 있었으나 전라, 경상 지방은 모두 땅을 빌려 농사짓고 있는 농민들이 물고 있었다. 또한 지방 아전들의 농간으로 빚어지는 허복, 방결, 도결 등이 겹쳐서 전정의 문란이 고질화 되었다. 한편 군정은 균역법의 실시로 군포 부담이 줄긴 하였으나 양반층의 증가와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는 양민의 증가로 말미암아 계속 가난한 농민에게만 부담이 집중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을의 형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군포를 부과하기 때문에 지방관은 그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나 어린 아이에게 부과하는황구첨정 등을 감행했다.
환곡은 본래 관에서 양민에게 이자없이 빌려주게 되어 있는 곡식인데 여기에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양곡의 양을 속여서 가을에 거두어 들일때 골탕을 먹이는 등의 수법을 사용해 농민 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관리들이 비일비재 했다. 이같은 일은 세도정권의 공공연한 매관매직을 통한 관기의 문란과 더불어 세도정권을 뒷받침 하고 있는 지방 토호세력의 횡포아래 빚어진 일이었다. 이런 삼정의 문란이 겹쳐 백성들이 부담해야 하는 결세가 높아져만 갔고 그것이 결국은 민란의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 진주민란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발생 계기는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에 있었다. 백낙신이 민란이 일어나기전 몇년동안 착취한 돈만도 약 5만냥에 달했는데 쌀로 환산하면 약 1만5천 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당시 진주목에서는 지금까지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포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것을 모두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 했는데 그 액수가 2만8천석에 축난 환곡만 해도 2만4천석이나 되어 농민 부담이 급격하게 가중될 처지에 있었다.
이에 농민 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진주성으로 쳐들어 갔는데 그수가 수만명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우병사 백낙신은 환곡과 도결의 폐단을 시정 할것을 약속했으나 농민들은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악질적인 아전 몇명을 죽이고 원한을 샀던 토호의 집을 불태웠다. 6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그동안 23개 면을 휩쓸었고 120여 호의 집이 파괴되고 재물 손실이 10만냥을 넘었다. 단성을 시작으로 진주에서 폭발한 이 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5도와 경기도 광주에서 무려 37차에 걸쳐 일어난다.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악정에 대항하여 민란에 참가했다. 동학의 탄생 동학은 1860년(철종11년)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서 그 교지가 시천주 신앙에 기초하면서도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라 할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교주 최제우가 서교인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 손병희에 의해서 천도교로 개칭 되었다. 창도 당시 동학은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서민이 내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수 있다는 나라 구제 신앙 이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에 가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 같이 한다'는 사인여천의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산천초목에 한울님이 내재한다고 보는 범천론적 사상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또한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 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교지로 선포 하였다. 동학의 초대교주 최제우 최제우는 1824년 순조 24년에 경주 최씨 옥의 서자로 태어났다. 몰락 양반가문 출신인 그는 젊은시절에 의술, 복술등 여러 방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세상의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1856년 천성산에서 부터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 1859년 구미산 용담정 수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기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 말세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 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가 본래 이름인 제선을 제우로 고친 것도 종교적으로 구국과 제세의 길을 찾겠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그는 득도 체험을 하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제 하였다. 그로부터 1년간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하고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어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포교하기 시작 하였다. 특히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모여 들었는데 동학이 가지고 있는 민간신앙적 성격이 신앙적 결집을 촉진 하였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유교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 하였다. 그는 서민들이 수학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수 있으며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수 있다고 하여 서민이 군자의 인격을 갖추는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동학의 교지인 '시천주' 사상을 통해 각 개인이 천주를 모시는 인격적 존재이자 각자 자기 안에 천주를 모신 주체임을 강조 하였다. 이와같은 동학사상은 후에 일어날 동학 농민혁명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이거니와 인간 관계가 상하 주종의 지배, 복종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다같이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평등한 관계임을 가르침 으로써 근대적 사상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편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 시킨다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1862년 9월 교조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 시킨다는 이류로 경주 진영에서 체포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백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 되는데 이사건이 곧 동학의 정당성 입증으로 받아 들여져 그후 교세가 더욱 커졌다. 신도가 늘자 그 해 12월에 각지에 접을 두고 그 지역의 접주가 지역 신도를 이끌게 하는 접주제를 두어 1863년에는 교인 3천여명, 13개 접소를 확보 하였다. 이해 8월에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제2대 교주로 삼았다. 당시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었던 최제우가 미리 후계자를 세워놓은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최제우를 다시 잡아들일 것을 명하니 그해 11월 20일 최제우는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경주에서 체포 되었다. 최제우가 한양으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해 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한번 일어난 동학의 불길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더욱 그사상적 기반을 다지면서 조선말기의 국내외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민족종교로 발돋움 한다. 철인왕후 김씨 철종 대에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던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이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근친인 그녀는 1851년 열 다섯의 나이에 왕비에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온다. 1858년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왕비 김씨는 탐욕스러운 그의 아버지 김문근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즐거움이나 성냄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는 등 부덕이 높은 것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1863년 철종이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자 명순의 존호를 받고 이듬해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66년 휘성에 이어 정원, 1873년에 다시 수령의 존호를 받아 명순휘성정원수령 대비가 되었다. 1878년 42세의 나이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죽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사삼릉의 예릉이다.
|
▥ 조선왕조 제26대 고종 ▥
고종이 왕위에 오른 배경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 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같은 권력구도를 깨트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 시키기 위한 이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김씨 가문을 찾아 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 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대원군의 정책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다. 이 밖에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명잡세를 없애고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 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 하도록 했다. 한편 '대전회통', '육전조례', '양전편고' 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 시켰다. 대원군의 실정 우선 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는 것도 모자라서 소유자의 허락 없이 전국에서 거석과 거목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도들에 대한 지나친 박해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병인박해 그는 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해온 이이제이(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의 논리에 흥미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이때문에 도리어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게 되자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 동안 8천여 명의 신자들을 학살 하였다.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 혹은 '병인사옥'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병인양요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1866년 10월 군함 7척에 총병력 1천 명을 승선시키고 강화도를 점령 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강화도 수복계획을 구상하고 그들을 공격 했지만 화력이 밀려 실패 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 양헌수의 전략으로 정족산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셔먼호 사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통상을 요구 하다가 평양군민의 화공으로 불타버린 사건 신미양요 미국은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탐문 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먼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동시에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번에 걸쳐 조선 원정 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1871년 5월 조선 원정을 결행하기로 하고 군함 5척, 병력 1천 2백여명, 함포 85문 등으로 무장하고 강화도 해협으로 침입해왔다. 미국 군함이 강화도로 접근해 오자 조선군은 그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이것이 이른 바 '손돌목 포격 사건 '으로 조. 미간의 최초의 충돌 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보복 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조선의 거부로 평화협정이 결렬되자 그들은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해 강화도 초지진에 무혈 입성 하였다. 이후 조선 수비병은 광성보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였고 강화도는 완전히 미군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에 밀려 결국 점거 1달여 만에 강화도에서 물러갔다. 일본과의 수교 신미양요 이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한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 남으로써 점차 대외개방에 대한 여론이 높아가자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침입해오자 조선군은 영토에 대한 불법침입을 이유로 발포한다. 일본은 이 조선군의 발포를 빌미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영종도에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군은 군사를 동원해 그들과 일전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한동안 영종도를 점거하고 있다가 조선의 감정이 악화되자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조선 영해에 계속해서 군함을 진주시켜 무력 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했고 마침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 일 수호협약이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 되었다. 개혁파와 위정척사파와의 격돌로 인한 자주권 손실 1882년 구식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소속됐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 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 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 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 했다가 청군에의해 밀려 남으로써 왕권이 크게 실추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을미사변의 발생 당시 일본은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고 조선조정은 이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 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 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대한제국의 탄생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일본 군대와 친일세력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은밀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1896년 2월 러시아 영사관으로 몸을 옮긴다. 고종은 여기에서 친러 정권을 수립하여 친일 내각의 요인들을 역적으로 규정지으며 단죄 하였고 갑오경장때 실시된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친러 내각이 집권하면서 열강에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권익을 잃어 국권의 침해가 극심해 진다.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 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여론에 밀려 고종은 1897년 2월 아관으로 떠난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계속되는 고종의 위기와 을사보호조약 1898년 7월 안경수가 현역, 퇴역 군인들을 매수하여 황제 양위를 계획 하다가 실패 하였고 또 9월에는 유배되어 있던 김홍륙이 차에 독을 타는 사건이 발생하는등 고종을 위협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또한 그무렵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만들어져 맹렬하게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들을 진압하였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간 에 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이 다시 황제 폐립 음모사건을 일으켰고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제1차 한. 일 협약을 강요했 으며 1905년에는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고종의 퇴위와 헤이그 밀 사사건 고종은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 당하자 대한제국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특사로 내정된 사람은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감사 이준 이었다. 이들을 특사로 파견한 고종은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이들 특사 활동을 지원해 줄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밀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사건 으로 이완용, 송병준등 친일세력과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이해 7월 20일 퇴위하게 된다.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 고종에 이어 순종이 즉위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고종이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미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보호조약이 이루어 졌고 또한 그가 일본의 강권에 의해 퇴위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경술국치를 보았고 다시 9년을 더살며 일본의 식민통치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망국의 상황 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조선의 멸망 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백년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 사건들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영왕 고종의 넷째 아들이며 귀인 엄씨 소생으로 순종의 이복 동생이다. 1897년에 태어났으며 1900년 8월에 영왕에 봉해 졌고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 되었으며 이해 12월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어 순종이 폐위되자 왕세제로 격하 되었다. 1920년 4월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의 맏딸인 마사코와 정략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 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리었으나 일본에 머문채 귀국하지 못했다. 일본에 강제 체류하는 동안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육군사관하교,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어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국교 단절 및 국내 정치의 벽에 부딪쳐 귀국이 좌절 되었다. 한편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황족의 특권이 상실되고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하여 1963년까지 일본에서 보냈다.
그 후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부인 이방자와 함께 귀국 하였 다. 귀국 당시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도 1966년 오랫동안 수권하던 심신장애자 재활원인 자행회,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빌린 신체장애자 훈련원 명휘원을 설립하여 운영 하였다. 하지만 지병으로 1970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후 부인 이방자는 영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 교육시설인 자혜학교, 1982년 신체장애자 교육시설인 명혜학교 등을 설립하며 그의 유업을 계승 하였다. 그는 부인 이방자 여사에게서 진과 구, 두아들을 얻었으며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 구는 현재 생존해 있다. 능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있으며 1989 년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http://boinp.netian.com/26_01.html 출처 |
▥ 조선왕조 제27대 순종 ▥
http://boinp.netian.com 출처 |
<출처;tong.nate.com.gangsan1950>
'시사 ,교양,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지보다 더 오래된 금속활자가 발견됐다고? (0) | 2011.02.07 |
---|---|
조선시대 감영의 옛 주인들은 가고 없네 (0) | 2011.02.07 |
물고기 백과사전 (0) | 2011.01.31 |
한국과 세계의 간단한 역사년표 (0) | 2011.01.31 |
194개국 국기 수도 인구 등 (0) | 2011.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