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은평구 진관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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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삼각산(三角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북한지 北漢誌≫에 의하면, 신라 진덕왕 때 원효(元曉)가 삼천사(三川寺)와 함께 창건하여 신혈사(神穴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고려 현종이 중창하고 진관사라 하였다.
고려 경종이 죽자 젊은 왕비는 왕태후가 되어 파계승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나누다가 사생아를 낳았다. 그 때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태조의 아들이던 욱(郁:安宗)의 직손이며 법통을 이어받을 대랑원군(大良院君)이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왕태후는 대랑원군을 없애고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하여 목종에게 참소하여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삼각산 신혈사로 옮기도록 하였다.
신혈사는 진관(津寬)이 혼자서 수도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살해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사실을 눈치 챈 진관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지하굴을 파서 열두 살인 대랑원군을 숨겼으므로 왕태후가 보낸 자객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3년 뒤 목종이 죽자 대랑원군은 개경으로 돌아가 현종이 되었고, 1011년 진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하였다. 그 뒤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어서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1090년(선종 7)에 왕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1099년(숙종 4)과 1110년(예종 5)에도 왕이 행차하여 참배하고 시주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권근(權近)이 지은『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그 전모가 전해진다.
1397년(태조 6)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李得芬)과 조선(祖禪)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재를 설치할 것을 명하게 된다.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尙忠達), 지상(志祥)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된다.
이후 태조는 진관사에 수륙재를 개설하도록 공사를 지시하고 절에도 행차하였으며, 1397년 9월 낙성식에도 참여하였다. 이에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던 진관사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가 개설되는 사찰로서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당시 진관사에 조영된 시설물은 모두 59칸으로, 상중하단의 삼단을 기본구조로, 중ㆍ하단에 행랑이 연이어 들어서 있는 왕실사찰로서의 위엄과 규모를 갖추게 된다.
이후 불교를 배척하던 태종 역시 1413년(태종 13)에 진관사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따라서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가 열려 조선왕실의 명실상부한 수륙도량으로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국찰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또 1452년(문종 2)에 다시 한번 중수가 이루어지는데, 1463년(세조 9)의 화재로 일부가람이 소실되어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 후 1470년(성종 1)에 벽운(碧雲)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854년(철종 5)과 1858년에 중수되었으며, 1879년(고종 16)에는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대선사가 큰방 34칸을 지어 국찰로서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근대에는 1908년에 송암(松庵)선사가 경내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으며, 1910년에 대웅전 삼존상을 개금하고, 아울러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시왕탱 등을 개금ㆍ보수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고, 자신이 소유했던 토지를 사찰에 무상으로 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