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역사 - 제2절 중국불교 - 2. 불교의 전래 (2)

문성식 2016. 11. 26.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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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역사】
      제2절 중국불교 2. 불교의 전래 (2)
        한편, 정치적 상황은 극적으로 전개되어 갔다. 몇 십년 동안 지속된 혼돈과 내란으로 서기 220년 한나라는 결국 멸망하였다. 이어서 약 50년 동안 세 지역을 각각 거점으로 하여 경쟁하고 있던 정치권력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를 삼국시대라 한다. 서진(西晋, 265~316년)에 의해 중국은 재통일되었지만, 이 기간은 짧았고 불안정했다. 하지만 불교의 입장에서 이러한 상황은 다행이었다. 정치적 다중심주의가 불교의 전파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한나라시대의 불교는 중국의 북부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이제 불교는 다른 지역으로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오늘날 남경(南京), 소주(蘇州), 항주(杭州)를 잇는 양자강 하류의 비옥하고 인구가 조밀한 삼각지까지 퍼져 나갔다. 북부에서의 불교 전파와 사원 건립은 주로 다르마라크샤(Dharmaraksa, 竺法蘭)의 활약 덕분이었다. 위대한 번역가요, 전법사인 그는 돈황에서 온 중국화 된 인도 스키타이인 이었는데, 제자들의 도움으로 3세기 후반에 대규모로 대중을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 시대에는 이제까지 언급해 온 지리적 특수화의 전형적인 양상이 등장함을 엿볼 수 있다. 즉 북부와 남부의 대조적인 양상이다. 황하를 젖줄로 하여 고대로부터 중국문명의 중심지가 된 북부는 평원과 황토에 자리 잡고 나름대로의 불교유형을 형성하였다. 남부 역시 양자강의 중류와 하류를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발전하여 독자적인 불교유형을 형성하였다. 특히 남부는 3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처음으로 개발의 국면에 들어선 광대한 지역으로, 중국의 역사에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풍부한 유산을 창출하는 역할을 하였다. 북부에서 불교는 중앙아시아와 그 너머의 지역으로부터 밀려온 신선한 충격에 의해 계속 양분과 자극을 받고 있었다. 대륙을 곧게 뚫은 통로를 따라 동쪽으로 확장하면서 불교의 주요 공동체들이 성장하였다. 서쪽으로 돈황(敦煌)으로부터 동쪽의 낙양과 산동(山東)을 잇는 것이 그 주요 통로였다. 온갖 정치적 소요에도 불구하고 무역과 교통은 지속되었고, 북부의 대도시들이 외국 상인들의 중요한 거점을 구축하였다. 260년경, 불교의 경전을 구하고자 서역으로 가는 중국인 순례자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는 사실 역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러한 여행의 선구자는 코탄으로 갔던 주자행(朱子行)이었다. 그는 후대에 5세기의 법현(法顯)이나 7세기의 현장(玄斡)과 같은 뛰어난 순례자들이 훨씬 더 광대한 탐험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번역활동이 대규모로 추진되었던 곳도 역시 북부였다. 다르마라크샤는 혼자서 약 150여 종의 한역경전을 완성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의 일부는 대승의 가장 중요한 고전이다. 무엇보다도 중대한 사실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최초로 완역된 일이다. 법화경은 모든 신자에게 성불의 길을 개방한 ‘일불승(一佛乘)’의 교의를 담고서 붓다의 영원성과 전지성을 강조하며 상징과 비유를 매우 풍부하게 싣고 있는데, 이는 곧 중국불교에서 단연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공경 받는 경전이 되었다. 다른 모든 대승의 교의를 초월한다고 주장하는 특별한 계시로서 그것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6세기에 성립된 천태종(天台宗)에서 최종적으로 표명되었다.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을 법(法)의 궁극적인 성취라고 간주하여, 그들의 오시(五時) 교판 중 진리의 가장 완성된 위치인 다섯 번째에 두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북부에서 승려들의 공동체가 성장하였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증거는 3세기 중엽에 계율의 논서에 대한 한역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히 그 시기에 이르러서는 사원생활을 위해 보다 더 신빙성이 있고 세세한 규율의 규범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양자강 하류지역에서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거기에는 중앙아시아와 접촉한 징후가 전혀 없고, 사원 중심의 불교에 대한 강조가 훨씬 약하다. 실제 남부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번역가로서 지겸(支謙)은 중국에 귀화한 인도 스키타이 출신의 재가 신도였다. 그가 완성한 많은 문헌들은 정확성보다는 문학적 우아함과 가독성(可讀性)을 추구한 세련된 번역이었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중국불교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두 경전을 고르자면, 바로 아미타경과 유마경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미타바(Amita-bha)라고 하는 아미타는 서방의 극락에 있다고 하는 자비의 부처이다. 후대 중국에서는 이 서방의 극락을 정토(淨土)라고 하며, 성심성의를 다하여 아미타를 염원하고 그 성스러운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는 모든 신자들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재가 신도에게 각별한 호소력을 지닌 또 다른 근본 경전은 유마경이었다. 이는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걸작으로서, 너무나 대중화되어 일곱 차례나 한역되었다. 이 경전에서의 중심인물은 신심이 돈독하고 부유한 재가 신도이다. 그는 초월의 경지요, 공(空)인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보는 깊은 통찰력 때문에 일련의 형이상학적 논쟁에서 가장 뛰어난 성자들까지도 이길 수 있었다. 4세기부터 이 경전은 교양 있는 속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매력을 끌었던 점은 이 경전에 나타난 주인공의 성격과 신분이었고 철학적 논쟁의 깊이와 높은 문학적 기품이었다. 북부와 남부의 불교 사이에 나타나는 대조는 남부의 불교가 제국의 최남단과 접촉한 데에서 기인한다. 이 최남단은 오늘날의 베트남에 속하는 하노이이다. 베트남의 북방지역은 기원전 111년에 한나라에 편입되었다. 이로부터 약 1,000년 동안 이 지역은 중국인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과 베트남인으로 혼성된 귀족지식층이 등장하였고, 철저히 중국화 되어 갔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 이 지역은 이론적으로는 그 최남단에 위치한 제후국이었지만, 중세 초기에 이르러 중국인 통치자는 멀리 떨어진 수도로부터 실질상의 독립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인 이주자들의 끊임없는 유입으로 중국화의 과정은 촉진되었는데, 이들은 중국 본토에 소요가 계속되던 시기에 새로운 길을 찾아 조용하고 반식민지인 이 지역으로 몰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인이 거주한 중국 영토는 오늘날의 다낭 너머로까지는 확장되지 않았다. 현재의 베트남의 남반부에서는 인도화 된 두 개의 국가가 흥기하였다. 하나는 푸난 왕국이었는데, 이는 메콩 강의 삼각주와 오늘날 캄푸치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다른 하나는 참파 왕국으로 인도차이나의 남동지역을 지배했다. 이처럼 베트남에서 메콩 강의 분지는 중국문명과 인도문명의 중심지가 접하는 중간 지역이었다. 중국불교 초기의 것으로서 가장 흥미 있는 문서들 중의 하나가 발견된 것도 이 지역에서였다. 달리 자세한 인적 사항은 전해지지 않고 단지 어떤 스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쓴 논서인데, 여기서 그는 전통을 고수하는 반대자의 공격에 대해 불교를 방어한다. 이 책은 유교권에 있었던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과 그렇게 상투적인 반불교적 주장들이 완강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교권의 완강한 태도는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쏟아진 많은 양의 반박서와 변론서를 통해서 계속 반복된다. 반불교적 논쟁은 주로 승려직에 대한 반대로, 사원제도를 고수하는 불교의 성격과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불교의 종교적 믿음을 공격하기도 하는데, 불교는 극락과 지옥을 보답으로 약속함으로써 순박한 대중을 미신으로 이끌고 호도하는 ‘이단’이라고 낙인을 찍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그러한 교의적 배려는 드문 경우에만 주요한 역할을 해왔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와 유교 사이의 쟁론을 담은 논서는 앞에서 설명한 근본적인 긴장을 반영한다. 불교의 성직에 대한 견해와 관심, 그리고 속세의 권위에 대한 견해와 관심의 양자 사이에 빚어진 이념적 대립이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승려에 대해 반대하는 논쟁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윤리적ㆍ공리적ㆍ정치, 경제적 측면이다. 윤리적 주장은 사원생활이 가정의 의무를 거부함으로써 사회적 행위라는 신성한 규범을 부자연스럽게 위반하는 것이라는 점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공리적 견지에서는 승려의 생활이 비생산적이며 공동체에 무익하다고 비난하며, 평민들이 저마다 밭을 일구지 않고 천을 짜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릴 것이라고 한다. 끝으로 자치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교단의 주장은 정치적으로 용납할 수 없으며, 또 사원은 범죄를 저지른 반사회적 분자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한편 승려들의 재정적 특권과 재산은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침식했다고 주장한다. 교단의 존립권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그들의 이러한 비난은 근본적이고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불교 측에서는 승려든지 속인이든지 이에 대해 대응책을 강구하고 반박을 제기할 절박한 필요성을 느꼈다. 이 경우 윤리적 문제가 가장 곤란한 점이었을 것이다. 승려는 교단에 합류함으로써 자기 가족과 완전히 끈을 끊을 수밖에 없어, 중국인의 전통적 윤리 중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위배된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의 옹호자들은 ‘궁극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음’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불교나 유교나 모두 인간의 완성을 추구하며, 교단에 집적된 무한한 공덕은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될 것이고, 따라서 도덕과 질서의 유지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공리적 입장의 공격에 대해서도 사원생활은 정신적 해탈이 속세의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코 무익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 자신도 ‘사람은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덕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반박했다. 끝으로 정치ㆍ경제적 책임에 대해서 승려들은 속세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더라도 법에 어긋남이 없이 충실하게 살아가며, 기본적으로 교단은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는 통치자를 지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때때로 구성원 중 일부에 의해 권력과 부가 남용되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전체 교단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