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보물 제100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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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남 양산시 |
소재지 | |
지정일 | 1989.05.23 |
수량/면적 | 일괄6종16점 |
시대 | |
소유자 | 이근수 |
관리자 | 이근수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문서(文書) 거의가 조선조 초창기(草創期)의 것으로 양산이씨(梁山李氏)의 시조(始祖)가 되는 이전생(李全生)을 비롯하여 그의 장남(長男) 이징석(李澄石) 그리고 징석(澄石)의 장남(長男) 팔동(八仝) 그리고 사대후손(四大後孫)인 몽란(夢鸞)등 전생(全生)의 직계(直系) 장남(長男) 장손(長孫)의 문서(文書)가 주(主)가 되고 있다.
징석(澄石)은 선초(鮮初)에 이름있는 명장(名將)으로 동생에는 징옥(澄玉) 징규(澄圭) 둘이 있다. 동생 징옥(澄玉) 또한 이름있는 장수로 처음 부거(富居)의 책(柵)을 지키며 여러번 전공(戰功)을 세우고 김종서(金宗瑞)의 뒤를 이어 6진(鎭)의 설치(設置)에 공(功)을 세웠다. 그후 정변(政變)을 눈치채고 야인(野人)에게 격문을 돌려 스스로 대김황제(大金皇帝)라 칭하였다. 징옥(澄玉)의 난(亂)은 역사상 유명하다. 막내 동생 징규(澄圭) 또한 무인(武人)으로 삼형제(三兄弟)가 다같이 선초(鮮初)에 무훈(武勳)을 세운 사람이다.
징석(澄石)의 부친(父親)인 전생(全生)의 홍무년간(洪武年間) 왕지(王旨) 1점을 위시하여 징석(澄石)의 왕지(王旨) 4점, 유서(諭書) 1점, 세종(世宗)이 하사(下賜)한 사패교지(賜牌敎旨) 3점, 세조(世祖)의 사제문(賜祭文) 등 징석(澄石)에 관련된 문서(文書)가 9점이 있다. 그리고 징석(澄石)의 장남(長男) 팔동(八仝)의 교지(敎旨) 1점과 징석(澄石)의 직계(直系) 사대후손(四代後孫)인 이몽난(李夢鸞)의 병조(兵曹) 발급(發給) 사령서(辭令書) 3점(點)과 무과급제교지(武科及第敎旨) 1건(件) 그리고 임란전쟁이후(壬亂戰爭以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된 녹권(錄券) 1책(冊)등 5점 등이 된다. 이제까지 문중(門中)에서 발견된 왕지(王旨)로는 성주도씨문중(星州都氏門中)에 소장된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에게 태조(太祖)가 발급(發給)한 왕지(王旨) 4건(件)과 녹패(祿牌) 1건(件)등 모두 홍무년간(洪武年間) 발급(發給)으로 연대(年代)가 오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씨문중(李氏門中) 소장(所藏) 고문서(古文書)는 연대(年代)가 그보다 다소 뒤지긴 하지만 왕지(王旨) 유서(諭書) 사제문(賜祭文) 사패교지(賜牌敎旨) 등 선초(鮮初)의 각종(各種) 문서(文書)가 골고루 갖추어져 있어 우리나라 선초(鮮初) 고문서(古文書)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전생(李全生)은 고려조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했다. 공민왕(恭愍王)20년 신해(辛亥)(1371)에 순찰사(巡察使)로 경남지방(慶南地方)을 순시(巡視)했다. 양주(良州) 북면(北面) 초산리(草山里)에 거처(居處)를 정하고 그곳에 정착(定着)하여 살게되니 지금의 양산군(梁山郡) 하북면(下北面) 삼수리(三帥里)가 된다. 양산이씨(梁山李氏)의 비조(鼻祖)가 되는 분이다.
조선조 태조(太祖)7년(1398) 가선대부공조전서(嘉善大夫工曹典書)에 임명(任命)되었으며 예조판서지중추부사(禮曹判書知中樞府事)를 역임(歷任)했다.
후에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부친(父親)인 만영(萬英)은 여조(麗朝)에 문과(文科)를 거쳤으며 본조(本朝)에 들어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보조공신(輔祚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인천군(仁川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본(本) 왕지(王旨)는 바로 홍무삼십일년(洪武三十一年)(1398) 구월(九月) 태조(太祖)로부터 가선대부공조전서(嘉善大夫工曹典書)로 임명(任命)받은 사령서(辭令書)가 된다. 이씨가(李氏家)에 소장된 문서중(文書中)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묘소(墓所)는 영산군(靈山郡) 장가동(丈加洞)에 있다. 부인(夫人) 정경부인(貞敬夫人) 밀성박씨(密成朴氏)와 동원(同原)에 묘역이 있다.
부친(父親) 만영(萬英)의 묘도 동원(同原)에 있으며 묘역(墓域)이 상당히 크다. 그 지방사람들은 그들 묘를 왕릉이라 부른다고 했다. 묘표는 최근에 종중(宗中)에서 세워놓고 주변에는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를 잘린 문무석상(文武石像)만이 뒹굴고 있었다. 아들 징옥(澄玉)의 난(亂)에 수난(受難)을 당한 듯하다.
이징석(李澄石)의 호(號)는 취봉(鷲峯)이다. 공민왕(恭愍王)22년 계축(癸丑)(1373)생(生)이다. 태조조(太祖朝)에 무과(武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관(官)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고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고 양산군(梁山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태종(太宗) 시(時) 보양장군호분시위사대호군자(保陽將軍虎賁侍衛司大護軍者)가 되었으며 선덕팔년(宣德八年)에 가정대부동지중추원사자(嘉靖大夫同知中樞院事者)가 되었다. 세종(世宗)때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파저강(婆猪江)에 침입(侵入)한 북로(北虜)를 평정(平征)하여 혁혁한 공(功)을 세웠다.
징석(澄石)은 징옥(澄玉)의 형(兄)이다. 선초(鮮初)의 명장(名將)으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하며, 동생 징규(澄圭)와 함께 삼형제(三兄弟) 모두 무인(武人)으로 이름높다. 지금 종중(宗中)에는 징석(澄石)의 문서(文書)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데 왕지(王旨) 5건(件) 그리고 세조(世祖)가 내린 사제문(賜祭文) 유서(諭書) 등이 있다. 세조조(世祖朝)에서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양산군(梁山君)에 봉군(封君)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장강(莊剛)이라 하였다. 양산(梁山)에는 그에 대(對)한 일화(逸話)가 많다. 활의 명수(名手)로 화살을 쏘면 말은 화살을 쫓아 달렸는데 말이 멈추는 곳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하루는 징석(澄石)이 화살을 쏘았고 화살을 쫓아 말은 달렸는데 말이 멈춘 곳에 박혀 있어야 할 화살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성질이 다급한 징석(澄石)은 가지고 다니던 칼을 뽑아 말의 목을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화살이 날아와 그 자리에 박혔다고 한다. 말이 화살보다 앞서 온 것이다. 그후부터 징석(澄石)은 자신의 다급하고 경솔한 마음을 후회하고 달랬다고 하는데 지금 양산(梁山)에 전해오는 전설같은 이야기다. 바로 말이 쓰러진 그 자리에 지금 다리가 있는데 말의 목을 자른 곳이라 하여 다리 이름을 도마교(倒馬橋)라 부르고 있다. 양산(梁山)에 그의 묘(墓)가 있다. 묘(墓) 앞에 말 무덤이 있다. 묘역(墓域)이 상당히 크다. 다만 상석(床石)과 석상(石像)만이 남아 옛날을 말해주고 묘표(墓表)는 최근(最近)에 종중(宗中)에서 세웠다고 한다. 문무석상(文武石像)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묘비(墓碑)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推測)된다. 동생 징옥(澄玉)의 난(亂)으로 수난(受難)을 당한 듯하다.
최근 종중(宗中)에서 마총(馬塚)을 파 보았다. 총중(塚中)에 숯이 수십가마 묻혀 있었다고 한다. 말 안장등 도구가 나오고 상자 안에 말의 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부식을 방지(防止)하기 위해 숯을 넣은 것이라 한다. 말 안장 상자 등은 옛 모습대로 다시 파묻어 놓았다고 한다. 주변에는 지금도 숯덩이가 여기 저기 뒹굴고 있다.
그리고 세종(世宗)13년에 왕(王)께서 하사(下賜)한 사패전장(賜牌田莊)도 남아 있고 옛날 그가 살았다는 집터가 지금은 축대만 남아있다. 묘(墓)는 양산군(梁山郡) 읍내면(邑內面) 명곡리(明谷里) 계좌(癸坐)에 위치한다.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은 김해허씨(金海許氏)로 부친(父親) 형(衡)은 자(字)를 중평(仲平)이라 하고 호(號)는 노재(魯齋)라 하며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삼형제(三兄弟)의 장수(將帥)를 배출한 곳이라 하여 그들이 출생(出生)한 마을 이름을 지금 삼수리(三帥里)라 부르고 있다.
이팔동(李八仝)의 자(字)는 차옹(次翁) 태종(太宗)14(1414) 갑오생(甲午生)이다. 취봉(鷲峯) 징석(澄石)의 아들이다. 위용장군행의흥위중부간사직겸선전관(威勇將軍行義興衛中部揀司直兼宣傳官) 및 행고성현령(行固城縣令)을 역임(歷任)했다. 성종(成宗) 10기해(己亥)(1479)에 졸(卒)하였다. 배(配) 숙부인(淑夫人)은 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판서(判書) 예조(예祖)의 따님이다. 묘(墓)는 명곡리(明谷里) 계좌합봉(癸坐合封)이다.
이몽란(李夢鸞)의 자(字)는 응소(應韶) 호(號)는 죽헌(竹軒)이라 한다. 중종(中宗)39년(1544) 갑진생(甲辰生)이다. 선조(宣祖)41년(1608) 무신(戊申)에 졸(卒)하였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훈련원(訓鍊院) 첨정(僉正)을 지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묘(墓)는 명곡리(明谷里) 자좌(子坐)에 위치(位置)하고 있으며 배(配) 숙인(淑人)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위원군수(渭源郡守) 효량(孝亮)의 따님이다.
교지
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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