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3.jpg 광산김씨예안파종가(光山金氏禮安派宗家)에는 고문서(古文書) 이외에 전적(典籍) 약 3,000책(冊)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 중 서첩(書帖)을 포함한 13종(種) 61점(點)이 지정(指定)되었다. 이들 전적(典籍)들은 조선조에 간행된 것으로 역사적 사료(史料)로서 가치가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서전(書傳)은 칠서(七書) 중(中)의 하나이며 유학자(儒學者)의 필독서(必讀書)로 많이 읽히는 책이다.

내용(內容)은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商書), 주서(周書)이고 노(魯)나라 주공(周公)에 관한 기록이 중심이 되어 있으며 유학자의 손에 의해 첨가되어 온 것으로 전한다.

송조명신언행록(宋朝名臣言行錄)은 청도군수(淸道郡守) 대구진관병마절제사(大邱鎭管兵馬節制使) 이윤(李胤)이 주선(周旋)하여 청도군(淸道郡)에서 개간(開刊)한 것이다. 이윤(李胤)의「서송조명신언행록후(書宋朝名臣言行錄後)」에 의(依)하면 본서(本書)는 우인(友人) 최자직(崔子直)이 오산(鰲山)에 군수(郡守)로 부임(赴任)한 여가(餘暇)에 독서(讀書)한 것으로 원래(原來) 판본(板本)이 없어 감사(監司)인 김응기(金應箕)가 열읍(列邑)에 분간(分刊) 침재(침梓)케 하였으며 후임감사(後任監司) 송윤덕(宋潤德)이 그의 뒤를 이어 판각(板刻)을 감독 완성(完成)케 하여 청도군(淸道郡)에서 개간(開刊)한 것이다.

완질(完秩)이 아니고 17책(冊)만이 현존(現存)되어 있다.

책말(冊末)에 김보형(金保衡), 김세기(金世紀), 김세형(金世衡), 공장(貢庄) 김석진(金席珍), 교정(校正) 생원(生員) 성준달(成濬達), 행군수(行郡守) 중직대부(中直大夫) 이윤(李胤), 도사(都事) 승훈랑(承訓郞) 방유령(方有寧), 행관찰사(行觀察使) 자헌대부겸병마수군절도사(資憲大夫兼兵馬水軍節度使), 김응기(金應箕) 등 본서(本書)의 인출(印出)에 참여(參與)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매월당집(梅月堂集) 총(總) 11책중(冊中)에 권 12∼13, 한책만이 결본(缺本)이고 현존본(現存本) 10책이다.

문집(文集)에 앞서 서두(序頭)에 이자(李자)의 정덕신사(正德辛巳)(1521, 중종(中宗)16)년 서문(序文)과 이산해(李山海)의 만력(萬曆) 11년(1583, 선조(宣祖)16) 서문(序文) 두편, 윤춘년(尹春年)의 매월당전(梅月堂傳)과 이이(李珥)의 김시습전(金時習傳) 두 편이 게재(揭載)되어 있다.

이자의 서문중(序文中)에 …「10여년동안 찾아 모아서 겨우 3권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손수 편찬 기록한 것으로 필적이 옛스럽고 담담하며 정돈되어 흘려쓴 글씨가 고르고 분명(分明)하여 후세(後世)에 전(傳)하려는 뜻이 있는 것 같다」하였으며 또한 「기(其) 중(中) 한 권은 한치쯤 되는 헌 종이쪽과 떨어진 간찰속에서 찾아내어 이 부분을 도려내고 잘 쓰는 사람을 시켜 베끼게 하고 한편 전하여 들은 것은 내가 손수 기록하여 약간(若干)편을 얻었다」라고 술회(述懷)하고 있어 이자 자신(自身)이 구전(口傳)해 오는 매월당(梅月堂)의 글을 직접 기록(記錄)한 것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력임오(萬曆壬午) 이산해(李山海)의 서문(序文)에는 「당시(當時) 대제학(大提學)인 이이(李珥)에게 선조(宣祖)께서 전기(傳記)를 편찬하여 올리도록 명(命)했으며 한편 운각(芸閣)에 명령하여 유고(遺稿)를 인출(印出)토록 지시(指示)하였다」고 했으며 다음해 만력(萬曆) 11년(1583, 선조(宣祖)16) 이산해(李山海)에게 서문(序文)을 쓸 것을 명(命)하시니 「윤춘년(尹春年)이 편집한 시문(詩文)을 얻어 세번 읽어보고 그윽히 슬퍼하였다」고 당시(當時)를 서술하고 있다.

이이(李珥)의 김시습전(金時習傳) 중에도 「그의 저술(著述)한 시문(詩文)이 흩어져 없어지고 이자, 박상(朴祥), 윤춘년(尹春年) 등 제씨(諸氏)가 선후(先後)하여 그의 유고(遺藁)를 모아서 인출(印出)한 것 매월당집(梅月堂集)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집되어 인출(印出)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점필재집(점畢齋集)은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집(文集)이다. 완질본(完秩本)이며 내용은 절구(絶句), 율시(律詩), 고시(古詩), 부(賦), 낙부(樂府), 책문(冊文), 제문서서(祭文書序), 설(說), 발(跋), 기(記), 명(銘) 등이 수록(收錄)되어 있다.

본(本) 문집에는「선상공가장서(先相公家藏書)」·「남부의근추기(男富儀謹追記)」의 두개(個) 소장인(所藏印)이 찍혀 있다. 부의(富儀)는 퇴계(退溪)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부친(父親)의 수택본(手澤本)을 이어 받아 소장(所藏)하며 이용(利用)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대명감(歷代明鑑)은 연산군(燕山君)5년 기미(己未)(1499) 당시(當時) 중추부사(中樞府事)인 홍귀달(洪貴達)(1439∼1504)이 병조참판(兵曹參判) 권건(權健)(1457∼1501) 성현(成俔)(1439∼1504) 등 당대(當代) 명신(名臣)에게 명(命)하여 옛날 군신(君臣) 후비(后妃)의 규범(規範)이 될 행적(行蹟) 등을 뽑아 후세(後世)에 규계(規戒)로 삼기 위해 찬집(纂輯)케 한 것이다.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子)로 인출(印出)한 것으로 1책(冊)이 결(缺)되어 있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은 송(宋)나라 주희(朱熹)의 저술(著述)이다.

본서(本書)는 다만 목록(目錄)과 권(卷) 49∼50, 2책(冊)만이 있을 뿐이다. 간행년대(刊行年代)는 성암고서박물관소장본(誠庵古書博物館所藏本)에 의거(依據)하였다.

논어집주(論語集註)는 주희(朱熹)가 집주(集註)한 것이며 재주갑인자본(再鑄甲寅字本)으로 인출(印出)된 19권(卷) 3책(冊)의 완질본(完秩本)이다. 앞부분의 집주서설(集註序說)은 세종(世宗) 18년 주조(鑄造)의 병진자(丙辰字)를 모방하여 만든 방병진목활자(倣丙辰木活字)로 인쇄(印刷)한 것이다.

주자실기(朱子實記)는 11권(卷) 5책(冊) 완질본(完秩本)이다.

책(冊)마다 김부필(金富弼)(중종(中宗)11년, 1516∼선조(宣祖)10년, 1577)의 이름, 자(字), 호(號) 등 소장자(所藏者)의 도장이 찍혀 있다.

중종(中宗)∼명종년간(明宗年間)의 간본(刊本)으로 추정된다.

징비록(懲毖錄)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저술(著述)한 것이다.

선조(宣祖)25년에서 31년까지 7년간의 기사(記事)로 저자(著者)가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한거(閑居)할 때 저술(著述)한 것이다.

징비(懲毖)란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 중에 「미리 징계해서 우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딴 뜻으로 후인(後人)들에게 경계하기 위해 기술한 것이다. 목활자본(木活字本)인 본서(本書)는 임진란이후(壬辰亂以後)에 인출(印出)한 것으로 초간본(初刊本)인 듯하다. 영본(零本)으로 권(卷) 2, 5의 두 책만이 전래된 것이다. 이와 동일(同一)한 목활자본(木活字本) 1권(卷) 1책(冊)은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근사록(近思錄)은 송(宋)나라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공저(共著)한 책으로 성학입문지서(聖學入門之書)로 이론(理論)이 정연하고 깊이있는 저술(著述)이며 유학(儒學)하는 사람들의 필독서(必讀書)이다.

권(卷) 3∼5 1책(冊)만이 전래되고 전(前) 후책(後冊)은 모두 결본(缺本)이다.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에 이와 동일한 활자본(活字本) 권(卷) 1∼2, 1책(冊)이 소장(所藏)되어 있다.

표지(表紙)에 퇴도선생유묵(退陶先生遺墨)이라는 제목(題目)을 달고 오른편에 다시 「선조묘갈명(先朝墓碣銘)」이라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이 서첩(書帖)은 광산김씨(光山金氏) 김효로(金孝盧)의 묘갈명(墓碣銘)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글을 짓고 손수 필사(筆寫)한 것이다.

8장(張) 17면(面)인 본(本) 묘갈명(墓碣銘)은 일면(一面)에 4행(行) 10자(字)로 세로 11.5㎝, 가로 23.5㎝가 되며 상하좌우(上下左右)로 선(線)을 긋고 그 안에 글자를 써 넣고 있어 묘갈명(墓碣銘)의 장수(張數)와 규격(規格)을 알 수 있게 한다.

김효로(金孝盧)의 손자(孫子)인 부필(富弼), 부의(富儀) 등이 모두 퇴계(退溪)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했으며, 본시 양가친분(兩家親分)이 두터운 사이로 퇴계(退溪)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의뢰(依賴)한 것으로 보인다.

퇴계선생서법(退溪先生書法)은 퇴계선생서(退溪先生書)라 표지(表紙)에 쓰여 있으며 자수(字數)는 총(總) 60자(字)가 된다.

60자(字)는 일면(一面)에 이자(二字)씩 배정(配定)하여 30면(面)에 필사(筆寫)하고 끝에 「소강절(邵康節)」이란 저자(著者)의 이름이 쓰여 있다. 60자(字)가 한 자(字)도 중복이 없다. 퇴계선생서법(退溪先生書法)이라 쓰여있는 것으로 보아 법첩(法帖)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소강절(邵康節)은 송(宋)나라의 저명(著名)한 학자로 이름을 소옹(邵雍)이라 하고 자(字)는 요부(堯夫), 시호(諡號)는 강절(康節)이다.

별시첩(別詩帖)은 김연(金緣) 자유(子由)가 영천군수(榮川郡守)로 부임(赴任)할 때 동료(同寮) 및 선(先) ·후배(後輩) 제시(諸氏)의 봉별시첩(奉別詩帖)이다.

김연(金緣)은 자(字)를 자유(子由), 호(號)를 운암(雲巖)이라 한다. 성종(成宗)18년 정미(丁未)(1487) 2월 25일생(日生)이다.

중종(中宗)5년(1510) 생(生)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입격(入格)하고 중종(中宗)14년(1519)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중종(中宗) 33년(1538) 중시(重試)에 급제했다.

부정(副正)을 비롯하여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추방을 강경히 주장했으며 그후 심언광(沈彦光), 채무택(蔡無擇) 등에 의해 축출된 김안로(金安老)를 다시 기용(起用)하려하자 지평(持平)의 직(職)에서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이를 또 거부하였는데 다시 권세(權勢)를 잡은 뒤 그에 의해 경성(鏡城) 판관(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중종(中宗)32년(1537)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되자 사간(司諫)으로 기용되고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역임했다.

중종(中宗)39년(1544) 9월 23일 임소(任所)인 경주부윤(慶州府尹) 사택(舍宅)에서 향년(享年) 58세(歲)로 생(生)을 마쳤다.

묘소(墓所)는 안동군(安東郡) 와룡면(臥龍面) 서현동(西峴洞)(거인(居仁)) 김학산(金鶴山) 곤좌(坤坐)이다.

익찬(翊贊)인 박성(朴惺)이 지문(誌文)을 찬(撰)했다. 그 후 영조시(英祖時) 영상(領相)인 채제공(蔡濟恭)이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찬(撰)했다.

배(配) 정부인(貞夫人)은 창녕조씨(昌寧曺氏)로 동원(同原)에 합폄(合폄)되어 있다.

그의 문집(文集) 운암선생유고(雲巖先生遺稿)는 2권(卷) 1책(冊)으로 성편(成編) 정조(正祖)7년(1783) 목판(木板)으로 간행(刊行)되었다. 서문(序文)은 신도비(神道碑)를 찬(撰)한 채제공(蔡濟恭)이 서술(敍述)하고 정범조(丁範祖)가 발문(跋文)을 썼다.

본 (本) 별시첩(別詩帖)은 그가 노모(老母)의 봉양(奉養)을 위해 서울에서 관직을 사임(辭任)하고 귀향(歸鄕)할 것을 아뢰자 상(上)께서 그의 효성(孝誠)을 갸륵하게 여기시고 향리(鄕里) 근처(近處)인 영천(榮川)의 군수(郡守)로 임명(任命)하였다. 이 시첩(詩帖)은 당시(當時) 그를 전별하는 동료(同僚) 선(先) ·후배(後輩) 제씨(諸氏)들이 그에게 보낸 별시(別詩)를 한데 묶어 일첩(一帖)으로 엮어 놓은 것이다.

이에 관한 사실은 박성(朴惺)이 찬(撰)한 그의 묘지명(墓誌銘) 가운데

「…중묘론근신왈(中廟論近臣曰) 시종지인(侍從之人) 다출외임(多出外任) 하여(何歟), 대왈(對曰), 혹위양걸외고(或爲養乞外古) 연개지공야(然盖指公也), 이성거향원(以星距鄕遠) 불편양(不便養) 상장걸환근읍(上章乞換近邑), 회등탁영시(會登擢英試) 폐통정(陛通政) 환영천군(換榮川郡) 위모부인설경연(爲母夫人設慶宴) 공사자부필(公嗣子富弼) 적중사마(適中司馬) 부자동경(父子同慶) 이위열언(以慰悅焉) 주리함차탄왈(州里咸嗟嘆曰) 세소우유(世所우有)…」라 하였으며 왕조실록(王朝實錄) 중종(中宗) 19년 갑신(甲申)(1524)십이월조(十二月條)에도

「정언금연(正言金緣), 이친로(以親老) 청귀양(請歸養) 명차근읍(命差近邑) 수령(守令)…」

이라 서술되고 있다. 그밖에 다른 문헌(文獻)에도 당시(當時) 사실에 대해

「성상(聖上) 허수영천군재(許授榮川郡宰), 군어현(郡於縣) 재이식정(재二息程) 차내희세지이수야(此乃稀世之異數也)」라 하였다.

이처럼 당시의 사실에 대해 여러 문헌(文獻)에서 기술(記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별시첩(別詩帖)에는

조광조(趙光祖), 성세창(成世昌), 이자, 심봉원(沈逢源), 나세찬(羅世纘), 성수종(成守琮), 이장곤(李長坤), 송린수(宋麟壽), 엄흔(嚴昕), 정응두(丁應斗), 김종윤(金宗胤) 등 제씨(諸氏)의 글이 실려있다.

본(本) 별시중(別詩中)에는 거의 본인(本人)이 자필(自筆)한 것이나 그중 몇편은 후세(後世)에 필사(筆寫)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