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교양,역사

도화원과 도화서

문성식 2011. 1. 30. 13:18

도화원과 도화서 모두 그림그리는 화가들을 양성하는 국가 기관입니다.

 

조선시대 화원이란 궁중작화기관인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궁중화가이며 동시에 직업화가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때로는 넓은 의미에서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사화원(私畵員)이나 지방 관청을 중심으로 일했던 방외화사(方外畵師)를 포함한 모든 직업화가들을 통칭하기도 한다. 그림의 가치를 공리적이고 효용적인 측면에 두었던 유교국가의 왕과 관료들은 국가의 원활한 운영과 감계적(鑑戒的)인 목적을 위한 그림의 수요에 대비하여 도화서를 두고 사실적이고 정세한 묘사력을 갖춘 화원을 양성하였다.

 

화원들은 국가와 왕실에 관련되는 모든 회화 업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사대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요구에 수응하였으며 개인적인 회화적 성취를 위해서도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전체적인 화단의 경향과 흐름에서 볼 때, 도화서의 화원은 여기적으로 그림을 애호하는 문인사대부들과 더불어 조선시대 화단을 이끌어 나간 두 축을 형성하였다. 화원들은 주로 실용화와 기록화를 전담하였으며 일반 감상화에서도 문인사대부들이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새로운 화풍을 정착·발전시키고 일가를 이루는 등 한국적 회화미 창출에 기여하였다.

 

도화서는 예조에 소속된 종6품 아문으로서 중부 견평방(堅平坊), 즉 지금의 한국일보사 사옥이 있는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경복궁 및 창덕궁과 가까워서 제작된 그림을 언제든지 신속하게 조달하는 등 궁중의 수요에 쉽게 대처할 수 있는 거리였다.

 

도화서는 원래 국초에는 종5품에서 거관하도록 된 도화원이었으며 화원의 정원은 40명이었다. 그런데 성종대에 종6품 아문으로 격하되면서 이름이 도화서로 바뀐 것이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직제를 살펴보면, 제조 1명과 별제 2명을 회화를 잘 아는 사대부로 임명하여 화원의 관리를 책임지게 하였는데 제조는 예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아래에 실제로 회사(繪事)를 담당하는 화원 20명이 있었다. 이와 함께 도화서에는 화원이 되기 위해 훈련과정에 있는 15명의 화학생도(畵學生徒)가 소속되어 있었다.

 

도화서의 조직과 구성은 영조대 《속대전》과 정조대 《대전통편》이 편찬될 때 시의를 반영한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기본 골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영조대에는 생도의 수가 3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정조대에는 화원이 총 30명으로 늘어난 정도였다. 화원 수가 늘어난 것은 조선 후기가 되어 이전보다 회화 수요가 궁중 안팎에서 모두 증가하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화원 시험 과목은 대나무, 산수, 인물과 영모, 화초

 

화원은 도화서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각 관청에 관할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한두 명씩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 조선 후기에는 특별한 업무를 맡기기 위해 임시로 대기시키는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이라는 것이 있었다.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숙종 년간에도 이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며 영조 년간에도 경모궁 등에 배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차비대령화원의 운영은 정조 7년(1783)에 규장각을 중심으로 절목을 갖추어 제도화되었으며 이후 활발하게 시행되었다. 이들은 도화서 화원 중에서 엄격한 시험을 통해 선발된 자들로 구성되었는데 관직과 녹봉, 근무 조건에서 일반 화원과 다른 특별대우를 받았으므로 일반 화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화원들간의 경쟁 또한 치열했다. 이 점은 국가행사를 위한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에서 일한 뒤에 그 공로로 상전을 매길 때 몇몇 화원들은 차비대령화원으로 승격되는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들은 원래 규장각 소관의 서책과 어제를 인찰(印札)하는 일을 전담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으나 국가의 주요 회사가 있으면 우선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예컨대 1795년 정조의 화성 능행을 기념한 〈화성능행도〉 제작에 김홍도가 관여하였고, 당시 차비대령화원이었던 최득현(崔得賢)·김득신(金得臣)·윤석근(尹碩根)·이명규(李命奎)·이인문(李寅文)·허식(許寔) 등이 실질적인 제작자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도화서 화원의 선발은 시취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시험 과목은 대나무, 산수, 인물과 영모, 화초 등 네 과목 중에 두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화학생도를 거쳐 화원이 되는 시기는 대개 10대 후반을 전후한 시기였으며 아무리 늦어도 20세 이전에는 도화서에 입문하여 필력과 묘사력을 연마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하종(金夏宗, 1793∼?)이 13세가 되는 해에 책례도감(冊禮都監)에 차출되어 의장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던 것처럼 10대 전반에 이미 국가의 공적인 행사에 선발된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화원의 사회적 지위는 비교적 낮았다. 화원은 잡과가 아닌 시취를 통해 선발되었듯이 의원·역관·산관·율관 등 기술직 중인보다 낮게 취급되었으며, 공장(工匠)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국가 행사에 동원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배급되는 요미(料米)나 포상을 보아도 공장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공장 중에서는 사자관(寫字官)과 함께 화원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가장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원은 도화서에서 규정된 것 이외에 공식적으로 포상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가장 빠른 길은 어진 모사에 발탁되는 것이었으며, 가례·책봉·국장·산릉 조성·상존호·궁중예연 등을 주관하는 도감에 선발되는 경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이런 경우 화원은 대개 국체를 상징하거나 왕과 왕족이 사용할 물건을 제조하는 일 등 한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심중한 일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으므로 그 중요도에 따라 상전의 명단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날마다 배급되는 식료 외에 쌀과 목면을 하사받는 경우, 품계가 올라가는 경우, 실직을 제수받는 경우 등이 있었다.

 

화원은 대개 부사용(종9품)· 사용(정9품)· 부사과(종6품)· 찰방(종6품)· 주부(종6품)· 현감(종6품)의 품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종6품의 한계 품직에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의 안견(安堅)은 정4품 호군이 되었으며, 인물화로 안견과 쌍벽을 이룬 최경(崔涇)의 경우는 당상관으로 승직되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서화를 애호한 왕의 총애를 받거나 국가에 큰 공로를 세웠을 경우 법전의 규정을 무시한 서용이 있었지만 이는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조선 후기가 되면 그러한 예외는 점점 늘어났다.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면, 김득신(개성 김씨)· 이인문·이성린 등은 종3품 첨사에 제수되었으며, 허담(양천 허씨)은 종2품에, 장준량(인동 장씨)·김화종(개성 김씨)·김순종(개성 김씨)은 정2품의 품계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조선 말기의 백은배(임천 백씨)는 종1품의 품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해이해진 신분제도상의 관품 제한이 이전만큼 엄격하게 유지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화원의 신분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 향상되었음을 의미한다.

 

화원은 일종의 기술직인 만큼 부모의 자질을 이어받아 화업을 대대로 세습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의원이나 역관·사자관이 가문을 형성한 것처럼 유난히 화원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 생겨나게 되었다. 화원 가문의 형성은 16세기부터 서서히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18세기에 가장 왕성하였다. 17세기 중엽에는 백천 조씨, 강릉 함씨, 청주 한씨, 신평 한씨 집안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특히 인동 장씨, 양천 허씨 같은 경우는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말까지 각각 30명에 가까운 화원을 배출하여 인적인 규모로는 조선시대 최고의 화원 집안으로 이름을 떨쳤다. 18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궁중행사도로서 이번에 용인 호암미술관의 전시에도 출품된 〈기사계첩〉의 제작 화원 다섯 명 가운데 허숙(許澁)과 장득만(張得萬)이 양천 허씨와 인동 장씨 출신인 것이다.

 

18세기가 되면 김두량(金斗樑)·김덕성(金德成) 등을 길러낸 경주 김씨가 부상하여 19세기 중반까지 14명의 화원을 배출하며 꾸준히 맥을 이어나갔고,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18세기 중엽에는 또 다른 경주 김씨 집안이 눈길을 끌기 시작하였다. 바로 김응환(金應煥)과 동생 응리(應履)를 시작으로 김석신(金碩臣)·득신(得臣)·양신(良臣) 형제를 길러낸 집안이다. 이러한 양상은 20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어 임천 백씨는 조선시대 마지막을 장식한 주요 화원 집안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또 비슷한 처지의 화원 집안과 혼인을 통해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활동의 범위를 넓혔고 가문의 힘을 길러갔다. 문벌이나 집안 배경을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 가문의 인맥은 화원의 활동에 매우 중요한 요건이 되었으며, 도화서에 천거되거나 시취를 볼 때, 국가 회사에 차출될 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위의 종6품 이상으로 품계를 올린 몇몇 화원의 명단에서도 짐작되듯이 포상의 내용을 결정할 때도 집안의 배경은 가산점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궁중화가로서 국가와 왕실에 봉사하는 화원의 임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광범위했으며 일의 경중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어진 모사라는 중차대한 일부터 각종 지도나 형세도, 궁궐도와 관아도, 일월오봉병·모란도병·십장생도병·영모도병 같은 궁궐 내부를 장식하는 각종 병풍과 가리개, 교화를 목적으로 한 감계도와 고사도, 각종 의궤(儀軌)의 그림, 오륜행실도 같은 도서의 삽화 등을 그리는 일, 세화 같은 길상도를 그리는 일, 분원에 파견되어 도자기에 문양을 넣는 일, 그리고 필요한 경우 왕에게 올릴 보고서나 문서에 도식을 그리는 간단한 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일이 있었다. 또 카메라가 없던 시절에 중국에 파견되는 연행사나 일본에 가는 통신사 사절단을 수행하여 여러 회사에 대비하는 일도 수행하였다.

 

직업화가 화원은 채색 다루는 모든 일을 담당

 

이 모든 일의 공통점은 일의 난이도를 떠나 채색을 사용하여 작업한다는 점이다. 채색 원료의 실용성 판단, 제조법의 습득을 포함하여 채색을 다루는 일은 모두 화원의 고유 업무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어제(御製)나 어람용 서책의 횡간을 당주홍으로 일일이 수작업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화원의 임무였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관료사회에서는 국가의 행사가 끝난 다음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료들끼리 모여 기념화를 만드는 풍조가 널리 성행하였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그림이 궁중의 행사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각종 궁중행사도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이러한 그림도 관청이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되고 행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으레 행하는 순서로 운영되었지만, 처음에는 관료들이 결성한 계회의 기념화로 출발했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기사계첩〉 〈경현당갱재첩〉 〈준천계첩〉 〈영조병술진연도병〉 〈화성능행도병〉 〈순조기축진찬도병〉 등이 모두 이러한 예에 속한다. 궁중행사도는 관청 보관용 혹은 궁중 내입용을 포함하여 관료들이 나누어 가졌으므로 여러 벌이 제작되었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인 만큼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여러 화원이 공동 작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화원은 국가와 왕실의 회사에 동원될 때 일정한 격식과 규범을 따라야 했으므로 개성적인 작풍을 발휘하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화원들이 정해진 예법에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직업화가로서 사대부들의 개인적인 주문에 수응하여 작품을 할 때였다. <호조낭관계회도> <선전관계회도> <사옹원계회도> 같이 관청의 계회도를 그리는 일을 비롯하여 아집도와 각종 연회도처럼 문인사대부들의 개인적인 모임을 기록한 기념화를 그리는 일이 많았다. 또 사대부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 화원은 일정한 대가를 지불받고 응했던 것이다.

 

또 왕을 모시고 국가의 행사에 참여하여 궁중행사도를 제작하는 일에 익숙해 있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집안에 기억할 만한 경사스런 일들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도 화원에게 시켰다. 사대부들은 경수연도(慶壽宴圖)· 연시도(筵諡圖)· 사궤장도· 연행도 (燕行圖)· 회혼례도 (回婚禮圖)· 평생도 (平生圖) 같은 그림을 화원에게 주문하였고, 완성된 그림들은 후손에 의해 조상의 행적이 담긴 그림으로서 소중하게 전승되었다.

 

조선 최고의 화원 김홍도의 진면목

 

조선시대에 국가의 화원으로서, 그리고 개인적인 화가로서 두 가지 측면의 화업을 동시에 달성한 대표적인 사람은 김홍도였다. 도감에 차출되면 한 달 가량을 출입의 통제를 받으며 임시 처소(假家)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국가의 각종 회사에 빈번하게 동원되다 보면 화가로서 개성 있는 화풍을 확립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화원들은 대부분 차비대령화원 출신이어서 이 제도가 얼마나 화원들을 날카롭게 비평하고 특장을 살려 기량을 성숙시켰는지 짐작하게 한다.

 

김홍도는 천부적인 자질과 왕성한 창작력, 그리고 정조의 후원에 힘입어 이 모두를 성취한 조선시대 최고의 화원으로 이름을 남겼다. 김홍도 이전에는 안평대군의 비호를 받은 <몽유도원도>의 작가 안견,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가서 명성을 떨친 김명국(金明國), 인조의 총애를 받았던 이징(李澄), 숙종이 최고라 칭송했던 이명욱(李明郁) 같은 화원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후대에 끼친 영향력은 김홍도에 미치지 못하였다.

 

김홍도는 산수화·인물화·화조화 등 각 방면에서 이인문· 김득신· 이명기(李命基)· 엄치욱 (嚴致郁)· 장한종(張漢宗)· 이의양(李義養)·이수민·이재관(李在寬) 같은 동시대의 화원은 물론이고 아들인 김양기(金良驥)를 비롯하여 조정규(趙廷奎)· 유운홍(劉運弘)· 이형록 (李亨祿)· 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백은배(白殷培) 같은 후배 화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의 화원들은 대부분 김홍도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 도화서의 직제와 구성, 화원의 역할과 품직, 가문의 형성 등에 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도화서는 유교적인 가치관에 입각하여 운영되었으며 화원에게 부여되는 업무는 거의 예적 질서를 준수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원들은 엄격한 규범의 제한을 받으며 국가와 왕실을 위해 일하는 한편으로 사대부들의 회화적 수요를 충당하면서 작가로서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을 이뤄나갔다. 조선시대 화원 그림의 다양성은 조선시대 화단을 풍부하게 장식하였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주요작품>

 

장득만 외 <만고기관첩> 종이에 채색 38×30cm 18세기 화첩의 앞쪽에 정조의 도장이 찍혀 있어 정조가 궁중에서 친히 열람했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김홍도 <추성부도> 종이에 수묵담채 56×214cm 1805년 중국 송(宋)대에 구양수가 지은 '추성부'를 그림으로 나타냈다. 적막한 가을의 소리를 인간사와 연결시켜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 했다는 '추성부'의 내용이 화면 좌측에 쓰여 있다.

 

작자 미상 <영조병술진연도> 비단에 채색 99.5×49.8cm 1766년경. 영조 42년 왕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경희궁의 승정전에서 베풀어진 궁중연회를 그린 병풍의 한 폭이다.

궁중에 내입한 그림답게 당대 최고의 화원이 동원된 것인데 〈순조기축진찬도병〉의 제작 화원 가운데 이름이 밝혀진 이수민(李壽民)도 차비대령화원이었다. 이 제도는 고종 18년(1881)까지 존속되었다.

 

이명기 <미불배석도> 종이에 수묵담채 105.7×58.7cm 18세기 말~19세기 초 이명기는 정조의 초상화를 그려 찰방 벼슬에 올랐던 궁중화가이다. 기암괴석을 보면 절을 했다는 중국 북송대 서화가 미불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안중식 <도원문진도> 비단에 채색 164.4×70.4cm 1913년 조석진과 함께 조선시대 마지막 궁중화가였던 안중식의 이 작품은 중국의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를 표현한 것이다.

출처 : 월간미술 http://wolganmisool.com/200001/exhibition_0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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