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역사 - 제2절 중국불교 - 4. 수,당시대의 불교 부흥기 (2)

문성식 2016. 11. 26.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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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역사】
      제2절 중국불교 4. 수,당시대의 불교 부흥기 (2)
        이어서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으로 이어진 부처님의 교외별전 법은 당나라시대 6조 조계 혜능(曹溪慧能, 638~713년) 대에 이르러 선종이라는 독자적인 종파의 위상을 갖추게 된다. 5조 홍인에게는 신수와 혜능이라는 걸출한 제자가 있었는데 신수는 장안, 낙양을 비롯한 북방을 중심으로, 혜능은 호남, 강서 등 남방을 중심으로 법을 펼쳐 각각 북종ㆍ남종으로 불리며 중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남종선은 후대에 북종선을 흡수하여 중국 조사선의 정통성을 확립하게 되는데, 북종의 점오(漸悟)가 선의 본질을 훼손시켰다는 점과 정치적 후원 세력이었던 측천무후의 몰락 등이 그 배경이었다. 이에 반하여 남종은 돈오(頓悟)사상을 제창하여 선의 정통성을 확립하였고, 사회ㆍ정치적으로도 측천무후 이후 현종대의 개혁파 관료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6조 조계 혜능의 문하에는 남악 회향과 청원 행사, 하택 신회, 영가 현각, 남양 혜충 등 걸출한 선지식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남악은 문하에 마조 도일이라는 대선지식이 나와 강서를 중심으로 법을 폈고, 또한 청원 문하에 석두 희천은 호남지방에 선풍을 드날리었는데, 강서의 마조와 호남의 석두가 조사선 또는 중국 남종선의 융성기를 열었다. 여기에서 ‘강호(江湖)’라는 말이 유래되어 천하의 선지식들이 법을 각축하는 것을 일컫게 되었다. 달마가 전파한 선은 6조 조계 혜능대에 이르러 한 종파로 위상을 확립하였고, 마조대에 이르러 선종이 중국의 중심사상으로 뿌리 내리게 되었다. 마조는 성품이 인자하며 소걸음에 호랑이 눈길이었다고 하는데, 마조 문하에는 139명의 대선지식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88명이 천하에 흩어져 조계 혜능의 조사선을 천하에 전파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조는 ‘천하에 선을 유포시킨 제일 공로자’로 평가된다. 특히 한국에 남종선을 최초로 전하여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된 도의선사도 마조의 제자인 서당 지장선사의 법을 이었다. 또한 고려 중엽에 태고 보우는 중국 선종의 여러 법맥 중에서 조계 혜능 - 마조 도일 - 임제 의현으로 이어진 임제 법맥을 이어 임제 선풍이 한국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마조 문하에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백장 회해가 선종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선이 천하에 널리 알려진 당시까지도 선종은 가람을 따로 정하지 않고 대개 율종 사찰에서 더부살이로 지냈으며 특별한 규율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백장은 백장산에 살면서 대중들이 많아지자 질서를 잡기 위해 경ㆍ율을 참조하여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고 총림(叢林)이라 하게 되니, 이것이 선종 최초의 법규와 도량이 되었다. 백장은 선종의 청규를 만들고 몸소 모범을 세웠는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유명한 교훈을 남겼다. 이와 같이 중국 선종은 당나라시대에 황금기를 구가하였는데 육조 혜능을 정점으로 선승들이 선사상과 법맥, 지리적 요인을 계기로 위앙종ㆍ임제종ㆍ조동종ㆍ운문종ㆍ법안종으로 이름 지은 선종 5가를 이루었다. 이처럼 중국에서 인도와 달리 선이 꽃 피우게 된 데에는 달마 이후 역대 조사에 의하여 수도와 전법이 끊이지 않았고 북방에 맞는 토양과 풍토에서 새로운 법규를 세워 나갔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꽃피운 선을 특별히 ‘달마선’ 또는 ‘조사선(祖師禪)’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부처님 선과 다른 것이 아니며, 단지 북방 선종에 대한 강조의 뜻이 담겨 있다. 선종에서 말하는 바는 부처님이 깨친 법, 즉 중도연기(中道緣起)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바, 누구나 스스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마음으로 깨치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부처님과 가섭 사이에 전해지는 ‘염화시중의 미소’가 바로 부처님이 이심전심, 불립문자, 교외별전으로 전한 선의 시원이라 한다.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경전이나 이론과 말로 하는 것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비유한다. 팔만대장경조차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므로 팔만대장경의 진리를 자기 마음에서 깨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부처님 교법과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신심, 발심이 된 사람이라면 경전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깨칠 수가 있고, 오히려 마음을 깨치는 수행에는 문자로 된 어떤 것도 알음알이를 조장함으로 걸림이 된다는 것이다. 당ㆍ송시대에는 선종이 융성하면서 교종은 위축되었는데, 이 무렵 선종은 최고의 융성기가 되어 중국의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선종의 선지식들은 부처님과 같이 제자와의 문답을 통해 가르침을 폈는데 이것이 ‘간화선(看話禪)’이라는 수행법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와 선지식이 부처님 법에 대하여 문답하는 중 선지식이 깨치라고 한 말을 수행자가 깨치지 못하고 의심하게 되어 이것이 ‘화두(話頭)’로 발전한 것이다. 원오 극근, 대혜 종고가 간화선을 정립하였다. 당ㆍ송시대에 융성한 선종은 이후 한국, 일본에도 전파되어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인들은 전형적으로 가계(家系)의 내력을 분명히 하기를 좋아했으므로, 이에 따라 몇몇 종파들에서는 나중에 그들의 초기 역사를 조사(祖師)들의 계보로서 재정리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선종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그래서 중국에 있어서의 정신적 혈통을 전설이 가미된 달마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추적하고, 나아가서는 고타마 붓다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선종 자체 내에 수많은 종파들과 그에 부수되는 종파들이 생성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당나라시대에는 승단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몇몇 공식적인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729년에 모든 승려들을 각 현(縣)의 단위로 등록케 하였다. 이에 의하면 승려는 126,100여 명, 사원은 5,385여 곳으로 집계되었다. 그런데 불교에 대한 큰 박해가 있을 당시(842~845년)의 공식 문서에서는 4,600여 곳의 사원과 40,000여 곳 이상의 작은 사찰 및 암자가 있었다고 하며, 그 당시 강압에 의해 환속한 비구와 비구니가 260,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아마도 구족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들만을 언급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므로 종종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교단에 입문한 수많은 ‘대중 속의 승려’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기록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당시에는 간혹 수계증을 사서 교단에 입문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당나라시대에 교단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승려와 속인이 혼연일체가 된 교단은 헌신과 선행, 현실적인 협동으로 번창하였다. 대승의 관념인 자비는 구체적이고, 현세적인 행위를 선호하는 중국인의 전통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고, 사원과 세속사회가 주창한 공공복지 활동의 전 분야를 고무시켰다. 그리하여 병원과 진료소를 지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기근이 닥칠 때는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승려들이 도로, 다리, 우물, 목욕탕 등의 공공시설을 건립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불교의 경축일이나 행사는 대중적인 민속의 일부가 되었고, 사찰을 위한 장이 개설되었다. 본래 이 장은 향(香)이나 불상(佛像)과 같은 종교적인 물품만을 거래하도록 한정되어 있었는데 정기적인 시장으로 발전하여, 엄격하게 규제되고 정부가 관리하였던 당나라 초기의 시장체계를 와해시키는 데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