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조신성(趙信聖)

문성식 2010. 11. 15. 11:10

“그는 오로지 조선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아마 그가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날는지 모르지마는 그는 숨이 넘는 그 마지막까지 조선을 생각할 뿐, 그가 두고 가는 친척, 자손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그에게는 죽을 때까지 용서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알면서 조선을 걱정하지 아니하는 조선사람, 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자는 그에게 있어서 모두가 죽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에 대한 지인의 인터뷰 중. 1943, <신가정>-

 

 

22세에 과부가 되어 홀로된 선생

조신성(趙信聖) 선생은 1873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약 60리 떨어진 비현역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머니 한씨의 뱃속에 석 달쯤 있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집을 나가버린 상태였다. 9세 되던 해에는 어머니마저 독사에 물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고모와 함께 살다가 16세 되던 해에 당시의 풍습대로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결혼생활 6년 만에 방탕한 남편은 가산을 탕진한 후 아편을 먹고 자살해 버렸다. 결국 선생은 22세에 과부가 되었다.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생계를 자신이 직접 해결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했다.

 

남편이 자살한 이후 선생은 1897년 평북 의주읍 교회에서 선교사 배위량(W.M.Baird)에 의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초기 한국 기독교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여성들 중에서는 과부들이 많았다.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세력과 경제력이 없는 과부들의 경우 신변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고 생계 유지 조차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위와 같은 취급밖에 받지 못했던 과부에 대해 우호적으로 대하였다. 그동안 괄시 받던 과부라는 위치에 있던 선생은 기독교를 통해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를 가진 귀중한 존재로 여겼으며, 자신의 삶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이러한 자각은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깊은 인식을 하게 했으며, 나아가 민족과 여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교육활동의 시작과 함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다

선생은 24세 되던 해에 서울로 와서 이화학당과 상동 소재 교원양성소를 졸업 후 같은 지역의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28세 되던 해부터 6년 동안 이화학당 사감으로 재직하였다. 그는 이와 동시에 창덕궁 방을 한 칸 빌려 이준과 함께 한국 최초의 조선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선생은 많은 민족운동가들과 만났다. 선생이 가장 친밀하게 지냈던 대표적인 인물은 안창호였으며, 그 외 서북지방 출신의 민족운동가들이었다. 1934년 <신가정>의 한 기자가 선생에게 “여성운동을 시작하실 때에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라고 질문하자 “내가 하숙하고 있을 때 같이 등을 대고 일하던 이가 도산 안창호였고 그밖에 많은 남자 동지들과 같이 있었는데 그 때 부인회라는 것을 처음으로 조직했었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선생은 자신의 능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선생은 일본 간다(神田)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요코하마(橫浜) 성경여학교 고등과에 다니게 되나, 갑작스러운 신경쇠약으로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에도 계속 그는 교육사업에 매진하였다. 귀국하자마자 부산 규범여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10년 사직하고 평양으로 가서 평양 진명여학교 교장직을 맡아서 활동하였다.

 

 

평양 진명여학교을 맡아 학교 운영에 힘쓰다

평양 진명여학교는 도산 안창호의 주도에 의해 설립된 학교였다. 도산은 여성교육의 필요를 절감하고 진명여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평양 명륜당에서 집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도산은 평양의 기생들과 기생학교 학생들을 대동강 놀이배에 태우고 애국의식을 일깨우는 연설을 몇 차례에 걸쳐 행하였다. 이에 감동받은 기생 중에서 10여명이 학교에 입학하여 학생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진명여학교는 점차 번창했으나 국권을 상실함으로써 도산의 해외 망명과 경제적 지원을 담당하던 평양부인회 회원들의 탈퇴로 폐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이 진명여학교를 책임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각고의 노력으로 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를 다시금 번창하게 만든다. <매일신보>에서는 1911년 4월부터 선생이 학생모집에 주야로 힘 쓴 결과 진명여학교 설립 6년 만에 학생이 100여명에 달했다면서 그를 높이 평가한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무렵 선생은 비밀사령을 받고 북경으로 떠나게 된다. 북경에서 정확히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 연계를 맺고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맹산독립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선생은 북경을 다녀 온 후 1919년 11월 만주 관전현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맹산독립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항일무장투쟁과 군자금 모집이 선생의 독립단의 주요 활동 내용이었고, 구성원은 19여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1934년 <신가정>의 한 기자가 “직접 운동을 실행하시는 동안에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일을 하셨습니까?”라고 질문하자 “가슴에다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시시로 변장을 해가며 깊은 산 속을 며칠씩 헤매고 생식을 해가면서 고생을 하고(…) 주막에서 순검에게 잡혀 가지고는 격투하거나, 오도가도 못하고 끼니를 굶어가며 산속에서 며칠씩 숨어 있었다.”라고 대답했다.

 

대한독립청년단 활동과 관련된 당시 신문기사(동아일보 1921년 10월 9일자).

 

 

독립단 활동 중 선생은 일경에게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6개월 형을 선고 받게 된다. 그리고 출옥 후 선생은 다시 교육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는 평원군 한천으로 가서 사숙을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쳤으며, 대동군 대평에서 취명학교를 운영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근우회 활동과 교육 사업에 매진하다

선생이 여성단체운동을 시작한 것은 1927년 사회주의여성운동세력과 민족주의운동세력이 힘을 합쳐 근우회를 조직하면서부터였다. 선생은 처음부터 근우회 본부에서 활동하지 않았으며, 평양지회에서 활동하였다. 근우회 평양지회는 선생을 비롯한 박현숙, 박승일, 김선경, 김경옥, 백덕수 등에 의해 1928년 1월 30일에 조직되었다. 근우회 평양지회는 근우회 회관을 설립하고, 여성들에게 경제 의식을 일깨우고 실업여성의 직업 확보를 위한 실행사업으로 속옷공장 설립을 기획하는 등 추상적인 여성운동이 아닌 현실적인 여성운동을 기획하고 실천하였다. 1930년경 근우회 본부가 해체된 이후에도 선생은 평양 지회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활동을 펼쳤다. 근우회 야학운동 활동에 힘썼고 본인이 예전부터 운영하던 취명학교도 동시에 운영하였다. 또한 1932년 6월 25일에는 무산아동을 위한 학교인 고육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교육활동에 더욱 매진하였다.

 

독립단 활동으로 체포된 선생의1922년 3월 28일 평양복심법원의 판결문.

 

 

그 후 선생은 1945년 해방이 되자 3개월 만에 월남을 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72세였다. 북한지역에서 김일성 정권 장악 이후 활동이 어려워진 선생은 남한을 선택했고 1948년 대한부인회 부총재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1953년 5월 5일 부산의 신망애 양로원에서 80여생을 마감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10 평양 진명여학교 교장
1919 맹산독립단 조직
1928 근우회 평양지회 조직
1932 무산아동을 위한 학교 고육원 설립
1948 대한부인회 부총재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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