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박자혜

문성식 2010. 11. 15. 11:09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했던 선생은 일제강점 이후 궁궐에서 나와 근대교육을 받고 총독부의원의 간호사가 되었다. 이후 3.1 운동으로 부상자들이 속출하였을 때 이들을 간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선생은 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설립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하였고 결혼 후에는 어려운 생계와 양육 문제를 홀로 해결하면서 신채호 선생의 독립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하였다.

 

 

궁녀에서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로

선생은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며 모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선생은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궁궐로 들어갔다. 중인 출신인 부친이 딸을 궁궐로 보낸 것은 가정 경제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된다. 1900년대 당시 궁궐 밖에서는 여성들이 근대교육을 받으며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었지만, 10년 간을 궁궐에서 보낸 선생은 여전히 궁녀의 신분에 적합한 유교적인 여성관을 교육받았다.

 

선생이 이러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1910년 일제강점에 의해서였다. 1910년 12월 30일 일제는 ‘황실령 제34호’로 ‘이왕직관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 궁내부소속 고용원 340명과 원역(員役) 326명을 해직시켰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궁녀 신분을 벗어나게 되었고, 함께 나인 견습생 생활을 한 상궁 조하서를 따라 숙명여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 후 선생은 사립 조산부양성소에 다녔다. 그가 이곳에 입학한 것은 아마도 경제적인 자립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당시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교사와 의료인을 제외하고 직조업, 바느질 품, 마전장사, 유모, 양잠, 홍삼직공, 수놓는 직공, 굴 따는 여자, 기생, 쌀 고르기, 여고원, 연초직공, 광주리장사, 음식장사, 아이돌보기, 길삼, 수모 등이었다. 이러한 직업은 대우가 좋지 못했다. 궁녀라는 것은 전통시대 여성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다. 선생도 궁녀라는 직업을 가졌다가 해고당한 뒤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당시 산파는 전문 의료인으로서 사회적인 인식에서도 여성에게 괜찮은 편에 속했다. 나중에 조산원을 개원할 수도 있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간이 생리학, 간이 산파학, 해부학, 태상학, 간호, 육아, 소독법 등을 배운 후 조산부 자격증을 얻어 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 취업하였다.

  

 

간우회 조직과 3.1만세운동의 참여

선생이 3년여 이상을 간호부로서 근무하고 있을 때, 나라 안에서는 독립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고 이는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으로 나타났다. 만세운동은 3개월 이상 전개되었고. 3월 1일부터 서울에 있는 각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었다. 총독부의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선생을 비롯한 한국인 간호원들은 18명이었으며 한국인 남자 의사로는 내과에 김용채, 산부인과 김달환, 외과 신창엽, 소아과 권희목, 피부과 김형익 등이 있었다. 그리고 연구과에는 김영오가 있었다. 이들은 환자들과 나라 잃은 슬픔을 함께 느꼈다. 선생도 단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다가 이들을 보면서 민족의 울분을 느꼈다.

 

그리고는 자신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목사 이필주와 연결되어 ‘간우회’를 조직하였다. 선생은 의사 김형익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선생과 뜻을 같이한 간호사들과 함께 3월 10일 만세운동에 동참하기로 계획하였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일경에게 체포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총독부의원장이 간호사들의 만세운동에 책임을 지고 유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간호사들의 신병을 인수하였다. 덕분에 선생은 일경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일본인들을 위해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병원을 그만두기로 한다.

 

선생은 만주에 있는 지인을 찾아갈 요량으로 병원에는 2주간의 휴가를 내놓고 서울역으로 가서 봉천행열차를 탔다. 그는 봉천에서 동래상회라는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던 석운 우응규를 수소문하여 찾아가 그에게 국내 정세와 망명을 하게 된 경위를 털어 놓고 도움을 청했다. 우응규는 박자혜의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이십여 일이 지난 후 북경의 명망 있는 인사에게 연경대학 편입학을 부탁한다는 편지 한 통과 노자를 마련해주었다. 선생은 즉시 봉천을 떠나 북경으로 갔다. 그리고 1919년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신채호와의 만남과 의열단 활동

남편 신채호 선생. 북경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선생이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난 것은 북경에서 생활한지 약 1년이 지난 1920년 봄이었다. 신채호 선생은 당시 우당 이회영의 부름으로 북경에 막 도착하였는데,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이 둘을 중매해 준 것이다. 첫 번째 부인과 별거한 뒤 10년간을 독신으로 지냈던 신채호 선생과 당시 24살이었던 박자혜 선생은 이렇게 해서 함께 북경 금시방가(錦什坊街)의 한 셋집을 얻어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1921년 음력 1월 선생은 첫 아들 수범을 출산하였다. 신채호 선생으로서는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그는 약간의 원고료와 후원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해왔지만 항상 하는 일은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뿐이었다. 1922년 선생이 둘째 아들을 임신했을 때, 신채호 선생은 더 이상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 선생과 수범을 국내로 돌려보냈다. 이 때 선생은 5개월 된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만 아마 이 두 번 째 아들은 국내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둘째 아들 두범은 1927년에 출생하였다.

 

국내로 돌아온 선생은 인사동에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생계를 유지하였다. 연경대학에 다닐 때는 여학생 축구부까지 만들 정도로 활달했지만 경제적 궁핍함으로 남편과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하루도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가족들이 국내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지내는 동안 신채호 선생은 1923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가담하였다. 선생은 국내에서 아들을 키우면서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국내에서 가능한 한 독립운동을 지원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탄사건 때에도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석주를 선생이 돌보고 안내하는 등 의열단 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힘겨운 삶

선생은 당시에 많은 독립운동가 아내들처럼 남편의 독립활동을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보급기지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가정경제, 자녀교육, 남편의 독립활동 내조 등이 전부 그녀의 몫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끊임없는 일경의 감시와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선생의 산파업은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당시에는 난산일 경우에만 산파를 찾아서 수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 달이 가도 손님 한 사람 찾아오지 않아 선생 집의 아궁이에는 불 때는 날이 한 달 중 4, 5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두 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끼니를 못 때우는 날이 많아 대련의 감옥에 있는 신채호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신채호 선생이 "내 걱정은 마시고 부디 수범 형제 데리고 잘 지내시며 정 할 수 없거든 고아원으로 보내시오"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렇게 어려운 생활 중에도 선생은 아들 수범의 교육을 위해 교과서를 겨우 구입해서 교동 보통학교에 보냈다. 아들도 거의 굶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이 같은 환경에서 선생은 아들 수범을 한성상업학교까지 졸업시켰다.

 

대련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신채호 선생이 너무 추워 선생에게 솜을 많이 누빈 두툼한 옷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너무 어려워서 해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방문한 <동아일보> 기자에게 선생이 “대련이야 오죽이나 춥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경제적인 이유로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솜옷 하나 해줄 수 없었던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생은 매달 육원 오십전 하는 방 한 칸의 월세마저도 제때 못 내어 주인의 독촉을 받으면서 살았다. 

 

산파업이 제대로 안 되어 선생은 아들과 함께 풀장사, 종로네거리에서 참외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신채호 선생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동아일보>에서는 선생의 생활을 공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러한 내용의 기사가 실리자 전국에서 이들을 위해 후원금을 보내왔다. 무명씨 1원, 10원, 강계 동인의원 김지영 10원, 이천군 박길환 5원, 정주군 이승훈 5원 등이었다. 그리고 1929년에도 천도교부녀회에서 7원을 동정금으로 보냈다.

 

이러한 어려운 생활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일경들의 감시와 폭력이었다. 큰 아들 수범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일경이 책가방을 뒤져 검색을 했다. 혹시라도 어린 수범을 시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어떤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선생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신문사와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큰 아들 수범의 학비를 위해 신채호의 동지, 친지, 친척 등을 찾아 가기도 했다. 선생은 일경에게 갖은 욕과 폭력을 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하였다. 큰 아들 수범은 일경의 간섭으로 선린상고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박자혜 선생의 근황을 소개하는 신문기사.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이 보인다. (<동아일보> 1928년 12월 12일자)

 

 

1943년 홀로 셋방에서 살다 세상을 떠나다

선생이 신채호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27년이었다. 선생과 아들은 3, 4일에 걸쳐 북경으로 가는 도중 여관에서 쉬다가 납치를 당할 뻔하기도 했지만 여관 주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신채호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세 가족은 박숭병의 집에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냈다. 하지만 신채호는 더 이상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어 다시 선생과 수범을 국내로 돌려보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1928년 4월경 신채호 선생은 다른 곳에 다녀올 데가 있다면서 편지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 후 외국위체위조사건으로 대만 기륭항에 도착하기 전 배 위에서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 후 감옥에 있는 신채호 선생과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였지만 1931년부터는 편지마저 끊어져 버렸다. 선생은 신채호 선생의 석방 날짜를 기다렸다. 그러나 1936년 2월 관동형무소에서 아들 신수범 앞으로 ‘신채호 뇌일혈로서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선생은 아들, 친구 서세충과 함께 여순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남편 신채호 선생을 만났으나 전혀 의식이 없었다. 결국 신채호 선생은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에 운명을 달리하였다. 선생은 24일 ‘노조마열차’로 남편의 유해를 싣고 귀국하였다. 경성역에는 많은 지인들이 모여들었다. 권동진, 홍명희, 여운형, 신석우, 서춘, 안재홍, 김형원, 박돈서, 신상우, 이관구, 정인보, 원세훈, 이대위, 김약수, 현동완, 주익, 유진태, 서정희, 김동완 등이었다. 이중에 원세훈은 청주군 남성까지 함께 동행해주었다. 장례식은 신석우 250원, 송진우 50원, 여운형 50원, 조선일보 방응보 20원, 삼천리사 김동완 1,000 등의 부조금으로 지냈다.

 

신채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박자혜 선생은 “이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독립과 남편의 석방이 유일한 희망이었던 선생에게 남편 신채호 선생의 죽음은 극복할 수 없는 큰 상실이었을 것이다. 남편의 죽음 후 첫째 아들 수범은 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떠났으며, 둘째 아들 두범은 그 다음 해 1942년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943년 홀로 셋방에 살다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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