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제2절 불교의 핵심교리
6. 생활속의 연기법 수행
연기법 수행 ④ - 분별심과 집착을 놓아버린 자유로운 생활
육근과 육경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만들어낸 ‘나’에는
온갖 종류의 욕망과 집착, 그리고 생각과 앎의 거품이 가득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라는 존재는 연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눈으로 물질인 색을 보는데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좋다, 나쁘다 분별을 하며 마음이 대상에 머물게 된다.
대상을 붙잡고 ‘나’, ‘나의 것’이라는 집착을 일으킨다.
일상의 삶을 잘 살펴보면 항상 ‘좋다-싫다’, ‘아름답다-추하다’,
‘나의 것이다-너의 것이다’ 등 분별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이 분별심은 집착을 낳는다.
집착은 항상 탐착과 혐오라는 두 가지 양상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탐착은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은 강하게 끌어들이는 심리 에너지이고
혐오는 자신에게 해롭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거부하고 밀쳐내는 심리 에너지이다.
이런 심리적 에너지가 우리들의 삶 전체에 점철되어 있어,
이 에너지의 강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는 상태에서는
그 누구도 고통과 번민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
좋은 대상에 대해서 사랑을 하고 미운 대상에 대해서는 다툼을 일으킨다.
하지만 대상은 늘 허망하기 때문에
잠시 인연 따라 좋고 싫게 나타날 뿐이지
좋고 싫은 대상이 항상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기쁨과 슬픔이 연이어 교차하며 흐르는 것이다.
이처럼 애착과 혐오, 사랑과 증오, 쾌락과 고통, 칭찬과 비난, 성공과 실패, 이익과 손해,
건강과 질병, 심지어 삶과 죽음까지도 매 순간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바로 생멸하는 연기적 현상을 애써 붙잡지 않고 놓아버리면,
시계추의 진동처럼 애착의 힘에서 혐오의 힘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제자리를 찾는다.
삶은 마치 좌우로 흔들리는 추와 같다.
추 스스로 중심을 찾게 가만히 놓아둔다.
억지로 그 추의 중심을 찾으려고 붙잡는 순간 추는 중심을 떠나버린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이다.
물 흐르듯 가만히 두면 되는데 좋으면 강하게 끌어들여 집착하고,
싫으면 무조건 거부하고 밀쳐내어
고통과 번민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된다.
자유와 해탈의 삶은 저 멀리 사후 열반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어떤 상황에도 머무르거나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리면
‘지금 여기’에 바로 지고한 행복의 삶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법 수행의 핵심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생활 속에서 연기법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편의상 4가지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한마디로 줄여서 말하면,
연기법 수행의 목적은 우리의 의식 속에 깊게 뿌리내린
‘자아’라는 강한 철옹벽을 녹여 없애는 데 있으며,
자아중심의 분별심에서 생긴 좋고 싫음의 두 극단을 지양하여
지혜의 발현과 자비의 실천을 꾀하는 데 있는 것이다.
연기법 수행은 기법이나 테크닉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불교수행 테크닉에도 적용되어야 할 가장 원초적인 원리이다.
비록 여러 가지 수행법들의 언어의 표현과 구체적인 행법들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다 할지라도,
이들 수행법 속에서 일관성 있게 흐르고 있는 이론적 토대는 연기법이다.
즉 연기법은
어떤 형태의 불교전통에서도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수행 원리이다.
이 원리의 특징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행복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소멸되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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