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보물 제100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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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상주시 (상주박물관 보관) |
소재지 | |
지정일 | 1989.05.28 |
수량/면적 | 7책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조용중 |
관리자 | 상주박물관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조선 선조∼인조 때의 학자이며 관료인 조정(1555∼1636)이 임진왜란 당시에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손수 적은 일기이다. 조정은 김성일과 정구의 문인이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활동하였고, 선조 29년(1596)에 도체찰사였던 이원익의 막하로 들어가 활약하였다. 선조 36년(1599)에는 사마시에, 2년 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사헌부감찰, 대구판관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가 죽은 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이 책은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학자(學者)이며 문신(文臣)인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임란(壬亂) 당시에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적은 자필일기(自筆日記)와 문견록(聞見錄)으로 선조(宣祖)25년 임진(壬辰)(1592) 4월14일부터 동왕(同王)30년 정유(丁酉)(1597) 3월까지 약(約) 6년간(年間) 사실(事實)이 수록(收錄)되어 있다.
저자(著者) 조정(趙靖)은 자(字)는 안중(安仲), 호(號)는 검간(黔澗), 본관(本貫)은 풍양(豊壤), 광헌(光憲)의 아들, 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의 문인(門人). 선조(宣祖)25년(1592) 왜적이 침구하자 함창(咸昌) 황영사(黃嶺寺)에서 창의(倡義)하여 이봉(李逢)의 좌막(佐幕)이 되고, 뒤에 순찰사(巡察使) 김성일(金誠一),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 김용(金涌)등에게 찾아가 토적(討賊)에 관해 건의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창의장(倡義將) 이봉(李逢)의 대신으로 보은(報恩)에 가서 제의장(諸義將)과 의거(義擧)에 관해 정약(定約)하였다. 선조(宣祖)29년(年)(1596)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막하종사(幕下從事)로 활약하였고, 이듬해에 기원(基遠) ·영원(榮遠) 두 아들을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보내어 창의(倡義)하게 하였다. 선조 32년(1599)에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어 광흥창(廣興倉) ·군기시(軍器寺)의 주부(主簿) 등을 지냈다. 선조 36년(160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내고, 선조 38년(160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겸춘추기사관(兼春秋記事官)이 되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예조좌랑(禮曹佐郞) ·대구판관(大邱判官) ·경주교수(慶州敎授)를 지냈다. 이어 해남현감(海南縣監) ·공홍도도사(公洪道都事) ·청도군수(淸道郡守)등을 지내면서 치적이 있었다.
인조반정후(仁祖反正後)에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내고 이괄(李适)의 난(亂) 때에는 왕(王)을 공주(公州)로 호종(扈從)하였다. 1626년에 내섬시정(內贍寺正)을 지내고 이듬해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전직하였으며, 1632년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仁祖)20년(1642)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고 영조(英祖)6년(1730)에 상주(尙州)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추향(追享)되었다. 시문(詩文)을 모은 검간집(黔澗集)과 자필본(自筆本)인 임란일기(壬亂日記) 7책이 전한다.
이 초고(草稿) 일기(日記)는 총 7책인데, 임란일기(壬亂日記) 상(上)·하(下) 2책, 남행록(南行錄), 진사록(辰巳錄), 일기일부잡록(日記一附雜錄), 서행일기(西行日記), 각 1책 등 일기(日記) 6책과 문견록(聞見錄) 1책 도합(都合) 7책이다. 임란일기(壬亂日記)는 남행록(南行錄)과 중첩(重疊)된 것 (임진십이월이십오일(壬辰十二月二十五日) 이하(以下))도 있고 진사록(辰巳錄)과 중첩(重疊)된 것 임진십이월이십오일(壬辰十二月二十五日)도 있다. 이는 남행록초고(南行錄草稿)를 후일(後日)에 옮긴 것으로 추정(推定)되며 특히 진사록(辰巳錄)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명명(命名))은 반초(半草)로 비교적 정리된 느낌이 있는데 아마 저자(著者)의 초고(草稿)를 후인(後人)이 정서(淨書)한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일기(壬辰日記)」는 기사(記事)가 임진년(壬辰年)에 국한(局限)되었으므로 조사자가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이「임진일기(壬辰日記)」 2책은 필체(筆體)·체재(體裁)등이 동일(同一)하며 중간에 10일간의 기사(記事)가 누락(漏落)되기는 하였으나 기사(記事)가 연속(連續)되므로 같이 취급하였다.
상책(上冊) : 본문(本文) 첫장에 ‘개위오생배(豈謂吾生輩)………’등으로 시작하여 3행(行)이 쓰여 있고 다음 '임진사월십사일(壬辰四月十四日)………대가우이필의주(大駕又移필義州)'란 6행(行)의 기사(記事)가 있으며, 다음 면(面)부터 '임진사월대(壬辰四月大) 경인(庚寅)'이란 제하(題下)에 4월14일부터 6월6일까지 52일의 기사(記事)가 기록되어 있다.
하책(下冊) : 6월16일후반(後半)부터 12월27일까지 190일의 기사(記事)가 기록되어 있다.
상(上)·하책(下冊)에 기록된 임진일기(壬辰日記)는 임진(壬辰) 4월14일부터 12월27일까지 총 9개월(個月) 242일간의 기사(記事)가 기록되어 있는데, 6월7일에서 6월16일까지 10일간의 기사(記事)가 결기(缺記)이고 그 나머지는 연속(連續)되고 있다.
기술형식(記述形式)은 월일(月日)을 별행(別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간혹(間或) 기사(記事)가 없는 날은 일자(日字), 음청(陰晴)의 일기(日氣)만 적고 연서(連書)하기도 하였다. (11월 5∼7일) 기사(記事)는 초서(草書)이며 수정(修正)·첨삭(添削)한 곳이 상당수(相當數) 발견된다.
남행록(南行錄)은 첫장에 '만력임진8월24일남행록(萬曆壬辰八月二十四日南行錄)'이란 제하(題下)에 8월25일부터 9월23일까지 28일간의 기사(記事)가 기록되었다. 기술형식(技術形式)은 「임진일기(壬辰日記)」와 동일(同一)하며 내용도 「임진일기(壬辰日記)」의 8월25일에서 9월23일까지 28일간은 중복된 기사(記事)이다. 그러나 문장(文章)은 달리 구성(構成)하였으며, 내용도 다소 출입(出入)이 있다.
남행록(南行錄)은 저자(著者)가 당시 거창(居昌)에 주재(駐在)한 순찰사(巡察使) 김성일(金誠日)에게 토적(討賊) 등에 관한 시무(時務)를 논의(論議)하기 위해 왕환(往還)하였을 때의 저간(這間)의 일기(日記)이다.
이 남행록(南行錄)은 「임진일기(壬辰日記)」와 별개(別個)로 작성한 것인지, 아니면 「임진일기(壬辰日記)」 초고(草稿)를 전사(轉寫)한 것인지 미상이나, 초고(草稿)에 수정(修正)·첨삭(添削)한 곳이 상당수(相當數)보이는 점으로 보나. 문장(文章) 내용이 다소 다른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별도작성(別途作成)한 것으로 여겨진다.
5장말미(張末尾)에, '순치2년을유12월일(順治二年乙酉十二月日)에 보철가의(補綴加衣)(서명(署名))'라는 지기(識記)가 있는데, 이는 '인조(仁祖) 23년(1645)에 보철(補綴)하고 가위를 입혔다.'는 말이며, 그 서명(署名) 아래에 '차휘표종(此諱標縱) 7대조병록공야(七代祖屛麓公也)라 하였는데 병록(屛麓)은 조정의 말자(末子) 흥원(興遠)의 호(號)이다. 즉 흥원이 이 남행록을 장성(粧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사록(辰巳錄)은 임진(壬辰)(1592) 12월24일후미(十二月二十四日後尾)에서 계사(癸巳)(1593) 11월7일까지 총 12개월 289일간(日間)의 일기(日記)이다. '산(散) 심가려야(深可慮也) 25일(二十五日)……'로 시작된 이 일기(日記)는 비교적 정정(訂正)없이 행서(行書)로 필서(筆書)된 것으로 보아 초고(草稿)를 전사(轉寫)한 것으로 여겨지며 첫줄은 「임진일기(壬辰日記)」의 12월24일 말미(末尾)와 일치(一致)되고 이하(以下) 25일∼27일의 일기(日記) 또한 두 책의 내용(內容)이 합치(合致)된다. 「임진일기(壬辰日記)」는 12월27일에 끝나는데 반해 이 「진사록(辰巳錄)」은 12월29일까지 기사(記事)가 있고 또 계사정월(癸巳正月)로 이어지고 있다. 현존전사본(現存轉寫本)의 이 「진사록(辰巳錄)」은 전부(前部)가 일실(逸失)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 진사록(辰巳錄)의 기술형식(記述形式)은 타초고본(他草稿本)과는 달리 월일(月日)을 별행(別行)하지 않고 연서(連書)하고 있으며, 수정(修正)한 곳은 거의 보이지 않을만큼 비교적 정리(整理)되었다. 그리고 계사(癸巳) 10월1일에서 18일까지는 결기(缺記)이고, 월(月) 아래에 '자일일지18일무청음기사(自一日至十八日無晴陰記事)'라 주기(註記)하고 있다. 또 12월7일 기사(記事) 말미(末尾)에 '차하필유계록(此下必有繼錄) 이금무지가탄(而今無之可歎)'이란 주기(注記)가 있으며, 그 다음에 '병신지월(丙申至月)……'등 5행(行)의 기사(記事)가 있다. 이러한 기록(記錄)들이나 형식(形式) 등을 종합해 살펴보면, 이 「진사록(辰巳錄)」은 초고(草稿)에 의해 후인(後人)이 전사(轉寫)한 것으로 더욱 증명(證明)된다. 그러나, 초고본(草稿本)에는 특히 계사년(癸巳年)의 기사(記事)가 연속(連續)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기일부잡록(日記一附雜錄)은 계사(癸巳)(1593) 12월25일∼30일까지 6일분(日分)과 갑오(甲午)(1594) 1월1일∼2월4일까지 34일분(日分)의 일기(日記)가 있고, 부잡록(附雜錄)으로 학봉유사(鶴峰遺事)와 혼례서식(婚禮書式), 기타(其他) 비망록(備忘錄) 등이 수록(收錄)되었다. 일기(日記)는 저자(著者)가 그의 모친(母親) 권장소(權葬所)(임시 장사지낸 곳)의 전성(展省)을 위해 발행(發行)·풍산현(豊山縣)을 지나 전성(展省)을 마치고 옥천(沃川)·진잠(鎭岑)·고산(高山)·완산(完山) 등지(等地)를 경과(經過)하며 겪고 문견(聞見)한 일들을 적은 것이다. 학봉유사(鶴峰遺事)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언행록(言行錄)인데, 학봉전집(鶴峰全集)에 수록(收錄)되지 않았다.
서행일기(西行日記)는 정유(丁酉)(1597) 2월15일부터 3월17일까지 경상도유생(慶尙道儒生) 권욱(權旭)·조정(趙靖) 등이 왕의 친정(親征)을 청하는 소문(疏文)을 상주(上奏)하기 위해 경성(京城)을 왕복(往復)하며 보고 듣고 겪은 사실을 적은 기행일기(紀行日記)이다. 머리에 '정유정월24일통도내오당문(丁酉正月二十四日通道內吾黨文)'이란 제하(題下)에 경상도열읍(慶尙道列邑)에 보내는 통문(通文)이 실려 있고, 다음에 2월15일부터 3월17일까지 32일간의 일기(日記)가 있으며, 후반부(後半部)에 '경상도진사권욱등(慶尙道進士權旭等) 상소문(上疏文)'과 '이월초구일재소(二月初九日再疏)'가 있다. 상소문(上疏文)은 당시 소수(疏首)가 권욱(權旭)이었고 소문(疏文)은 일기(日記)의 저자(著者) 검간(黔澗)이 제술(製述)한 것이다.
문견록(聞見錄)은 임진(壬辰)·계사년간(癸巳年間)(1592∼1593)에 듣고 본 명장(明將)의 고시(告示)와 격문(檄文), 계초(啓草), 비망기(備忘記)등 임난관계자료(壬亂關係資料)를 모아 수록(收錄)하고 있다. 임진12월3일(壬辰十二月三日)의 흠차경략병부우시랑송(欽差經略兵部右侍郞宋)(응창(應昌))의 고시문(告示文),동년12월초10일(同年十二月初十日)의 경상우도순찰사장계초(慶尙右道巡察使狀啓草(김성일(金誠一)), 동년초7일(同年初七日)에서 초 10일까지의 비망록(備忘錄)의 내용이 수록(收錄)되었으며, 만력20년(萬曆二十年)(1592) 11월15일의 흠차경략병부우시랑송(欽差經略兵部右侍郞宋)(응창(應昌))의 격조선국왕국(檄朝鮮國王文)이 수록(收錄)되었다. 또 계사년(癸巳年)(1593) 정월14일의 창의사전통문(倡義使傳通文)을 수록(收錄)하였는데, 당병약속(唐兵約束), 경략병부약속(經略兵部約束) 등도 부재(附載)되었다. 다음에 의병격문(義兵檄文)으로 상의군(尙儀軍) 금지복(金知復)의 징병식격문(徵兵食檄文), 상의군(尙儀軍) 이준(李埈)의 모병격문(募兵檄文), 행부호군(行副護軍) 고경명격문(高敬命檄文)에 이어, 평안도사목(平安道事目) 납속사목(納粟事目)이 있는데 양반(兩班)·서얼(庶孼)·향리(鄕吏)·공사천(公私賤) 등의 세목(細目)이 있다.
임난(壬亂)에 관한 기록(記錄)으로는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전북유형문화재(全北有形文化財) 107호(號)), 이탁영의 「정만록(征蠻錄)」(보물 880호), 신경(申炅)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이노(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보물 905호, 일괄(一括)) 등 수십 종에 달하고 자필본(自筆本)으로는 「난중일기(亂中日記)」(국보 76호), 「징비록(懲毖錄)」(국보 132호)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는다.
이 조정(趙靖)의 임난일기(壬亂日記)은 임난(壬亂)이 일어난 4월14일부터 기필(起筆)하여 중간(中間)에 누락되기는 하였으나 정유년(丁酉年)(1597)까지 약(約) 6년간630일의 기사(記事)가 수록(收錄)되었다. 특히 임진년(壬辰年)의 기사(記事)는 중간에 10일간 결기(缺記)된(일실(逸失))것을 제외하고는 4월14일부터 12월27일까지 완전하게 적혀 있으며, 계사년(癸巳年)의 기사(記事)도 전사(轉寫)한 것이기는 하나, 임진(壬辰) 12월24일에서 계사(癸巳) 11월7일까지 결기(缺記)없이 완전(完全)하게 기록(記錄)되어 있어 어느 임난일기(壬亂日記)보다 충실하고 자세하다. 이는 당시 사회상(社會相), 조야(朝野)의 실상(實相), 군대(軍隊)의 배치상황(配置狀況), 의병(義兵)의 활동상(活動相)등을 살필 수 있는 임난사연구(壬亂史硏究)의 귀중한 사료(史料)이며, 저자(著者)의 능숙한 필체(筆體) 또한 문화재적가치(文化財的價値)를 더해준다.
임진일기
남행록
진사록
일기일부잡록
서행일기
문견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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