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최용신(崔容信)

문성식 2010. 11. 15. 11:14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 가매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 마라.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선생의 마지막 유언 중에서(1935. 1)-

 

 

근대교육을 일찍이 접했던 선생

맑고 푸른 동해 영흥만에 자리 잡은 바닷가 마을로 행정구역은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 명사십리와 해당화로 유명한 이곳에 1909년 8월 12일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상록수>의 주인공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채영신, 바로 최용신(崔容信) 선생이었다. 언니, 큰오빠인 시풍, 작은 오빠인 시창, 여동생 용경 등 3녀 2남 중 차녀였다. 부친은 창희(昌熙), 본관은 경주였다. 선조들은 그곳에서 대대로 세거하다가 12대조의 원산으로 귀양을 계기로 덕원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고향인 두남리는 원산에서 10리쯤 떨어진 풍광이 아름다운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이곳은 일찍이 기독교 전래와 더불어 교회, 학교를 운영하는 등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조부와 부친도 사립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육 사업에 종사한 인물이었다. 즉 시세 변화와 더불어 집안 분위기도 크게 변모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서북지방의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이는 선생으로 하여금 근대교육에 쉽게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어릴 때 선생은 천연두를 심하게 앓아 얼굴은 물론이요, 정강이에도 마마 자국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선생을 놀리는 등 심하게 구박하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선생은 깊은 사색에 몰두하면서 자랐다. 8세가 되던 1916년 선생은 마을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하였다. 2년간 이곳에 다니다가 1918년 원산의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전학하였고, 졸업 후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여 1928년 19세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선생은 교목인 전희균(全羲均) 선생 권유로 서울에 있는 협성신학교에 진학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은 농촌사회지도교육과의 황에스터(黃愛德)교수를 만나게 되고, 학문적인 토대와 아울러 학생들에게 직접 농촌에 들어가 몸소 체험하고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 황교수를 통해 선생은 농촌계몽운동에의 뜻을 더 확고히 하게 된다.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1929년 협성신학교 시절. 앞줄 오른쪽이 선생.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선생의 관심은 사실 중등학교 시절부터 계속된 것이었다. 루씨여학교 졸업반 시절 기고한 <조선일보> 1928년 4월 1일자 ‘교문에서 농촌으로’는 선생의 이러한 포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며 또 누구를 찾는가? 사회는 새 교육을 받은 새 일꾼을 요구한다(…)여기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자진하여 자기들의 책임의 분을 지고 분투한다면 비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될 줄로 믿는다. 중등교육을 마친 우리들은 각각 자기의 이상을 향하여 각자의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 그 활동의 첫 계단은 무엇보다도 농촌여성의 지도라고 믿는다. 나는 농촌에서 자라난 고로 현 농촌의 상황을 막연하나마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절실히 느끼는 바는 농촌의 발전도 구경(究竟)은 여성의 분투에 있다는 점이다. 오늘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북데기 쌓인 농촌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에 크게 유감된 바이다. 문화의 눈이 구(舊)여성만 모인 농촌으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게 못한다면 이 사회는 어느 때까지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선생은 이처럼 여성도 남성과 같이 사회개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더욱이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신여성이야말로 가정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농촌에 뛰어들어 문맹퇴치와 생활개선을 주도하자고 외쳤다. 농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문맹 없는 농촌, 잘사는 농촌 건설이 선생의 이상이었다.

 

 

학업 중단 후 샘골 마을에 파견

선생은 1929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황해도 수안군 용현리로 첫 봉사활동에 나섰다. 선생은 동료인 김노득(金路得) 등과 함께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실행하였다. 이듬해에는 경북 포항군 옥마동에서 실습 겸 농촌계몽운동을 병행하는 데 앞장섰다. 현지 활동을 통하여 선생은 많은 갈등과 자책감을 느꼈다. 가난과 무지가 만연한 피폐한 농촌은 선생으로 하여금 학업을 중단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학업을 중단한 선생은 1931년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泉谷, 일명 샘골)에 YW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파견되었다. 1934년 봄까지 2년 반 동안, 선생은 이곳에서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마을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천곡학원(샘골학원) 인가뿐만 아니라 교사를 신축하여 아동은 물론 청년, 부녀자 등을 대상으로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에 노력을 기울였다. 생활개선과 농가부업을 장려하기 위한 부녀회, 청년회도 조직하는 등 주민들 상호간 신뢰감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한글보급, 농촌봉사대와 최용신 선생(1930년). 맨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선생.

 

 

초기의 냉소와 비난을 극복하고 주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다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선생은 무엇보다 지역 주민들의 냉소와 비관주의와 맞서야만 했다. 신간회 수원지회장을 역임하고 선생의 후원자였던 염석주조차도 선생을 처음 봤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어떤 날 얼굴이 얽은 신여성 하나가 부인 몇 사람과 같이 찾아와서 자기는 지금 샘골에 있으면서 이 지방을 위하여 작은 힘이나 바쳐보고자 하니 부디 잘 지도 협력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사회의 풍파를 많이 겪어 쓴맛 단맛을 다 맛보아서 무엇을 한다는 사람들에게 아주 실망한 참인데 더구나 세상을 모르는 젊은 여자 하나쯤에게 무슨 큰 기대를 가질 수가 있겠어요? 날고 기는 놈들도 농촌에 와서 실적을 못 내는 이 시절에 너 같은 계집애가 무엇을 해보겠다고 그러느냐 하는 경멸을 던졌었어요.”

 

위생생활, 생활개선 등의 주장에도 주민들은 “제기! 파리 안 잡아도 파리에 물려죽은 놈은 하나도 없었다네. 책상물림의 젊은 처녀가 무엇을 안다고 이러니 저러닌가”라는 핀잔을 주기 다반사였다. 하지만 선생은 이러한 반응에 굴하지 않고 부임 초기부터 마을에서 운영되던 강습소를 확대,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무허가였던 강습소에 인가를 신청하였고, 강습생이 110여 명에 달하자 강습소 증축계획을 세웠다. 마을 사람들 역시 선생의 노력과 열정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마을을 보며 냉소와 비관을 거두고 선생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 시작했다. 증축을 위한 모금활동이 주민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진행되었고, 근처 솔밭의 소유주였던 박용덕(朴容德)은 인근 토지 1,500평을 기증하였다.  선생의 헌신,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 모금으로 호응으로 예배당에 딸린 작은 강습소가 ‘천곡학원’이라는 정식 교육기관으로 발전한 것이다.

 

천곡학원 학생들과 교사들.

 

 

쉬지 않고 전념한 농촌사업

마을교육사업 외에도 선생은 농가부업, 위생생활과 환경개선, 저축장려 등 지역 사회 발전에 필요한 운동들을 전개해 나갔다. 학교 주변에 뽕나무 심기와 누에치기 권장하고 감나무 등 유실수도 마을주민에게 나누어주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입 중 일부는 강습소 유지비나 농기구 구입으로 사용하였다. 마을 부녀회는 이러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는 부인들이 가사에 국한되었던 활동범위를 넓히며 스스로의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가치관을 확립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학용품 등을 주기 위하여 수업시간 이외에 밭에 나가 김을 매는 등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오전, 오후반 수업과 야학수업, 가정방문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10리 떨어진 야목리로 가서 윤홍림(尹洪林)과 함께 농촌진흥운동에 관하여 토론을 정기적으로 열었다. 이는 보통사람이면 전혀 감내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다. 과중한 업무로 인해 선생의 몸은 병들고 지치게 되었으나,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선생은 쉬지 않고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선생의 노력으로 마을의 기반이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갈 때, 선생은 돌연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장기적이고 실천적인 농촌계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이만큼 자리 잡은 샘골을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새로운 농촌운동의 전개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의 좁은 문견으로는 도저히 능력이 부족하다. 만일 이대로만 간다면 곧 침체되고 말 것이며 이 모양조차 유지해가기가 곤란할 것이다. 이곳을 이 땅의 농촌운동의 한 도화선으로 만들자면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 1934년 선생은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그 해3월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새로운 환경은 향학열로 이어지는 등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하지만 학업에 정진 중이던 선생은 별안간 각기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스물 다섯 나이에 과로로 세상을 떠나다

선생은 6개월 만인 9월 귀국하여 다시 샘골로 돌아왔다. 병든 몸을 이끌고 선생은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그런데 YWCA가 샘골학원 보조금 지원 중단을 선언하여 경제적인 부담까지 가중되었다. 선생은 1934년 10월 여성잡지 <여론(女論)>에 ‘농촌의 하소연’이라는 제목으로 샘골을 살리기 위한 사회 각계의 지원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사회적인 반응은 냉담하였고, 피로와 정신적인 고통의 누적으로 이듬해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마을주민들의 지극한 기도와 정성에도 선생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1월 23일 짧디짧은 25년 6개월의 생애를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 떠났다.

 

선생의 유언. 그를 간호하던 안홍팔에게 선생이 구술한 것이다. (1934년 1월 26일. 독립기념관 소장)

 

 

운명하는 순간 선생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십시오/김군과 약혼한 후 십 년 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어머님을 두고 가매 몹시 죄송하다/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이처럼 선생은 죽는 순간까지 샘골의 영원한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학생들에게는 다정다감한 참다운 스승으로, 주민들에게는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불사조로 기억되고 있다. 식민지 시절 일제의 수탈로 인해 피폐해진 농촌을 살리고 계몽과 자립으로 민족역량을 키우려 했던 선생의 생애는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28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1929-1930 황해도 수안, 경북 포항에서 농촌계몽운동
1931-1935 경기도 반월에서 샘골학원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며 민족교육 실시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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