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jpg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종손가에 전해오는 유물들로 첫째, 유성룡 선생이 직접 쓰던 것, 둘째,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그리고 선생에게 조정에서 내린 여러 문서들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1801.jpg 유물 가운데 선생이 쓰던 것으로는 갑주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인 혁화, 상아로 만든 홀(笏:신하가 임금을 뵐 때나 종묘사직에 제사지낼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두 손에 모아쥐던 패), 갓끈, 관자, 그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보던 「동국지도」 등 총 7종이며,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는 자식들에게 재산과 노비를 분배한 기록인 분재기로 매우 희귀한 예이다. 조정에서 내린 고문서는 녹권과 교지 및 교서, 제문 등 총 14종이다.

 

이 일련(一聯)의 유물(遺物)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 관계된 것으로 3종(種)으로 분류된다. 1은 유성룡(柳成龍)이 직접 사용하던 유물이고 2는 유성룡(柳成龍) 모부인(母夫人)의 곤문기(昆文記)이며 3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내린 조정(朝廷)의 문서이다. 

보물  제460-1호 : 서애유물(西厓遺物)

(1) 갑주(甲胄) 1구(具) : 대소 철편을 가죽끈으로 연결한 것이다. 투구에는 앞면에 반월형 가림이 있고 네 쪽의 철편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투구(높이 약29㎝)는 비교적 보존이 좋으나 갑옷은 손상이 심하여 원상을 알 수 없다. 유성룡(柳成龍)이 도체찰사(都體察使) 때 입던 것이라고 한다.

(2) 혁화(革靴) 1족(足) : 두꺼운 가죽을 측면에 대고 바닥은 5중(重)으로 하여 꿰맨 신이다. 일부에 손상은 있으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길이 20㎝.

(3) 상아홀(象牙笏) 1개(個) : 길이 41㎝, 너비 5.5㎝ 내지 4.2㎝의 난백색(卵白色) 홀(笏)이다.

(4) 갓끈 4종(種) : 호박(琥珀)(길이 86㎝, 73련(聯)), 골제(骨製)(길이 85.5㎝, 회백색 72련(聯)), 오칠목제(烏漆木製)(길이 84㎝, 74련(聯)), 밀화(蜜花)(길이84㎝, 담홍색 원주(圓珠) 302련(聯))의 4종(種)이다.

(5) 관자(貫子) 2종(種) : 금관자(金貫子) 하나와 옥관자(玉貫子) 6개의 7개이다. 금관자(金貫子)는 지름 1.7㎝이고 옥관자(玉貫子)는 지름 1.3㎝, 1.9㎝, 2.1㎝, 2.5㎝, 3㎝, 1.9㎝이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밑에 원판과 위에 5화가 투각(透刻)된 것이다.

(6) 유서통(諭書筒) 1개(個) : 왕대의 마디 하나를 이용한 원통(圓筒)이다. 마디의 중간을 자른 양 끝에는 장식을 박고 끈을 매었고 중심을 타원형(길이 14㎝)으로 오려내고 자물쇠를 만들어 달았다. 길이 48.4㎝, 지름 8.6㎝

(7) 동국지도서애선생수택본(東國地圖西厓先生手澤本) 1점(點) : 아래 좌단(左端)에 모두 손상이 있다. 현재 삼수(三水) ·갑산(甲山) ·단천(端川)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종성(鍾城) ·은성(隱城) ·경원(慶源)의 각 면(面)과 아오지(阿吾知)의 편면(片面)만이 남아 있어 완본(完本)은 아닌 것 같다.

각 면 한지(韓紙)에 담채(淡彩)로 그려져 있다. 크기 61㎝ ×36㎝

보물  제460-2호 :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西厓先生母夫人昆文記) 1축(軸)

한지에 행서(行書)로 쓴 긴 축(軸)(크기 362㎝ ×67.2㎝)으로 곳곳에 충해가 있고 특히 첫머리는 손상이 심하다. 서애선생(西厓先生) 모부인(母夫人)의 분재기(分財記)로 매우 귀한 것이다. 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되었다.

재주모정경부인김씨(財主母貞敬夫人金氏)(방형묵인(方形墨印))

증가옹오촌질종사랑전영능참봉이보(證家翁五寸姪從仕郞前英陵參奉李輔)(수결(手決))

삼촌질기자전참봉김응남(三寸姪箕子殿參奉金應南)(수결(手決))

필집사촌손유학신민(筆執四寸孫幼學申민)(수결(手決))

보물  제460-3호 : 고문서(古文書)

유성룡(柳成龍)에 관계된 일련(一聯)의 문서들인데, 공신교서(功臣敎書)·교지(敎旨) ·제문(祭文) 등이다.

(1) 광국공신교서(光國功臣敎書) 1축(軸) : 한석봉서(韓石峯書)라고 전하는 42.9㎝ ×115㎝의 긴 축(軸)이다. 비단에 붉은 줄을 치고 해서(楷書)로 썼고 유성룡(柳成龍)은 삼등(三等)에 기록되었다. 년시(年時)는 만력(萬曆)18년 8월(1590)이다.

(2) 광국공신과록패(光國功臣科祿牌) 2매(枚) : 만력(萬曆)33년(1605)과 34년에 내린 2장의 공신과(功臣科) 녹패(祿牌)이다. 녹(祿)은 대미(大米)5석(石), 소미(小米)1석(石), 태(太)2석(石)으로 되어 있다.

(3) 노비하사교지(奴婢下賜敎旨) 2매(枚) : 만력(萬曆)34년(1606)과 숭덕(崇德)3년(1638)의 2장이다.

(4) 도체찰사교서(都體察使敎書) 1매(枚) : 만력(萬曆)20년(1592)에 내린 교서(敎書)임.

(5) 문충공시호교지(文忠公諡號敎旨) 1매(枚) : 천계(天啓)7년(1627) 7월2 0일에 내린 교지(敎旨)임.

(6) 판중추부사교지(判中樞府事敎旨) 1매(枚) : 만력(萬曆)21년(1593) 2월 24일에 내린 교지(敎旨)임.

(7) 호성공신교지(扈聖功臣敎旨) 1매(枚) : 만력(萬曆)32년(1604) 6월에 유성룡에게 내린 교지(敎旨)임.

(8) 풍원부원군교지(豊原府院君敎旨) 1매(枚) : 만력(萬曆)31년(1603) 10월 7일의 교지(敎旨)임.

(9) 영의정교지(領議政敎旨) 1매(枚) : 만력(萬曆)20년(1592) 5월 2일의 교지(敎旨)임.

(10) 증정경부인교지(贈貞敬夫人敎旨) 1매(枚) : 유성룡부인(柳成龍夫人)에게 내린 만력(萬曆)24년(1596) 10월 9일의 교지(敎旨)임.

(11) 불윤비답(不允批答) 3매(枚) : 유성룡(柳成龍)의 정사(呈辭)는 만력(萬曆)23년(1595) 이후 무수히 있었으나 그 중 만력(萬曆)24년 9월, 동 26년 2월, 동 28년 1월에 있었던 정사(呈辭)에 대한 불윤비답(不允批答)이다.

(12) 선조제문(宣祖祭文) 1매(枚) :「유만력삼십오년세차정미육월(維萬曆三十五年歲次丁未六月) 임진삭(壬辰朔) 초팔일(初八日) 기해국왕(己亥國王)」운운으로 시작된 유성룡(柳成龍)에 대한 선조(宣祖)의 치제문이다.

(13) 왕세자(王世子)(광해군(光海君))제문(祭文) 1매(枚) : 만력(萬曆)35년(1607) 선조치제 다음다음 날에 있었던 왕세자(王世子) 광해군(光海君)의 제문(祭文)이다.

(14) 정조제문(正祖祭文) 1매(枚) :「유건융오십구년세차갑인사월초일일(維乾隆五十九年歲次甲寅四月初一日) 국왕(國王)」으로 시작된 정조(正祖)의 치제문이다. 때는 정조(正祖)18년(1794)이다.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