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이 신채호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27년이었다. 선생과 아들은 3, 4일에 걸쳐 북경으로 가는 도중 여관에서 쉬다가 납치를 당할 뻔하기도 했지만 여관 주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신채호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세 가족은 박숭병의 집에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냈다. 하지만 신채호는 더 이상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어 다시 선생과 수범을 국내로 돌려보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1928년 4월경 신채호 선생은 다른 곳에 다녀올 데가 있다면서 편지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 후 외국위체위조사건으로 대만 기륭항에 도착하기 전 배 위에서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 후 감옥에 있는 신채호 선생과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였지만 1931년부터는 편지마저 끊어져 버렸다. 선생은 신채호 선생의 석방 날짜를 기다렸다. 그러나 1936년 2월 관동형무소에서 아들 신수범 앞으로 ‘신채호 뇌일혈로서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선생은 아들, 친구 서세충과 함께 여순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남편 신채호 선생을 만났으나 전혀 의식이 없었다. 결국 신채호 선생은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에 운명을 달리하였다. 선생은 24일 ‘노조마열차’로 남편의 유해를 싣고 귀국하였다. 경성역에는 많은 지인들이 모여들었다. 권동진, 홍명희, 여운형, 신석우, 서춘, 안재홍, 김형원, 박돈서, 신상우, 이관구, 정인보, 원세훈, 이대위, 김약수, 현동완, 주익, 유진태, 서정희, 김동완 등이었다. 이중에 원세훈은 청주군 남성까지 함께 동행해주었다. 장례식은 신석우 250원, 송진우 50원, 여운형 50원, 조선일보 방응보 20원, 삼천리사 김동완 1,000 등의 부조금으로 지냈다.
신채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박자혜 선생은 “이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독립과 남편의 석방이 유일한 희망이었던 선생에게 남편 신채호 선생의 죽음은 극복할 수 없는 큰 상실이었을 것이다. 남편의 죽음 후 첫째 아들 수범은 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떠났으며, 둘째 아들 두범은 그 다음 해 1942년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943년 홀로 셋방에 살다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