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문화】
제2절 가람과 건축
7.석비(石碑)
원래 비석은 중국에서 장례를 치를 때 무덤 안에 관을 쉽게 내리기 위해 세우는
무덤 앞의 돌기둥에서 비롯되었다.
한(漢)나라 때에는 이 돌기둥에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했으며
일설에는 주(周)나라 때부터 이미 목비(木碑)가 있었다고 한다.
후한시대부터는 비의 머리가 지붕 꼭대기처럼 뾰족하거나 둥글게 만들어지고,
비신(碑身)의 한가운데에는 구멍을 뚫어 관을 내리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 비의 테두리에는 용(龍), 꽃, 사신(四神) 등을 새겼는데,
현무(玄武)를 새겼던 아래쪽과 용을 새겼던 위쪽은 각각 댓돌과 머릿돌에 해당하는
귀부(龜趺)와 이수(栗首)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거북돌과 용머리를 갖춘 비석이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부터 등장하고,
당나라 때에 들어서는 일정한 신분의 귀족들이 거북비를 사용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비들 가운데 큰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고승비(高僧碑)와
사찰의 내력을 새긴 사적비(寺蹟碑)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불교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석비의 발자취를 볼 때, 석비는 원시적인 석각(石刻)에서 출발해서
자연석을 사용한 비석을 거쳐 예술적인 비석으로 정착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당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예술적인 석비가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신라 하대에 들어 선문 조사(禪門祖師)들의 비를 세우면서 석비 문화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석비 형태는,
지상의 영물인 거북을 받침돌로 해서 비신을 받치게 하고,
거북의 등 위에는 구름무늬를 장식해 비석의 주인공이 천상에 존재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비신의 윗부분에는 여러 마리의 용을 장식해서 역시 천상의 영물을 표현했으며
때로는 불교와 관련 있는 구룡(九龍)을 표현하기도 했다.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비(雙峰寺 澈鑒禪師碑)는 대표적인 통일신라 석비인 동시에
우리나라 석비 예술의 대표작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석비의 위용이 더욱 당당해지고 규모 또한 매우 장중해진다.
다만 머릿돌에 새겨진 활기에 찬 용무늬 조각이 자유분방한 양식에서
틀에 박힌 형식으로 바뀌고, 거북돌의 등가죽에는 왕(王)자, 만(卍)자, 꽃무늬 등을 새겨
장식이 다양해진다.
한편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는 간략한 댓돌 위에 비석을 세우고,
빗돌 위에는 가옥형(家屋形) 지붕돌을 얹는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
오늘날까지 가장 보편적인 석비의 형식으로 유행하고 있다.
8.석등(石燈)
석등의 일반적인 구조는 땅 위에 댓돌을 놓고, 중간부에는 기둥을 세우고,
상단에는 연꽃 받침대를 장식하고, 그 위로는 불발기집[火舍石]을 얹게 되어 있다.
기본적인 평면 형태는 팔각형을 이루며, 기둥은 팔각기둥, 사자모양,
장구모양 등으로 표현된다.
고려시대부터는 사각형과 육각형 석등도 등장한다.
불발기집은 양면(兩面)이나 사면(四面) 또는 팔면(八面)으로 불빛창[火窓]을 내고,
테두리에는 비비람을 막기 위해 종이나 베를 씌운 창틀을 고정할 수 있는 못구멍을 내었으며,
창 주위에는 사천왕이나 보살상을 조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팔각기둥형 석등인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부석사 석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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