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김학규

문성식 2010. 11. 15. 10:46

김학규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 후 조선의용대의 소대장을 거쳐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인 양세봉 장군의 참모장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후 조선혁명당을 대표하여 한국독립당 대표와 협의, 당 통합을 추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곽단체로써 조직 기능을 강화하도록 노력하였고,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항일항쟁의 선봉에 서서 군을 지휘하였다. 또한 광복 이후에는 중국에 있는 한인들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며 1만 2천 명이 넘는 한인들을 무사히 고국으로 귀환시키도록 힘썼다.

 

 

구국항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다

김학규(金學奎, 1900. 11. 24~1967. 9. 20 )선생은 1900년 11월 24일 평남 평원군 서해면 사산리에서 의사인 부친 김기섭(金基燮)의 4남 2녀 중 4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호는 백파(白波)이다. 5세가 되던 해에 부친이 세상을 뜨게 되자 가세가 기울어 가난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다 1910년 일제의 무력과 강압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자 선생은 국외로 망명하여 구국항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이갑 선생 등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1911년 12월 엄동설한에 압록강을 건너 만주 통화현 이밀(二密)이라는 황무지 산골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도끼와 호미로 산지를 개간하고 옥수수와 콩을 심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주경야독에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선생의 온면한 생활로 말미암아 가정형편이 점차 나아졌다 한다. 그 당시 통화현의 고산지역에는 일찍부터 이시영, 이회영, 이상룡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들어와 독립군 기지건설에 노력하고 있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아래 서로군정서라는 군정부가 성립되었다. 군정서의 첫 사업은 신흥학교를 무관학교로 개편하고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여 독자적인 군부대를 갖추는 것이었다. 동교는 하사관반, 장교반, 특별반으로 나누어 하사관반은 3개월, 장교반은 6개월, 특별반은 1개월씩 교육을 실시하였다. 선생은 1919년 이곳을 졸업하고 당시 만주에 조직되어 있던 조선의용대에 파견되어 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하지만 1920년 가을 일제의 소위 ‘경신토벌’로 인하여 한인들이 무참히 학살되고 가옥이 방화되는 등 일제의 온갖 만행이 계속되자 더 이상 이곳에서의 무장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선생은 구사일생으로 피신하여 각처로 은신, 도피하던 중 봉천 신민현(新民縣)에서 영국인 목사 오멜브나(Mr. Omelvena)가 경영하는 중국학교인 문회고급학교에 입교하여 6년 동안 신문학을 배우게 된다. 1927년 학교생활을 마치자 선생은 교포들이 경영하는 동명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후배들에게 민족의식 고취 및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한중연합군을 조직, 일군과 200여 차례 교전하다

1929년 겨울 선생은 교편생활을 그만두고 국민부의 중앙 소재지인 홍경현 왕청문으로 가서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직에 취임하는 한편,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장군의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관동군을 출병시켜 장춘, 길림, 하얼빈, 안동, 안산, 개원, 사평 등을 차례로 강점하였다. 당시 불의의 공격을 받은 장학량 군대는 일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30만 군대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이에 항일의식이 고조되고 있던 만주 30만의 중국 민중은 분개하였다. 당시 중동철로를 호위하던 마점산(馬占山)을 필두로 하여 왕덕림, 소병문, 당취오 등이 동북의용군, 구국군, 민중자위군이라는 명의 아래 반일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 당시 조선혁명군은 당취오와 긴밀히 연계하여 일군과 항전을 전개하였는데, 당취오는 당시에는 요녕성 우지산(于芷山) 부하의 1개 단장이었으나 이후 1932년 4월 환인성에서 순수한 민군을 규합하여 의기를 높이 들었으니, 그 수가 무려 20만에 이르렀다 한다. 당시 조선혁명군 참모장이었던 선생은 1932년 4월 당취오군 사령부에 가서 당취오와 면담을 진행하고 앞으로 양측이 긴밀한 군사관계를 유지하여 한중연합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 하기로 결의하며 대일 작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 의해 동년 10월 중순까지 한중연합군은 일군과 200여 차례에 걸쳐 교전하였으며, 영릉가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려 조선혁명군의 이름이 전 만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남경 통일회의에 참석, 조선혁명군의 지원을 호소하다

오광심 선생과의 결혼사진. 부인 오광심 선생 역시 광복군에 입대하여 남편과 함께 제3지대에서 항일투쟁을 함께하였다.


하지만 1932년 11월, 일본의 공세에 밀린 당취오와 그의 부대가 중국 관내로 종적을 감추었고, 따라서 조선혁명군만이 지역에 남아서 대일항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전투를 치러 수많은 간부를 잃었으며 일군의 공세로 날이 갈수록 독립군의 형세가 불리해지고 인력과 물자가 진폐하여 조선혁명군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남경에 있던 김구 선생이 한국 독립군 무관을 양성하는 한청 훈련반을 설립하고 의열단장 김원봉 선생이 조선혁명군 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수뇌부에서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혁명군 간부를 보충하기로 결정, 선생을 남경으로 파견하기로 한다. 1934년 5월 선생은 부인 오광심 선생과 함께 농부로 남경에 도착하였다. 남경에서는 김규식, 유동열, 김원봉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의 지도급 인사들이 선생 부부를 초대하여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었다. 선생은 만주에서 진행되고 있는 조선혁명군의 대일작전의 상황보고를 하고 조선혁명군에 대한 인력과 물력보급의 필요성과 그 긴요성을 역설하였다. 모두들 만주동포들의 고투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중국측 인사들도 많은 동정을 표하였다.

 

한편 당시 각 단체의 대표들은 대동단결을 위한 통합을 전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란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회의를 개최하고 있었고, 조선혁명당 대표인 최동오와 유동열도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선생은 우선 각 독립운동단체 진영의 통합이 선결과제임을 깨닫고 남경의 통일회의 사항에 대하여 조선혁명당 본부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한 후 일제 측에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인으로 하여금 암송하게 한 다음 남경을 출발시켜 조선혁명당 본부에 보고케 하였다. 본부에서는 선생이 제안한 보고서 내용에 전적으로 찬성하여 남경통일회의에 선생을 조선혁명당 대표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선생은 1935년 봄부터 남경통일회의에 정식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단일대당창립대표회의에 참석하여 민족혁명당을 결성

남경통일회의에 참가했던 각 5개 단체의 대표는 한국독립당 대표 양기탁조소앙, 조선혁명당 대표 최동오와 김학구, 의열단 대표 김원봉과 진의노, 신한독립당과 대한독립당 대표 김규식, 신익희, 지청천 등으로서 1935년 7월 4일 새로운 당의 당명, 당의, 당강, 정책 등을 결의하고 다음날 민족혁명당 결당식을 가졌다. 이때 선생은 김원봉, 김두봉, 최동오, 신익희, 윤기섭, 윤세주, 조소앙, 진의노, 지청천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 간부로 선임되었으며 만주 지부장으로 임명되어 대동단결에 힘을 기울였다.

 

1936년 1월 선생은 군사교리를 연구하고 군사학을 습득하기 위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가서 1년 동안 군사훈련을 받고 난 후 남경에 돌아왔다. 그때 민족혁명당은 내부적으로 독립운동방략과 이념 등의 갈등으로 조소앙 등 한국 독립당 계열의 인사들이 이탈하여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으며, 양기탁 선생을 비롯하여 지청천, 김창환, 유동열, 최동오 등은 민족혁명당을 탈퇴하여 전당비상대표회의를 열고 일대 쇄신방향을 모색하는 한편, 당명을 한국민족혁명당이라 하였다. 당시 만주에 있던 조선혁명당은 당 중앙집행위원장 고이허와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장군이 전사하고, 일군의 소위 ‘토벌작전’에 의하여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남경에서 조선혁명당을 재건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한 인사들과 논의하여 1937년 4월 하순 남경에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동 당의 집행위원에 선생을 비롯하여 지청천, 최동오, 유동열, 양기탁, 현익철, 강창제 등이 선임되었다.

 

 

임시정부의 외곽연합단체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

1937년 7월 7일 일제가 북경 교외 노구교에서 중국에 대한 전면 전쟁을 일으키고 북중국 일대를 점령한 후 그 해 가을에 상해를 침공하자 민족진영 계열에서는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및 미주의 대한인 국민회, 동지회, 대한독립단, 애국단, 애국부인회, 단합회 등과 연합하여 1937년 8월 남경에서 임시정부의 외곽운동연합단체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 독립운동진영의 단결과 임전태세확립을 기하였다. 이때 선생은 조선혁명당의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대일항전을 위한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독립전쟁을 개시하여 설욕구국(雪辱救國)의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선언하는 한편 군무부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전시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때 선생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독립전쟁에 대한 계획안을 작성하고 군 인재를 양성하고 군사상 필요한 서적의 연구, 편찬에 몰두하였다.

 

1937년 겨울 상해에서 일군과 3개월간의 접전 끝에 중국군의 정예부대가 대부분 소멸 당하고 점차적으로 퇴각하게 되자 남경의 중국정부가 중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에 한국기관도 1937년 11월 중순 양자강을 거슬러 장사(長沙)로 이동하게 되었다. 1939년 봄에는 기강에 도착, 이곳에서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민족혁명당, 조선 청년전위동맹을 비롯한 7당의 대표가 모여 대동단결을 결의하고 통일운동을 꾀하였으나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7당의 통일이 무산된 후 민족주의 계열인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그리고 한국국민당은 3당이 연합하기로 하고 1940년 5월 통일신당인 한국독립당으로 새롭게 출발하고 광복군의 설치 계획을 다시 추진하였다. 당의 중앙집행위원장에 김구가 선임되었고 동위원으로는 선생을 비롯하여 조소앙, 지청천 등이 선임되었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1940년 9월 17일 마침내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고 총사령부를 같은 해 11월에 전선에 비교적 근접한 서안(西安)으로 옮겼다. 이때 총사령과 참모장 이범석이 중국정부와 협의할 문제가 남아 있어 중경에 잔류하게 되자 총사령 대리로 황학수, 그리고 참모장 대리로 선생이 임명되어 적 후방 공작을 적극 추진하였다.


1945년 광복군 제3지대장 시절 김학규 장군.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지하공작원 지휘

총사령부는 예하에 5개 지대를 편성하여 제1지대장에 이준식, 제2지대장에 선생을, 제3지대장에 공진원, 제4지대장에 미정, 제5지대장에 나월환을 임명하였다. 선생은 제2지대장 겸 참모장으로 복무하다 조선의용대가 제1지대로 편입되자 제2지대장을 이범석에게 인계하고 제3지대장이 되어 최전선인 부양으로 갔다. 그곳에서 선생은 조국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5년간 대일선전 및 초모공작, 정보수집 등 지하공작원을 지휘하였다. 선전공작은 적 후방에 있는 믿을 만한 인사에게 지하공작원을 밀파하여 의사를 통하도록 하고, 팸플릿을 우편물과 같이 보내 주거나 구전으로 아군의 사정을 알려주는 활동이었다. 정보공작은 대중 가운데 각 계급을 통하여 경제, 정치 등 정보를 수집하고 적군 내에 복무하는 군속을 통하여 군사정보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중국 군사위원회와 미국 제14항공대 사령부에 제공되기도 하였다. 한편 상당수의 한인 청년들이 광복군의 소식을 듣고 일군의 경계망을 뚫고 광복군 진영으로 넘어왔고, 일본군에게 지원병이라는 명목 아래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들이 중국 전선에 나왔다가 광복군 소식을 접하고 병영에서 탈출, 사선을 넘어 광복군으로 들어오는 학병들도 많았다고 한다.

 

 

미 OSS와 연합, 한국청년들을 훈련시켜

선생은 적 후방으로부터 아군으로 오기 위해 탈출하는 청년들에게 정신교육과 기술무장을 시키려는 목적으로 1943년 중국 중앙훈련단 내에 ‘한국광복군훈련반’을 설치하였다. 1기생으로 50여 명을 훈련시켜 중경 임시정부 직원으로 채용하고, 그 일부는 서안에서 제2지대장 이범석 장군이 미국 전략사무국인OSS기관과 합작하여 경영하는 훈련반에서 미국식 훈련을 받게 하였다. 제1기 훈련반은 임천에서 중국의 협조 하에 훈련을 받게 하였으며 제2기, 제3기 훈련은 부양에 있는 제3지대 본부에서 실시하였다. 훈련을 마친 후 대부분 적 후방으로 다시 보내어 지하공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당시 선생은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군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 장군(가운데)과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오른쪽).


선생은 수집된 정보를 임천에 있던 미국 제14항공대 소속 버취 대위(Captain Birch)에게 알려주었으며, 1945년 5월 버취 대위와 함께 곤명에 가서 제14항공대 사령관 센 노트 장군을 면담하였다. 그곳에서 약 1주간 머무르면서 공작연락에 관하여 OSS 막료들과 회합한 결과, 한미연합작전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 청년에게 기술훈련을 시켜야 된다고 합의하였다. 합의의 세부 내용은, 적 후방인 한국본토에 진입하여 정보공작을 맡을 정보원을 양성하며, 미군이 한국에 상륙작전을 전개할 때 한국 내에서 미군작전을 용이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적 후방 주요시설 파괴 및 게릴라 활동을 전개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할 것 등이었다. 정보원에게는 무선전의 기술을 가르치기로 하고 제3지대 한국인 연락원을 OSS사령부에 파견하여 3지대와 연락을 유지하였다. 훈련반은 미국 제 14 항공대 연락참 소재지인 입욱(立煜)에 두었으며 책임자는 드르먼드 대위였다. 훈련반 지도관으로 웸쓰 대위가 와 있었고 제1기에 우선 20명에게 무선전을 가르쳤다.

 

하지만 약 1개월간의 훈련이 진행되어 국내 정진작전을 도모하던 중, 일제의 무조건 항복 소식이 전해졌다. 비록 한국광복군이 자력으로 국토를 회복할 기회는 갖지 못했지만, 광복 후에도 광복군은 여러 활동을 통해 광복 이후 혼란기에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환국시키는 데 많은 역할을 해내었다. 8․15 광복 뒤 선생 역시 광복군 총사령부의 주상해판사처 처장에 임명되어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였으며 3만여 명의 교포를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데 전력하였다. 1946년 9월에는 한국독립당의 만주특별당 부위원장에 취임하여 교포 1만 2천여 명을 미군 비행기로 수송하여 천진에서 귀국시켰다. 그 후 선생은 1948년 4월 생전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고 정치활동을 하였으나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가 1949년 징역 15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게 된다. 이 후 1960년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여 최고대표위원에 취임하였고 1967년 9월에 서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약력

1919년 조선의용대 소대장 근무
1929~1932년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만주에서 무장항전 전개
1940년~1950년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미 OSS와 합작 국내 정진작전 추진
1960년 한국독립당 최고대표위원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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