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2절 중국불교
4. 수,당시대의 불교 부흥기 (1)
수 왕조(589~618년)와 당 왕조(618~906년)의 치하에서
중국의 중세 문명은 절정에 이르렀다.
다시 한번 강력한 중앙정부가 그 위력을 중앙아시아까지 확장하였으며,
한국이나 베트남, 티베트 같은 주변 국가들에 대하여 자국의 종주권을 강요하였다.
수도인 장안(長安, 현재의 西安)은 재건되어 세계 제패의 상징이 되었다.
10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수도에는
거대한 궁전과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의 관료조직으로 구성된 중앙 행정기구가 들어섰다.
수와 당시대에는 사람의 수에 따라 토지를 할당하는 제도를 통해 농업경제가 통제되었으며,
이러한 농업경제가 대장원을 소유한 귀족 지식층에 의해
여전히 지배되는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불교는 이전보다 더 큰 번영을 누렸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불교교단을 후원하였는데,
때로는 정치적인 이유가 고려되기도 했다.
수나라의 개창자는 의식적으로 불교의 전통에서 성왕(聖王)이라고 추앙되는
전륜왕(轉輪王)인 양 행세하였다.
측천무후(則天武后, 623~705년)는 능력은 있었으나 무자비한 전제 군주로서
15년 동안(690~705년) 중국을 통치하였는데,
무후는 자신이 미륵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였다.
그 뒤를 이은 통치자들은 국가와 왕조의 안녕을 위해 의식을 집전하도록 설립된
국가사찰이라는 제도를 운용하였고, 일부 통치자들은 많은 귀족들이 그랬듯이
유명한 승려들과 밀접한 유대를 맺었다.
그러나 북위(北魏)의 치하에서처럼 후원은 항상 교단을
관료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와 결부되어 있었다.
당나라시대에는 속인 관리들까지도 이를 실행하였다.
그래서 사원의 규모를 억제하고 승려직의 시험제도를 두어
그 순수성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중국인의 통제 아래 들어간 중앙아시아는,
7세기 후반까지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그 매개 지역으로서의 기능을 계속 발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나라시대의 초기에는 인도 순례자가 급증하였다.
그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현장(玄斡, 596~664년경)이다.
그가 중국불교의 독보적인 인물이 된 것은
그의 엄청난 여행 경력(629~645년)과 뛰어난 관찰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위대한 학자이자 번역가였으며, 일찍이 산스크리트어에 정통한 예가 없었던 중국에서
산스크리트어에 정통했던 극히 드문 중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현장의 번역팀이 이룩한 작품들은 이 분야에 있어서 중국인의 활동으로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최고를 기록한다.
7세기 후반에 아랍의 정복자들이 인도로 통하는 육로를 차단하자
순례자들은 점점 중국의 남부 해안에서 현재의 캘커타 근처에 있는
탐랄립티(Ta-mralipti)와 스리랑카로 통하는 해상 통로를 택하였다.
불교는 그 시대의 종교적이고 지적인 생활에 있어서 보다 창조적인 운동으로 나아갔다.
6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번창했던 일부 학파와 종파들은 인도의 입김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현장은 인도의 유식학을 받아들여 중국에 학파를 설립하였고,
이보다 약간 후대에는 인도의 승려들에 의해
비교(秘敎)적인 밀교의 다양한 유형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다른 학파들은 근본적으로 중국적이었다.
중국으로 이식되었든지, 아니면 중국에서 발전하였든지,
이들 모두는 무수한 주석서들을 저술하였다.
그 중 일부는 번역된 경전에 의거하였고,
또 일부는 위대한 독창성을 지닌 독립된 이론들로 이루어졌다.
정토종(淨土宗)과 같은 일부 종파들은
해탈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아미타의 자비에 의탁하는
헌신적이고 전파력이 강한 신앙형태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다른 종파들은 ‘교의의 분류’인 판석(判釋)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판석이란 하나의 특별한 경전이 최상의 진리를 담고 있고,
다른 경전들은 모두 계시의 연속적인 준비단계에 속하며,
그 각각은 가르치는 방법을 달리하여 각기 다른 청중에게 설해지고 있다는 개념이다.
그에 따라서 천태종은 교설의 구조가 다섯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법화경의 일승(一乘)이라는 교의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천태종에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한 화엄종에서는
그 귀착점을 화엄경(華嚴經)으로 삼았다.
대승적인 관념과 실천이 중국에서 가장 발전한 것이 선종(禪宗)이다.
선종은 7세기경 중국에서 형성되었다.
본래 선(禪)의 발생지는 인도이다.
선은 불교수행의 중요한 수행법의 하나이지만 불교 발생 이전부터 인도에 있었다.
인도는 환경적인 요인때문에 고대부터 명상법이 발달하였다.
한낮의 지독한 더위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숲 속의 나무 그늘에 앉아 명상을 하게 되었다.
명상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자 이들은 명상을 통해
우주와 인생의 근본 문제까지도 사색하게 되었다.
고타마 붓다도 당시 다양한 수행법을 다 경험해 보았지만,
그것으로는 생사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 마침내 정각을 깨친 것이다.
중국에서 선의 기원은 남북조시대에 보리 달마(Bodhidharma, 6세기 초 생존)가
인도에서 동쪽으로 와서 선을 전래한 것이다.
달마는 인도의 남천축국 향지왕의 왕자로,
출가하여 부처님 법을 이어 27대조가 되었는데
‘중국에 가서 크게 법을 펴도록 하라’는 스승의 지시로 중국으로 왔다.
당시 인도의 고승이 중국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은 양나라 무제는
궁으로 달마를 초빙하여 문답을 나누었다.
무제가 달마에게 물었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 수많은 절을 짓고 스님이 되고자 원하는 이들을 도왔으며,
경전을 간행하거나 복사하는 일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하였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어찌 아무 공덕이 없습니까?”
“그러한 일들은 모두가 다만 중생세계에서의 조금 나은 결과를 얻어서,
생사에 윤회하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마치 모양을 따르는 그림자가 비록 있기는 하나 실체가 아닌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입니까?”
“청정하고 원만하게 밝은 지혜를 얻는 공덕이 참된 것이나,
이것은 세속의 공덕으로는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제가 다시 물었다.
“불법의 가장 거룩한 근본 의의는 무엇입니까?”
“근본 자체가 공적(空寂)하여 거룩한 것까지도 없습니다.”
“그러면 나를 대면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릅니다.”
양 무제는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
달마는 선의 오묘한 뜻을 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판단하고
북쪽 낙양의 숭산 소림굴로 들어가 9년 동안 면벽 수도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 무렵 선종 2조가 되는 혜가가 소림굴을 찾아 문답하던 중
깨치고 법을 이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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