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혼(國魂)은 살아있다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國語) 국문(國文) 국사(國史)는 국혼(國魂)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軍隊) 성지(城池) 함선(艦船) 기계(器械)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 하지 않는다. - 박은식 선생이 지은 <한국통사>(1915년)의 결론 -
항상 미소 짓는 얼굴에 관후하고 소탈한 성품
박은식(朴殷植, 1859. 9. 30~1925. 11. 1) 선생은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농촌 선비로 서당 훈장이던 부친 박용호(朴用浩)와 모친 노씨(盧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성칠(聖七), 호는 백암․겸곡(謙谷)․태백광노(太白狂奴)․무치생(無恥生), 이명은 박인식(朴仁植)․박기정(朴箕貞) 등이다.
일제 시기 송상도(宋相燾)가 쓴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의하면, 선생의 인상은 중키에 광대뼈가 튀어 나왔으며, 항상 미소 짓는 얼굴에 관후하고 소탈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선생은 부친의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여 동네 신동으로 불리었다.
당시의 학문이 과거시험 준비에 치중되어 있었지만, 선생은 이에 구애되지 않고 경학은 물론 제자백가와 불교․기독교의 교리 등도 두루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安泰勳)과 교유함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문장을 보고 사람들이 해서(海西)의 두 신동이 났다고들 하였다.
특히 선생은 1880년에는 경기도 광주(廣州)로 가서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 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이들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인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선생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의 정치․경제․사회 등 제분야의 개혁론을 섭렵하였고, 나아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관념 체계 아래 현실 문제에 관심이 깊은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며 개혁적 사고를 가지게 된 것 같다. 이 같은 사상적 배경이 선생을 양반 관료제 사회의 질서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성리학의 틀에만 매어 있지 않고, 근대적인 변화와 발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개신 유학자로 거듭나게 한 것 같다.
독립협회 가입하고, 황성신문 주필로 민중계몽 운동
1882년 서울에 머물고 있는 동안 선생은 보수와 개화의 갈등이 현재화되어 표출된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에 느낀 바 있어 시무책을 지어 국왕에게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매우 실망하여 낙향하였다. 그리고는 곧 평안북도 태천(泰川)에서 후학들을 훈도하고 있던 대학자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성암(誠菴) 박문오(朴文五) 형제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위정척사론의 대가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들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들을 통해 강렬한 척사적(斥邪的) 민족주의를 수용하여 갔던 것이다. 결국 선생은 다양한 수학 과정을 거치면서 양명학과 실학에 토대를 둔 현실적이며 근대적인 사고,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척사적 민족주의를 키워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사상은 선생이 이후 전개한 한말 민족 계몽운동과 구국운동, 그리고 일제시기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선생이 근대 민족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면서부터이다. 즉 선생은 그 해 3월부터 개화 지식인들과 서울 민중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운동에서 문교 분야의 간부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장지연(張志淵)․남궁억(南宮檍)․유근(柳瑾) 등이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하여, <황성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하자 장지연과 함께 주필로 활동하면서 민중 계몽운동을 벌여 나갔다.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된 뒤에는 성균관의 교육 기능을 계승한 경학원(經學院)의 강사와 관립 한성사범학교의 교사로 봉직하면서 후학 양성에도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1904년 7월 양기탁(梁起鐸)과 영국인 배설(裵說)에 의해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양기탁의 추천으로 이 신문의 주필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대한민족 대표 선언서(1919.10.31) 박은식 등 한국 민족대표 26인의 명의로 발표한 선언서. 재차 한민족의 독립을 확인하며, 자유 독립을 위해서 최후의 혈전까지 불사할 것임을 알리는 내용.
이 무렵 일제는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노골적이고 본격적인 침략 정책을 감행하고 있었다. 더구나 러일전쟁에서의 승전으로 한국에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침략성을 격렬하게 비판하자 일제는 이 신문을 정간시켜 버렸다. 그 뒤 황성신문은 1906년 복간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장지연의 복귀는 어려웠다. 때문에 주필로 혼자 남게 된 선생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황성신문이 강제 폐간될 때까지 각종의 애국적 논설을 발표하여 국민을 계몽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의 저변을 넓혀 갔다.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교육 발전이 필수적”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 선생은 국망의 위기 상황에서 구국과 국권회복 운동의 논리로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고, 이에 기반하여 여러 방면에서 실력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회와 민족, 그리고 국가간의 생존경쟁을 천연(天演)의 공리로 이해하는 사회진화론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매우 유용한 민족운동의 논리였다. 그것은 국망의 상황을 민족의 실력이 쇠퇴하여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것으로 이해한 탓이었다. 때문에 국권을 되찾고 민족과 국가간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력양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한말 다양한 방향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민중 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선생 또한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갔던 것이다.
우선 선생은 자강운동 단체로 1906년 4월 조직된 대한자강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이 회에서 주로 기관지인 <대한자강회월보>의 발행에 관여하면서 다수의 애국적인 논설을 발표하여 교육과 실업을 장려하고, 민중의 정치 의식을 깨우쳐 갔다. 특히 이 시기 선생의 활동은 언론 계몽운동과 함께 교육 계몽운동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선생이 세계 여러 나라의 국운과 교육과의 관계를 자세히 살핀 후, 우리 나라의 운명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는 교육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1906년 10월 선생이 동지들과 함께 교육 계몽운동 단체로 서우학회를 조직한 것도 그 같은 생각을 실천한 것이다. 선생은 이 학회를 지도하면서 기관지인 <서우>의 발행을 맡아 교육 진흥과 민족 교육기관으로 사립학교의 설립을 촉구하였다.
서북협성학교 오성학교 교장으로 민족교육 실천. 비밀결사 신민회에서 활동
선생의 그러한 노력은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1908년 1월 서북인 중심의 서우학회와 관북인 중심의 한북흥학회가 통합하여 서북학회가 창립하면서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서북학회의 회장을 맡게 된 선생은 그 기관지인 <서북학회월보>를 통해 사립학교의 설립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였고, 그 결과 서울에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가 개설된 것이다. 서북학회의 주도 아래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가 설립되자 선생은 이 두 학교의 교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민족교육을 실천하여 갔다. 그리고 서북협성학교의 분교 설립을 적극 추진하여 1908년부터 1909년 말까지 전국 각지에 63개 지교(支校)를 설치하였고, 이를 매개로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신교육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운동에 진력하였다.
선생은 한말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인 신민회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안창호․전덕기․신채호 등이 결성한 신민회는 전국적인 비밀결사로 계몽운동 단체이자 국권회복운동 단체였다. 그리하여 1911년 조직이 탄로 나 붕괴될 때까지 신민회는 지하에서 민주 공화주의 이념을 전파하고, 국채보상․산업진흥․교육계몽 등의 실력양성운동을 지도하고,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등 다양한 부문에서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선생은 주로 교육과 언론․출판 등의 부문에서 활동하면서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에 동참하였다. 아울러 일제가 유림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공작을 전개하자 선생은 장지연․ 조완구 등과 함께 대동교를 창립하여 맞섰다. 대동교는 공자의 대동주의와 맹자의 위민지설(爲民之說), 그리고 양명학의 지행합일적 입장에서 유교를 민중적이고 실천적으로 개혁한 것이었다. 결국 선생은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하여 유교계의 개혁을 촉구하였는데 이를 보아도 유림층을 국권회복운동 전선으로 끌어 내려고 대동교를 창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무단정치를 시행하면서 신민회 등 민족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통치체제의 안정을 위하여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한 애국적인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켰다. 그리고 선생의 저작을 비롯하여 민족혼이 담긴 간행물을 <금서(禁書)>로 분류하여 그의 발행과 열람을 엄금하였다.
“국혼이 소멸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국혼인 역사서마저 불태우다니”
박은식의 아들 박시창 사진. 황포군관학교를 수료하고 중국군 장교로 중일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광복 후 귀국하여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민족혼이 실린 역사서가 모두 압수, 소각됨으로써 일반 국민은 물론 자라나는 다음 세대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긍지를 상실하지 않을까 우려하게 되었다. 선생은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어도 국혼(國魂)이 소멸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서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11년 5월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역사서를 집필하여 민족혼을 진작할 목적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하게 되었다.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서간도 환인현 흥도천에 있는 동지 윤세복의 집에 1년 동안 머물면서 국혼을 발흥시킬 역사서의 저술에 진력하고, 또 이를 재만 한인동포들의 교육 교재로 사용하게 하였다. 이 때 선생이 저술한 것이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으로 민족 영걸들에 대한 것이 많았다. 이는 선생이 민족 구성원 모두가 이들과 같은 영걸이 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때 독실한 대종교(大倧敎) 신자인 윤세복의 영향과 민족 종교를 국혼의 한 결정체로 보는 인식에 따라 선생은 대종교, 즉 단군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중국 내 최초의 한국 독립운동단체 동제사를 만들고 총재로서 이끌어
1912년 3월부터 선생은 북경․천진․상해․남경 등지를 순방하며 망명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한 뒤, 그 해 7월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였다. 동제사는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 독립운동단체로서 중국의 혁명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신해혁명에도 참여하였던 신규식의 주도로 선생을 비롯한 신채호․조소앙 등이 조직한 것이었다. 선생이 총재를 맡았던 동제사는 중국의 국민혁명 세력과 연대를 모색하면서 상해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하였다.
그 뒤 1914년 선생은 중국인 동지들의 요청으로 홍콩에서 중국어 잡지인 <향강(香江)>의 주간이 되었다. 이 때 선생은 강유위․양계초․당소의 등을 비롯한 다수의 중국 혁명동지회 계열의 인사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러면서 선생은 원세개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자주 게재하였다. 이는 근대적 민주 공화주의를 수용하고 있던 선생이 중국 국민혁명을 외곽에서 지원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
“혼이 보존되면 국가는 부활할 것이다.” 비바람 속에서도 붓 놓지 않고 <한국통사> 완성
원세개 정부의 탄압으로 <향강>이 폐간된 뒤 다시 상해로 돌아온 선생은 <안의사중근전(安義士重根傳)>을 집필하고, 망명 이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완성하여 중국인 출판사에서 1915년 간행하였다. 선생은 서문에서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 독존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를 저작하는 소이이다. 신(역사)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나라)은 부활할 시기가 있을 것이다”라고 집필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전제조건이고 원동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선생에게 있어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은 곧 독립운동이었고, 또 그를 위한 역량의 축적과정이었다.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독립운동 전선에서 선생이 한 날 한 시도 붓을 놓지 않고 역사를 저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국통사는 3편 114장으로 구성된 저작으로 1864년 대원군 집정으로부터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다루었다. 구체적으로는 일반 정치사와 일제침략사, 그리고 독립운동사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일제침략사에 초점을 맞추어 대외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고, 대내적으로 민족적 통분과 적개심을 유발하면서 동포들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였다. 결국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아픈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고, 그 토대 위에서 독립투쟁의 정신을 고취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신한혁명당 결성. 대한국민노인동맹단 조직하여 사이토 총독 제거 계획 실행
이와 함께 선생은 1915년 3월 북경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당의 결성에 참여하여 그 취지서와 규칙을 만들었고, 또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 같은 시기 선생은 상해에서 신규식과 더불어 대동보국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중국 관내 및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연대를 모색하여 갔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선생은 1917년 7월 신규식․조소앙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3․1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독립 열망과 의지를 담아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의 이러한 노력의 기반 위에서 세워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1운동을 선생은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맞이하였다. 이 때 선생은 육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호응하여 갔다. 특히 65세의 노인동맹단원인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파견하여 1919년 9월 2일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지게 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그 뒤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그리고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의 통일을 추진하여 그 해 9월 통합 임시정부가 발족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때에도 선생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원로로서 임시정부의 통합을 외곽에서 도왔다. 이 와중에서도 선생은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발행에 참여하고, 또 임정사료편찬회를 주도하면서 독립운동사료의 편찬 작업을 도맡아 수행하였다.
“백 번 꺾어도 꺾이지 않고, 열 번 밟혀도 일어나면 최후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
<韓國獨立運動之血史(한국독립운동지혈사)> 사진. 박은식이 저술한 것으로 1920년 상해에서 간행되었다. 일제의 조선 강점 과정과 조선총독부 무단통치의 학정을 폭로 하는 한편, 전민족적 항일운동인 3•1운동 서술에 역점을 기울였다.
특히 이 시기 선생은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자료를 모아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 간행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까지의 일제 침략에 대한 한국 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다.
이 책에서 선생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만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한편, 3·1운동이 갑신정변 이래 발전되어 온 민족 독립운동의 주체적 역량에 의해 봉기한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역사의 대세와 국제 정세는 일제가 패망하도록 변화하고 있으며, 3·1운동을 계기로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즉 “백 번 꺾어도 회절(回折)하지 않고, 열 번 밟혀도 반드시 일어나 현상에 비관하지 않고, 험한 길에 걸음을 멈추지 않아서 최후의 결과는 반드시 승첩(勝捷)을 올릴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로써 선생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고, 최후의 승리를 위한 독립투쟁을 고취하여 갔던 것이다.
1925년 정무를 등한시한 이승만이 면직되자, 선생이 2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돼
이후 선생은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와 이념의 대립, 그리고 주요 구성원 간의 갈등으로 인해 공동화 현상으로 빠져들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심혈을 쏟았다. 특히 1923년 국민 대표회의의 파탄 이후 임시정부가 무력화되자 정부를 정상화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우선 선생은 1924년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사의 사장으로 취임하여 독립신문의 발행을 정상화하면서 사태 수습의 물꼬를 터갔다.
임시의정원도 이 때 임시정부의 정상화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문제의 핵심이 사태를 수습하지 않고 정부 소재지를 떠나 정무를 등한시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임시의정원은 1924년 6월 <이승만대통령 유고안>을 결의한 뒤, 12월 임시정부의 혼란을 수습해 줄 원로로서 선생을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하였다. 이에 선생은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이를 수락한 뒤, 임시의정원과 협조하여 임시정부의 정상화 방안을 추진하여 갔다.
그 방안은 두 가지로 집약되었다. 하나는 임시정부의 정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각종 폐단을 가져온 대통령 중심제 정부를 내각 책임제 정부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독립운동 세력이 분열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 각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임시대통령 대리로서 이를 앞장서 수행하면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5년 3월 <임시대통령 이승만 면직안>이 임시의정원에서 통과된 뒤,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이에 선생은 임시대통령으로서 곧 바로 국무령제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였다. 이것이 통과되자 선생은 신헌법에 의거하여 그 해 8월 만주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의 지도자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고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독립신문 호외(1925.11.2) 전 임시정부 임시대통령 박은식의 서거사실과 유언 및 장례식 관련 내용 알리고 있다.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만든 후 이상룡 국무령 추천하고 스스로 사임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임시정부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선생은 인후염과 기관지염이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사임할 당시에는 병색이 완연하게 드러났고, 결국 그로 말미암아 1925년 11월 1일 66세를 일기로 상해에서 서거하고 말았다. 그 순간에도 선생은 “우리가 귀중한 독립운동을 기성(期成)하려면 무엇보다도 첫째 전민족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유촉을 남겼으니, 민족 독립에 대한 선생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선생의 장례는 11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상해 영국 조계의 정안사로에 모셔졌다. 그러다가 서거 68년만인 1993년 8월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김인전 선생 등과 함께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조국의 앞날을 지켜보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 자료 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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