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으로서의 삶
세자의 즉위는 주상의 사망이 전제된다.
조선시대의 장례풍습은 3년상이었다.
그러나 후계왕은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주상이 사망한 6일 후인 성복일에 즉위식을 올렸다.
성복이란 상복을 정식으로 입는 것이다.
성복 이전에는 혹시 죽은 자가 소생할까 기대하지만 이후에는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일반인은 3일 만에 성복을 했지만 왕의 경우에는 그 배인 6일만에 했다.
세자는 즉위 이후에도 졸곡(卒哭) 이전인 26일간은 업무를 보지 않는다.
상왕은 상주로서 치상에 전념한다.
이 기간에 국정은 원상으로 임명된 두세 명의 원로대신들이 처리한다.
이들은 주야로 승정원에 숙직하면서 왕을 대신하여 국가의 대소사를 처결한다.
세자는 공제(26일)동안 치상에 전념한다. 신왕은 전왕의 빈소 곁에 여막을 차리고 주야로 곡을 한다.
1. 즉위식
조선시대 왕의 즉위식은 개벽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왕이 죽고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왕을 임명하는 권한은 형식적으로 대비에 귀속된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왕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죽었을 때에 대비나 왕대비가 후계왕을 지명했다.
왕이 돌아가시면 옥새는 대비가 보관한다. 세자가 왕으로 즉위할 때 대비는 옥새를 전해주고 ,
아울러 세자를 왕으로 임명한다는 명령서를 내린다.
후계왕이 지명권 및 임명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즉위식은 대궐의 중심공간인 정전에서 시행한다.
정전은 널찍한 뜨락과 터를 높인 당, 그 위의 단에 설치한 용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뜨락에서 용상으로 가는 통로는 계단인데, 왼쪽과 오른쪽의 두 개가 있다.
왼쪽의 계단은 좌계라 하는데 손님이 사용하고, 오른쪽 계단은 주인이 사용하며 보통 조계라 한다.
즉위식은 세자가 왕의 상징인 옥새를 받고 용상에 올라가 앉을 때까지의 의식 절차다.
옥새는 전왕의 시신을 모신 빈전에서 받는다. 만약 전왕의 유언장이 있을 경우 신왕은 이것을 받아
영의정에게 전해주고 옥새도 받아서 좌의정에게 전해준다.
정전에서 행하는 즉위식에서 용상으로 올라갈 때는 오른쪽 계단을 이용한다.
즉위란 왕이 앉는 장소인 용상으로 올라간다는 의미가 있다.
즉위때에 오른쪽 계단을 이용하기 때문에 즉조라고도 한다. 즉위나 즉조는 같은 말이다.
왕이 용상에 정좌하는 순간 즉위식장을 가득 메운 대소신료들은 천세를 외친다.
천세는 왕조의 운명이 천년 만년 영원하라는 의미다.
천자의 나라는 만세를 외쳤지만,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에서는 천세를 외쳤던 것이다.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에서는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등의 국가대사는 중국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다.
중국에 승인을 요청하는 주체도 대비다.
왕이 바뀌면 대비는 전왕의 사망시실을 알리는 고부사, 전왕의 시호를 요청하는 청시사 및 새로운 왕의 승인을 요구하는 청승습사를 파견한다.
보통 이 세가지는 한몫에 파견되기 때문에 실록 등에서는 고부청시청승습사라는 사신명으로 나타난다.
중국은 의레 전왕의 시호와 함께 신왕을 임명하는 고명장 및 곤룡포 등을 보내온다.
2. 왕의 일년 일정
조선시대 왕의 일상생활은 일년을 주기로 반복되었다.
그것은 농업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생활형태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왕의 일년 일정에는 농부들의 농사력에 맞추어 농업을 장려하는 행사가 적지 않게 들어 있다.
왕의 일년 일정은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된다.
정월 초하루는 새해가 시작되는 의미 깊은 날이다.
이날 왕은 조선 팔도와 사도의 농민 및 관리들에게 새해에도 농업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글을 반포한다.
이 글을 보통 권농윤음이라고 했다.
또 북경에 있는 중국 천자를 향해 새해인사를 해야 한다. 이미 정조사를 보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조정의 신료들을 모아놓고 천자가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린다. 망궐례라 한다.
망궐례 이후에는 조상신들과 공자에게 인사하기 위해 종묘와 성균관에 행차한다.
그리고 새해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오는 종친들과 신료들을 만나야 한다.
▷봄
왕은 농민에게 농사의 모범을 보인다는 의미에서 친경례를 행한다.
이 의식은 말 그대로 왕이 직접 밭을 가는 의식이다. 친경은 선농단에서 왕이 친히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드린다.
숙종이후에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고자 대뤌안에 횡단을 설치했다.
이 단에다 명나라의 태조. 신종, 의종을 배향하고 춘삼월에 직접 제사를 드렸다.
▷여름
여름에는 가뭄과 홍수로 농사를 망친다. 조선시대에는 여름철의 가뭄과 홍수를 구제하기 위해 국가에서 수많은 제사를 행했다.
하지가 지나고도 비가 오지 않으며 큰 가뭄으로 간주하여 대대적으로 기우제를 지냈다.
이 때 비가 올 때까지 이틀에 걸쳐 한 번씩 장소를 바꾸어 시행한다.
*기우제
1차 기우제는 삼각산과 남산 그리고 한강에서 지낸다.
이틀이 지나도 비가 외지 않으면 용산강과 저자도에서 2차 기우제를 지낸다.
그래도 비가 안오면 3차는 남단과 우사단에서
4차는 북교
5차 종묘
12차에 이를 때까지 지낸다.
*기청제
홍수가 나면 기청제를 지낸다.
*보사제
기우제나 기청제의 결과 하늘의 감응이 있으면 보사제를 지내 감사를 표시한다.
▷가을
왕도 봄에 친경을 하고 심은 농산물을 직접 수확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이를 친예례라 힜다. 왕이 직접 낫을 들고 수확을 하는 것이다.
가을은 조락의 계절이다. 왕은 죽음이 내리는 가을에 맞추어 집행을 미루던 사형수들에게 형집행을 명령한다.
▷겨울
준비의 계절이다. 이때 왕은 도로를 수리하고 성벽을 증축하는 등 토목공사를 명한다.
*기설제
겨울에 내려야 할 눈이 오지 않으면 기설제를 지낸다.
3. 왕의 여가생활
▷조선초기
왕들의 여가활동은 활동적이었다.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의 경우 틈만 나면 매사냥을 즐겼다. 비난이 일어나 점차 줄어들었다.
왕은 종친들과 즐긴 놀이로 격구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격구는 왕실 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까지 유행하던 놀이었다. 말을 타고 한다.
▷주색
전통시대 남성들의 대표적인 여가생활이라 할 수 있다.
온천욕도 빼놓을 수 없는 여가생활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왕들은 잔병을 치루는 경우가 많았다.
*온양온천
현종의 경우 누병과 피부병으로 평생을 고생했다. 온양온천에 행차하여 한 달 정도 목욕을 하고 나서 증세가 호전되었다. 여기에 재미 붙인 현종은 기회만 닿으면 온천욕을 하곤 했다.
조선시대 왕이 대궐 밖으로 한 번 행차하는데는 호위병과 수행관료을 포함해 5,000명 안팎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했다.
▷취미
취미가 고상하여 미술이나 음악 등의 예술을 즐기는 왕도 있었고, 기화요초를 모아놓고 이를 낙으로 삼는 왕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미술이나 음악 또는 수집활동 등에 빠지는 것을 말기라고 하여 경계했다.
유학자가 권한은 왕의 여가생활이 있었다.
독서와 명상, 저술활동, 투호와 격구등이 그것이다.
연산군의 경우는 시를 많이 남겼다.
영조는 글씨와 시, 단문, 산문 등을 통틀어 수천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영조부터 순종까지는 왕들도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문집을 남기고 있다.
조선시대에 투호는 왕실에서 뿐만 아니라 양반가에서도 유행하던 상류층의 놀이었다.
투호는 왕이 여가가 날 때 비빈들이나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대궐 정원에서 즐길 수 있는 놀이었다.
4. 왕의 가정생활
▷식사
식사 때도 각각 따로 먹는다. 대비는 대비전에서, 왕도 자신의 처소에서, 왕비는 중전에서, 그리고 세자는 동궁에서 각각 식사한다.
왕의 가족은 철저하게 분해되어 있다. 왕 하나를 절대권력자로 유지하기 위해 비빈과 자식들은 완전히 희생된다. 자식들은 적서에 따라 대군과 군, 공주와 옹주로 해체된다.
왕의 비빈들은 왕비. 빈. 귀인. 소의. 숙의 하는 식으로 서열화 되어 있다.
왕이 아버지로서 자식들에게 하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러나 자신이 어여삐 여기는 비빈이나 자식에게는 남다른 정을 보이기도 한다. 애정의 표시로 많은 토지나 노비를 내려주기도 하고, 자신이 아끼던 물건을 선물로 주기도 한다. 직접 자식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쓰는 경우도 있따. 특히 세자나 세손이 어릴 경우 직접 불러다가 공부도 가르치고 이것저것 선물도 준다. 가끔씩 신료들에게 자기 자식 자랑도 한다.
▷부부생활
왕과 왕비간의 부부생활은 형식적인 경우가 많았다. 왕이 성년이 된 후에 연정을 느끼게 되는 대상에는 후궁이 많았다.
조선시대 태종은 29명이나 자녀를 두었고 성종은 28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단종, 인종, 경종, 순종 등은 자식을 1명도 두지 못하였다.
5. 상왕
조선시대에는 다섯 명의 상왕이 존재했다.
태조. 정종. 태종, 그리고 단종과 고종이 그들이다.
조선시대에도 상왕이 존재할 때는 극도의 혼란기라고 할 수 있다.
태조와 정종은 태종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추대되었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고종은 일제에 의해 상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들은 예외없이 자신의 왕권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강자에 의해 상왕이 되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태종은 자신이 죽기 4년전에 자발적으로 세종에게 전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이 존재하면 가장 고단한 사람들은 신료들이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상왕으로 밀려난 본인도 처신이 여간 어렵지 않다. 정치적 발언을 삼가고 은인자중해도 혹시나 하는 혐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왕이 세 명 있을 때도 있었다. 태조와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나 있었던 태종때와 세종 초에 정종과 태종이 상왕으로 있었을 때였다. 이런 때는 태상왕, 상왕, 주상(현왕)이렇게 구별했다.
6. 왕의 죽음
왕의 임종이 가까워오면 대궐과 수도의 군사들에게 특별경계령이 내려진다.
특히 궁성 밖은 병사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왕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전임대신과 현임대신들이 대궐로 들어온다.
세자는 왕이 병석에 눕는 순간부터 동궁을 떠나와 왕을 모신다. 또한 혼인과 함께 대궐을 떠났던 자녀들도 모두 입궐한다.
조선시대 왕의 임종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여인의 손에서 최후를 맞이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왕의 마지막 유언이 갖는 중요성 때문이었다.
만약 후궁의 거처에서 숨을 거두고 그 후궁이 유언을 날조하면 무슨일이 일어 날지 모른다. 그러므로 왕이 사랑하는 비빈의 처소에서 병을 치료받다가도 숨이 끊어질 징조가 보이면 신료들은 왕을 얼른 외전으로 모시고 나간다.
▷임종 장소
왕이 임종할 장소에는 포장을 치고 뒤에 도끼가 그려진 붉은 비단 바탕의 병풍을 놓는다. 왕의 임종을 지키는 사람들은 왕세자와 대신들이다. 유언을 듣기 위해서다. 왕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에 앞서 왕세자와 대신들에게 유언을 한다.
▷사망 절차
촉광례라 했다. 부드러운 솜을 왕의 코에다 대고 숨이 끊어졌는지의 여부를 확인한다. 조금의 숨이라도 붙어 있으면 솜이 움직여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사망 확인
사망이 확인되면 '상대점'3자를 써서 발표하는데 왕이 돌아가셨다는 공고였다. 동시에 사망시간, 사망장소 등도 발표한다. 왕의 죽음이 발표되는 순간 대궐과 조선 팔도는 울음과 슬픔 속에 빠져들게 된다.
▷복
유교식 장례법에는 사람이 죽었을 때 행하는 '복'이라는 의식이 있다.
죽은 사람이 생전에 입고 있던 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복'을 세 번 외치는 의식이다. 복이란 돌아오라는 뜻이다. 죽은 자의 혼령을 불러들이고자 하는 초혼의식이라 하겠다.
복은 내시가 담당한다. 복을 행하는 장소는 보통 왕이 살았을 때 집무를 보던 대궐 지붕이다.
▷3도감
왕의 죽음과 함께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의 세 도감이 설치된다. 책임자로는 조정대신이 임명된다.
1.빈전도감- 왕의 시신을 임시안치한 빈소의 제사와 호위 등을 담당
2.국장도감-왕의 장례에 관련된 업무를 관장
3.산릉도감- 왕릉축조
◈ 시호와 묘호. 존호. 능호
조선시대의 왕은 사후에 자신이 살았던 일생을 평가받는다. 시호와 묘호다.
1.시호- 살았을 때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는 칭호다. 왕이 살아 생전에 행했던 좋은 언행을 추억하면서 신료들은 그에 적당한 시호를 찾는다.
왕의 시호는 중국에서 정한다. 조선에서 시호 세 가지를 선택해 중국으로 보내면 황제가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결정해준다.
왕의 사후 그의 일생을 평가하고 ,공덕을 기리기 위해 중국에서 두 글자의 시호를 받고 그리고 미진한 경우에는 신료들이 네글자의 시호를 더 올리는 경우도 많았다.
왕이 사망하고 중국에서 시호를 결정해줄 때까지는 대행대왕이라고 부른다. 태조 이성계를 강헌대왕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강헌이 바로 명나라에서 정해준 시호이다. 강은 온화하고 선량하며 낙을 좋아한다는 의미이고, 헌은 총명하고 예지가 있다는 뜻이다. 태조 이성계의 일생을 중국황제가 그렇게 평가한 것이라 하겠다.
2.묘호-신료들은 시호와 함께 왕의 일생을 평가하여 묘호를 정한다.
묘호는 종묘에서 부르는 호칭이라는 의미다. 태조. 정종. 태종. 세종 하는 등의 칭호가 묘호다.
왕의 삼년상이 끝나고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면 종묘에서 그 신주를 부르는 호칭.
3.존호-신료들이 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하여 존호를 올린다.예컨데 임란을 극복한
선조에게 至誠大義格天熙運이라는 존호를 올림
4.능호-왕의 무덤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세종의 능호는 영릉(英陵)이다.
◈ 조와 종
묘호의 뒤에는 조와 종이 붙는다. 보통 조는 공이 탁월한 왕에게 붙인다. 그러므로 창업군주와 그에 버금가는 중흥군주에게 조가 붙는다. 대체로 피바람을 많이 일으킨 왕들이 조가 된다고 하겠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등이 그에 해당한다.
덕이 출중한 왕에게는 종을 붙인다. 조와 종은 후세에 붙인다.
선조의 경우, 처음의 묘호는 선종이었다. 공보다는 덕이 앞선다고 평가한다는 것이다.나중에 허균, 이이첨이 주장하여 이를 선조로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커다란 공이 있다는 것이다.
인조- 광해군을 몰아내서 조가 붙었다.
3년상이 끝나면 왕의 신주는 종묘로 들어온다. 몸은 비록 죽고 없어지지만 조상신이 되어 영원히 후손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 묘정배향신
왕의 신주를 모실 때는 묘정배향신을 선정한다. 왕이 살아 있을 때 왕을 가장 잘 보필한 신하 서너 명을 선발하여 종묘에 같이 모시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묘정에는 이지란, 이화, 조준, 조인옥 등이 배향되었다.
종묘배향신에 선발되면 자신은 물론 그 후손들에게도 커다란 영광이되 는 것으로 여겨졌다. 동시에 국가로부터는 갖가지 혜택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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