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고종황제 장례식, 덕수궁 국장화첩, 1919년

문성식 2019. 2. 11. 10:34


고종황제 장례식, 덕수궁 국장화첩, 1919년



고종황제가 붕어(崩御)한 며칠 뒤 1919년 2월 9일

고종의 거처였던 함녕전에서 일본 왕가 장례의식이 봉고제(장례를 하늘에 알리는 의식)이 열렸다.

정면 깊숙이 황제의거처 쪽에 일본식 제단을 중심으로

일본 전통 복식을 입은 제관이 가장 앞자리에

고종의 전통 굴건 제복을 차려 입은 유족이

그 뒤에 어색하게 선 모습이 쇠락한 황실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고유의 왕실 의례조차 일본식을 강요당했던 당시 황실의 실상을 단적으로 증언하는 사진이다.




견여에 재궁을 싣는 모습




경운궁 (덕수궁) 대한문 앞 조문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독살설에 휘말리면서 3·1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중요한 사건이다.

1919년 1월 21일 새벽 1시 15분경부터 증상이 시작되

새벽 6시 30분 중태에 빠지는 과정에서

당시 고종을 가장 먼저 진찰하고 임종을 지킨 의사는 일본인 여의 도가와 기누코다.

당시 주치의였던 가미오카의 몸이 불편해지면서 대신 고종을 진찰한 여의다.

1월 23일자 <경성일보>는 도가와를 인터뷰하고 그의 술회를 게재했다.

고종은 발병하기 4, 5일 전부터 "다소 식욕이 없고 잠이 잘 오지 않네" 하고 몸 상태를 설명했는데,

발병 전 의자에 앉아 있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도가와는 발병 연락을 받은 후 허둥지둥 전의와 참궁을 했는데, 2회부터 7회까지 고종의 경련이 계속됐다.

맥박이 2, 3회에는 110회, 4회부터는 130에서 140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체온도 37도 7부로 올라갔다.

8회째부터는 의식이 완전히 없어졌다.

경련은 12회까지 계속됐고, 고종은 오전 6시경 훙거(薨去)했다.




대한문을 나서는 견여 행렬




대한문 앞에 도열한 일본 육군 의장병




오전 8시 덕수궁에서 발인하여 경성일보 앞을 지나 장례식장을 향하는 대여(大輿)




대한문 앞에서 출발하는 대여 행렬




행렬을 따르는 관료들




종로를 지나고 있는 죽안마





종로 2층 상가 건물에서 고종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군중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는 금광개발업자이자

UPA(UPI의 전신)의 특파원으로

서울에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그는 1919년 3.1독립선언과 제암리 민간인 학살사건을

외부에 알려 일제의 만행을 전 세 계에 알렸다.

그 이후로도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그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석방된 후, 테일러는 미국으로 추방되어,

1948년 숨을 거둘 때 사랑하는 한국 땅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현재 서울 양화진의 외국인 묘소에 안장되어 있다.










고종 인산일 견여와 전차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2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자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

애도기간 중이던 3월 1일 기미독립선언문이 공포되었고,

이틀 뒤에 열린 3월 3일 국장을 기점 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흥인지문 옆을 지나가는 죽안마 행렬










고종 인산일 소여(小輿)와 방상시(方相氏) 그리고 인력거를 탄 종친의 모습




금곡 홍릉으로 향하는 장례 행렬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일본 황실에서 보내온 신수 행렬




장례식장 정문을 통과하고 있는 대여 행렬




홍릉 정문 앞




고종 국장 장례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훈련원




홍릉에 오르는 상여







일본 천황과 황후가 보낸 신수(神樹)를 메고 가는 행렬.

일본군 장교가 호위하고 있다.





고종 국장시 상복 입은 순종

고종은 1월 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사망했는데,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고종의 시신을 염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시신이 사후 1~2일밖에 안되었을때도 심하게 부풀어져있었고

이가 이미 다 빠져있는 등 부패가 정상인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부분은 독극물 중독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에 의하면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고 했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했다.

고종 독살설은 당대에 크게 떠돌아 전국적인 규모의 3·1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19년의 3·1 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추어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일제 강점기인 1945년까지는 이를 조사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그 이후로도 공식 조사된 바 없어 명확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고종은 당시 67세로 적지 않은 연령이기도 했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강제로 양위를 당한 고종이

의병이나 독립 운동 세력에게 상징적 구심점이어서,

독립을 위한 무장봉기를 계획하여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신한혁명단에서

고종황제를 망명시켜서 항일운동을 활성화할 계획도 드러나는 등

일제에게는 부담이 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사실일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되고 있다.

더구나 고종황제는 덕수궁에서 망국의 한을 씹으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액의 내탕금으로 지원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독살설이 사실일 경우 관련자로서 거론되는 인물은

이완용, 이기용, 한창수, 윤덕영, 민병석, 한상학 등이 있으며,

어의인 안상호도 의심을 받고 있다.

이중 이완용과 이기용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친일파들로서 <

특히 이완용은 일본 천황 앞에서 고종을 독살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설이 있으며,

독을 탄 음료를 고종에게 직접 전한 궁녀는 일제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종황제의 장례식(3.3)때 진행하려고 했지만

장례식날에 하는 것은 무례하다는 이유로 일요일(3.2)에 하기로 정해졌지만

일요일은 기독교 신자들이 교회에 가는 날이라서 3.1로 정해졌다.




서울 쳥량리를 지나는 고종의 장례행렬






















고종황제의 장의 행렬







고종장례식 고종궁장사진첩/ 장서각 소장

출처]고종황제[高宗,1852 ~ 1919.1.21] 장례식, 덕수궁 국장화첩(德壽宮 國葬畵帖),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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