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과 엘리베이터
1
나는 계단을 오를 때 진지해 진다. 계단을 만든 것은 높이에 대한 동경과 외경에 있을 것이며,
더 높고 넓은 세계와의 교신과 만남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인간이 높은 곳으로 한 걸음이라도 닿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시된 것이 계단이었다.
교회당, 신전, 탑, 성곽엔 예외 없이 계단이 있다.
이집트 카르낙 신전에 갔을 때, 나는 대 석주(石柱)들과 계단과 회랑(回廊)을 보았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거대한 석조물들은 지상에서 하늘 가까이 오르기 위한 구조체처럼 보였다.
인간이 신을 만나기 위한 공간 설치를 위한 지혜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그 공간에 닿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계단이 필요하다.
신을 영접하고 제사 드리기 위해 황제만이 마지막 계단을 오르며
신성 공간으로 가서 대화의식을 가지곤 했다.
황제는 신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인격체이며 결국 신과 대등한 신격의 소유자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통치의식이 필요했으리라.
황제는 제단 앞으로 가서 신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그 자신이 왕국과 더불어 영원불멸을 빌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지상에서 되도록 높은 곳에 닿기 위한 구조물을 만들려고 애쓴다.
2002년 봄에 나는 멕시코에 있는 마야문명의 최대 유적지인 쿠클칸 신전에 간 일이 있었다.
사방으로 계단이 91개로 모두 364개 인 것은 당시 마야의 달력으로 1년을 상징한 것이다.
마야문명은 영의 개념 도입과 소수점을 이용하는 수학을 비롯하여 높은 천문학의 수준을 보여준다.
숲 속의 신전은 돌계단을 피라미드식으로 높이 쌓은 건축물이다.
위로 오르면 제단이 있고, 제물로는 인신 공양물이 놓여진다.
돌로 만든 제상(祭床)은 사람의 형상으로 돼 있고, 가운데엔 원형의 구멍이 나 있다.
그 자리에 20~30대 건강한 청년의 심장을 꺼내 올려놓는다.
제물의 대상이 된 청년에게 식물에서 채취한 환각제를 먹인 다음
날카로운 돌칼을 사용하여 심장을 끄집어 내 제사상에 올린다.
인신 공양을 최상의 제물로 삼아 소원성취를 빌었던 마야인들의 유적지와 신전들은
모두 계단으로 쌓아올린 석조 구조물들이다.
인류가 남긴 세계 최대의 석조물이자 불가사의로 불리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위용도
계단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거대한 삼각 사면체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계단식 구축형태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탑이나 성벽, 망루, 종각 등 높은 구조물을 축조하기 위해선 계단이란 이동 장치가 동원돼야 했다.
계단은 신분의 구별을 의미하기도 했다.
높은 자리일수록 신분이 높은 자가 차지하고, 백성들은 계단 아래에 엎드리게 돼있다.
계단을 높이 오를수록 지상의 것들은 작아 보이고 하찮게 여겨진다.
세상은 더 넓고 광막해 보인다.
계단은 미지에 대한 동경과 더 높고 넓은 세계와의 교감을 위한 욕구의 표현 양식인지도 모른다.
계단을 오르면 궁금해진다. 꼭대기에 오르면 무엇이 있을까.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이 있을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인간은 마음속에 저마다 욕구의 계단을 가지고 있다.
꿈, 야망, 삶의 목표라는 이름, 혹은 허영, 사치, 집념이란 관념으로
끊임없이 계단을 만들어 오르려고 하는 게 아닐까.
계단을 오를 땐 쓸쓸하다.
여럿이 계단을 오를 때도 혼자서 오르는 것 같다.
계단을 오르려면 반드시 자신의 다리로 시. 공간을 거쳐야, 비로소 새로운 한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이 성취가 되든 실망이 되든 구조물의 설계는 계단이 없고선 그려지지 않는다.
2
도시에 고층건물이 생겨나면서 엘리베이터란 운송수단이 생겨났다.
힘들이지 않고 신속하게 자동적으로 오르게 됨으로써 편리와 능률을 얻은 후부터
계단은 비상통로 기능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나마 시대의 폐기물로 사라지지 않는 것만도 다행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나는 25층 아파트의 5층에 살고 있다.
분양 받을 때 24층이었으나, 5층으로 바꾸었다.
걸어서 계단으로 가려면 나에게 적당한 높이가 5층이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로 순식간에 닿는 것보다 계단을 밟고서 초인종을 누르거나 열쇠로 문을 열고 싶었다.
엘리베이터가 고안되어 실용된 이후부터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얻었던
신성, 영감, 기대감이 퇴색돼 버린 것은 아닐까.
신전, 교회당, 탑, 성벽, 피라미드 등 불멸의 문화재들이 지닌 신비가 숨을 멈추지 않았을까.
이제 계단은 느림, 불편의 이미지를 달고 있다.
나는 계단을 밟으며 삶의 궤적과 과정을 떠올려 본다.
자신이 걸어서 한 단계씩 지상으로부터 높이 오르는 경험은 인생을 생각하게 하고,
한 차원 높은 세계와의 만남과 교감을 갖게 만든다.
늦은 귀갓길에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발자국 소리를 내며 천천히 걸어서 5층까지 오르면서
창가로 보이는 달이나 별과도 만나고
어둠 속에 얼굴을 묻고 꿈을 꾸는 나무들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다.
모든 것이 너무 빨라졌다.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변해버린다.
계단과 회랑이 필요 없어지고, 높이에 대한 신성한 사고가 사라져 버렸음을 느낀다.
나는 계단 위에 있었던 사람과 계단 밑에서 있었던 사람,
그리고 계단 위의 제물이 된 사람들을 생각해 보곤 한다.
아, 인간들이 남겼던 건축 유물들은 모두 계단으로 구축된 것들이 아닌가.
그것은 권력의 지배구조였고 당시 질서의 한 양식이었다.
계단 대신 도입된 엘리베이터는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은 제 자리에 있고 계단이 움직이게 만든 에스컬레이터는 또 무엇인가.
속도와 편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 힘이 아니고도 단번에 인간을 수직 상승시키는 이 운송수단의 출현은 삶의 모습을 바꿔놓는다.
아이디어 하나로써 신분의 수직상승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계단 위의 신성공간도, 신과의 대화도 필요 없어졌다.
나는 걸어서 내 방에 들어서길 원한다.
아파트로 돌아오려면 계단을 올라야 한다.
벌집 같이 공중에 붙은 내 거처의 불빛을 본다.
나는 자동문이나 회전문 보다 내 손으로 밀거나 당겨서 문을 열고 싶어 하고,
걸어서 계단을 오르고 싶다. 나는 자력으로 행동하고 그 반응을 얻고 싶다.
나는 그리움의 계단, 별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계단,
바람을 가슴으로 안을 수 있는 계단, 꽃향기와 만날 수 있는 계단을 좋아한다.
밀폐된 직사면체의 엘리베이터 속에서 숨도 쉴 틈 없이 공중으로 혹은 아래로
이동하는 속도감에 길들여진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곤 한다.
나는 계단을 오르면서 꿈꾼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신비 공간이 있을 것이고, 그 성소에 가서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싶다.
사방으로 열린 우주의 한 복판에서 별들에게 바람에게 말하고 싶다.
ㅡ 鄭木日 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