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벌수적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의 명신(名臣)이며 학자(學者)였던 충재권벌선생(沖齋權벌先生)의 종손가(宗孫家)에 소장(所藏)되어 있는 유묵(遺墨)으로 보물(寶物)902호(號)로 일괄지정(一括指定)된 것이다.

조선(朝鮮) 전기(前期) 사대명필(四大名筆)의 한 분인 자암(自庵) 김구(金絿)의 초서족자(草書簇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서첩(書帖), 전서(篆書)의 대가(大家) 미수(眉수) 허목(許穆)의 미수전(眉수篆), 명(明) 초기(初期) 초서(草書)의 대가(大家) 장동해(張東海)의 진묵(眞墨), 조선전기(朝鮮前期) 명현(名賢)들의 필적(筆蹟)을 모은 암장고적(巖藏古蹟), 선조수적(先祖手蹟) 등 8종 14책(점)이다.

이들은 조선서예사(朝鮮書藝史) 연구(硏究)에 중요한 자료(資料)들이거니와 선조수적(先祖手蹟), 암장고적(巖藏古蹟), 원장고적(院藏古蹟)등은 명현(名賢)의 필적(筆蹟)으로서 뿐만 아니라 충재(沖齋) 및 그의 자제들의 교유(交遊)와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의 시문(詩文)과 생활상(生活相)도 아울러 살필수 있는 자료들로 평가된다.

암장고적 김구 진묵(金絿眞墨) 이 족자(簇子)는 조선 전기 사대명필(四大名筆)의 한 사람인 자암(自庵) 김구(金絿)의 진묵(眞墨)으로, 중종(中宗)14년(1519) 6월,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連累)되어 예조참판(禮曹參判)에서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좌천(左遷)되어 나가는 충재(沖齋)에게 증별(贈別)로 써서 준 것이다.

작자(作者) 김구(金絿)(성종19, 1488∼중종28, 1533)는 중종(中宗) 때의 문신(文臣) ·서예가(書藝家). 자(字)는 대유(大柔), 호(號)는 자암(自庵). 본관(本貫)은 광주(光州).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장원(兩壯元)이 되고,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했다.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이상정치(理想政治)를 시도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 등과 같이 투옥(投獄)되어 10여년(餘年)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자암집(自庵集)]이 전한다.

원장고적첩 이 족자(簇子)는 당대(唐代)의 시인(詩人) 왕발(王勃)의〈별설화시(別薛華詩)〉오언율시(五言律詩) 1수(首)를 초서체(草書體)로 세로 3행(行)에 걸쳐 쓰고 좌측(左側) 하단(下端)에‘대유서증(大柔書贈)’이라 적었다. 필체(筆體)가 호탕(豪宕)하고 초경(초勁)하다. 시(詩)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송송다궁로(送送多窮路) 황황독문진(遑遑獨問津) 비량천리도(悲凉千里道) 처단백년신(凄斷百年身) 심사동표박(心事同漂泊) 생애공고신(生涯共 苦辛) 무론거여주(無論去與住) 구시몽중인(俱是夢中人) 대유서증(大柔書贈).

이 서족(書簇)은 조선전기 사대명필(四大名筆)이며 기묘사현(己卯四賢)의 한 분인 자암(自庵)의 필적(筆蹟)이란 점에서 서예(書藝) 특히 초서연구(草書硏究)의 좋은 자료(資料)가 됨은 물론(勿論)이려니와, 충재(沖齋)의 교유(交遊)를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김구진묵 허목(許穆) 청암정(靑巖亭) 편액제자(扁額題字)는 조선조 후기의 학자(學者) ·명신(名臣)이며, 전서(篆書)의 대가(大家)인 미수(眉수) 허목(許穆)의 수필(手筆)로 충재(沖齋) 권벌(權벌)의 정자(亭子)인 청암정(靑巖亭)의 편액(扁額)으로 써 준 것이다.

필자(筆者) 허목(許穆)(선조(宣祖)28, 1595∼숙종(肅宗)8, 1682)은 조선 현종(顯宗) ·숙종(肅宗)때의 학자 · 명신(名臣). 자(字)는 화보(和甫) ·문부(文父), 호(號)는 미수(眉수),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양천(陽川). 벼슬은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전서(篆書)의 대가(大家)로 불린다.

이 편제(扁題)는‘청암수석(靑巖水石)’이란 4대자(大字)를 전자(篆字)로 우측(右側)에서 좌측(左側)으로 가로 쓰고, 다음에 중자해서체(中字楷書體)로 소지(小識)를 종서(縱書)하였다.

이 편액(扁額)이 청암정(靑巖亭)에 판각(板刻)으로 게판(揭板)되어 있고, 원본(原本)은 충재종가(沖齋宗家)에 보존(保存)하고 있다. 미수(眉수)가 이 편제(扁題)를 숙종8년 임술(壬戌)(1682) 사월(四月) 상순(上旬)에 썼는데, 당시 나이 88세(歲)였다. 곧이어 병들어 별세(別世)했으니, 이것이 곧 그의 절필(絶筆)이라 한다. 청암정(靑巖亭)에 게판(揭板)된 편액(扁額)에는 소지(小識) 다음에 권씨문(權氏門)에서 쓴 3행(行)의 후지(後識)이 첨가(添加)되어 있다.

조선중기(朝鮮中期)의 학자 ·문신이며 전서(篆書)의 대가(大家)인 미수(眉수)의 절필(絶筆)이란 점에서 예술적(藝術的) 가치는 물론이려니와, 충재(沖齋)의 지절(志節)과 덕행(德行)을 사모하는 미수(眉수)의 미지(微旨)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장필진묵(張弼眞墨) 이 서첩(書帖)은 명(明) 성화(成化)∼홍치년간(弘治年間)의 문장가(文章家)이며 초서(草書)의 대가(大家)로 불리던 동해(東海) 장필(張弼)의 진묵(眞墨)2폭으로서 권두인(權斗寅) ·권두경(權斗經)의 지기(識記) 1폭(幅)이 첨부(添附), 총 3폭의 대첩(大帖)이다.

허목편액제자 필자(筆者) 장필(張弼)은 명(明) 송강(松江) 화정인(華亭人). 자(字)는 여필(汝弼), 자호동해(自號東海). 성화년간(成化年間)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남안지부(南安知府)를 지냈는데 치적(治績)이 있었다. 시문(詩文)을 잘하고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그는“나는 글씨가 시(詩)만 못하고 시가 문(文)만 못하다.”할 정도로 시(詩) ·문(文) ·초서(草書)에 능(能)하였다. 학성(鶴城) ·동해(東海) ·제고(諸稿)가 있다.

이 서첩(書帖)은 권두인(權斗寅)의 지기(識記)에 의하면, 가정기해(嘉靖己亥) 즉 중종(中宗)34년(1539)충재(沖齋) 권벌(權벌)이 개종계주청사(改宗系奏請使)로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구득(購得)해 온 것이라 하며, 당초에는 족자(簇子)로 전래(傳來)하다가 숙종(肅宗) 38년(1712) 5세손(世孫)인 그가 첩장(帖裝)으로 개작(改作)하였다 한다. 권두인(權斗寅) ·권두경(權斗經)의 지기(識記) 1폭과 함께 충재종가(沖齋宗家)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황서첩 이황서첩(李滉書帖)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연산군7, 1501∼선조3, 1570)의 수필(手筆)로서 서(序) ·발(跋) ·지기(識記) 등이 없어 정확한 필사연대(筆寫年代)는 알 수 없다. 형태(形態)를 살펴보면, 퇴계(退溪)의 필적(筆蹟)인 5절(折) 10면(面)은 명주(明紬) 바탕에 선지(鮮紙)로 배접(褙接)(첩(貼))하였으며 표지(表紙)는 양질저지(良質楮紙)로 여러 겹 첩합(貼合)한 것이다. 표지(表紙) 좌측(左側) 상단부분(上段部分)에「퇴도선생서(退陶先生書)」라는 표제(表題)가 있는데, 이것은 후인(後人)의 글씨이다. 다음 퇴계(退溪)의 필적(筆跡)은 매면(每面)에 2행(行), 매행(每行)에 5∼7자(字)로 일정(一定)치 않게 초서체(草書體)로 쓰여졌는데 내용(內容)은 고시(古詩)이다. 단(但), 제(第)10면(面) 좌측행(左側行)은 지면(紙面)으로 후인(後人)이 쓴「우퇴도이선생서(右退陶李先生書)」7자(字)가 쓰여져 있다.

장필진묵 퇴계(退溪)의 서체(書體) 연구(硏究)에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이〈미수전(眉수篆)〉은 숙종(肅宗)7년(1681) 가을에 미수(眉수)가, 연천(漣川)으로 방문(訪問)한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에게 써서 준 것이다.

내용구성(內容構成)을 살펴보면,

본서(本書) 1∼6면(面)까지는〈단서지계(丹書之戒) 장명(杖銘) 반명(盤銘)감명(鑑銘) 등을 미수(眉수)가 전서(篆書) 체(體)로 쓰고, 7∼8면(面)은 조카 허호(許호)를 시켜 쓰인 위 전서(篆書)의 예서(隸書)가 있다. 뒤에 권두인(權斗寅)의 후지(後識)이 있는데, 1682년에 작성한 것이다.

이 미전(眉篆)은 미수(眉수)가 87세 때인 작고(作故)하기 1년 전에 쓴 것으로 필법(筆法)이 고건(古健)하다. 특히 노년(老年)의 소작(所作)이란 점에서 미전(眉篆) 연구(硏究)에 귀중(貴重)한 자료로 생각된다.

권벌수적(權벌手蹟) ·선현수적(先賢手蹟)(배면(背面))에 전면(前面)은 ‘선조수적(先祖手蹟)’이고 후면(後面)은 ‘선현수적(先賢手蹟)’이다. 내용 구성(構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권벌수적(權벌手蹟)은 충재(沖齋) 권벌(權벌)의 간찰(簡札) 3점과 충재수필(沖齋手筆) 1점을 점부(粘付)한 것이다.

선현수적(先賢手蹟)은 세종(世宗)∼단종년간(端宗年間)의 영상(領相) 황보인(皇甫仁) 등(等) 7인(人)의 수적(手蹟)을 점부작첩(粘付作帖)한 것이다.

암장고적(巖藏古蹟)은 유순(柳洵)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조선조(朝鮮朝) 중기(中期) 명현(名賢)의 수적(手蹟)을 첩부작첩(貼付作帖)한 것으로 약 34인(人)의 간찰 (簡札) ·시고(詩稿) 등이 수록(收錄)되었다. 단(但), 제첨(題簽)의 ‘암장고적(巖藏古蹟)’은 충재(沖齋) 자손(子孫)의 수적(手蹟)이다.

원장고적첩(院藏古蹟帖)은 충재(沖齋) 권벌(權벌)을 제향(祭享)하는 삼계서원(三溪書院)에 관한 사제문(賜祭文) ·간찰(簡札) 등을 모아 작첩(作帖)한 것이다. 표지(表紙)에 ‘원장고적첩(院藏古蹟帖)’이라 쓰여 있고, 후표지(後表紙) 이면(裏面)에,‘임신(壬申)(1692 ? ) 추장성(秋粧成) 삼계서원장(三溪書院藏)’이란 지기(識記)가 있는데, 필체(筆體)로 미루어 보아 충재(沖齋)의 5대손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의 필적(筆蹟)으로 추정(推定)된다. 이 임신(壬申)은 즉 숙종(肅宗)18년(年) (1692)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