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청도군 각북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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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전통사찰총서 |
사진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최정산(崔頂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역 사〕
용천사의 연혁에 관해서는 『청도군각북면용천사사적(淸道郡角北面湧泉寺事蹟)』이라는 책자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책은 1927년에 간행되었는데, 1702년(숙종 28) 김진규(金鎭圭, 1658~1716)가 지은 목판본 사적기와 1703년 행규(行珪)가 지은 「용천지(湧泉誌)」를 한데 엮은 것이다. 김진규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01년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대제학·예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다.
이 책에 수록된 두 편의 사적기는 불과 1년의 시차를 두고 씌어져서 그런지 창건과 임진왜란 이후 중건된 내역에 관하여 서로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 김진규의 사적기가 글 앞부분에서 창건주인 의상 대사가 중국에 유학 가는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시작하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특히 김진규의 경우 그가 당대의 명망 있는 문신이자 유학자, 그리고 고위 관리라는 입장에 있으면서 이러한 사적기를 썼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불교에 대해 깊은 이해를 지닌 인물이었던 데다가, 당시 용천사가 그만큼 비중 있는 사찰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진규의 사적기에 따르면 의상 대사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670년(문무왕 10) 전국에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창건하였는데, 용천사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으며, 당시의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 의상 대사가 『화엄경』을 새긴 상아(象牙), 곧 「상간(象簡)」 8매로 불법을 전하였는데, 나중에 그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려 목판으로 보충하였다. 또한 삼국시대에 관기(觀機)·도성(道成)·반사(搬師)·첩사(瘡師)·도의(道義)·자양(子陽)·성범(成梵)·여백(女白)·우사(牛師) 등 이른바 구성(九聖)이 이곳에 머물렀었다고 한다.
고려에서는 원종(元宗, 1260~1263)대에 보각국사 일연이 중수하면서 용천사라고 하였다가 다시 불일사(佛日寺)로 바꾸었다. 일연 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원종 임금이 경주로 행차하면서 불일사에 들렀는데, 원종은 일연 스님을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일연 스님이 지은 결사문(結社文)에 서명까지 하였다. 이로써 불일사가 더욱 유명해지고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전통사찰총서 17)
〔연 혁〕
앞서의 「용천사사적」에 수록된 김진규의 사적기와 행규의 「용천지」에는 의상 대사의 창건과 일연 스님 때의 중창 사실에 이어서 당대의 중건 사항이 매우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용천사는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당우가 소실되고 여러 성보를 약탈당하는 등 사세가 몹시 기울었다. 그러나 1631년(인조 9) 조영(祖英) 스님 등이 중건하여 다시금 본래의 면목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위의 두 사적기가 간행될 무렵인 1702년·1703년에는 고려시대 일연 스님 주석 당시의 사관(寺觀)을 대부분 회복한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이 때의 광경을 「용천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전(佛殿)과 승료(僧寮)가 늘어선 것이 마치 바둑판에 돌 놓인 듯 정연하고, 층층이 올라선 누대(樓臺)는 하늘로 우뚝 솟아 뭇 별들을 사열하듯 하니, 이러한 사관은 거미줄처럼 뒤엉킨 민가와 함께 모란이 피어나듯 그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루었다.
그 옛날 의상 대사께서 창건하시고 보각 국사께서 중수하셨다 하나 어찌 이 보다 더 장관이었으리요.”
근대에 와서는 절 살림이 몹시 어려워졌는데, 1907년 신도들이 모여 계를 만들어 법당을 중수하고 토지 9두(斗)도 구입하였다.
최근에는 1983년 범종각을 짓고, 우물인 용천각을 지으며 오늘에 이른다.
〔사찰풍경〕
“...청도 각북 용천사 가는 길,
산 능선을 타고 건장한 송전탑들 이어지고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진달래 꽃불,
저를 한 마리 꽃소로 만드는 것도 산은 알지 못한다...”
(이성복,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중에서 )
맑고 깨끗한 계곡을 따라 비슬산 헐티재를 넘어 용천사 가는 길은 시인의 눈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답다. 산 능선을 타고 구비구비 산길을 넘어가면 길가에 천년 고찰 용천사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비슬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용천사(湧泉寺)는 신라 문무왕 10년(670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해동화엄전교(海東華嚴傳敎)의 10대 사찰 중 한 곳이다.
화엄 십찰은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세운 사찰인데 최치원(崔治遠)이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절 이름이 나온다. 『법장화상전』에 의하면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원주 비마라사(毘摩羅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팔공산 미리사(美理寺), 계룡산 갑사(甲寺), 웅주 가야협 보원사(普願寺), 삼각산 청담사(靑潭寺) 10개 사찰을 말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이중 부석사와 비마라사·해인사·옥천사·범어사·화엄사 6개 사찰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찰은 의상대사가 전파한 화엄사상을 널리 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불교 전성기에는 승려가 천여 명이나 되었고 주변에 자리잡고 있던 암자들은 백련암, 청련암, 일련암, 남암, 서암, 내원암, 부도암 외 47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오랜 세월 속에 모두 없어져버렸다. 이미 24명의 도인이 나왔고 앞으로 104명의 도인이 나올 것이라는 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 중 3중창(1631년) 때의 것은 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만 남아 있고 다른 건물은 근대에 세워진 것이다.
고려 원종 8년(1267년) 일연 선사가 중창하여 불일사(佛日寺)라 칭하였다가 다시 용천사로 고치고, 임진왜란 후 인조 9년(1631년) 조영대사(租英大師)가 3중창하였으며 순조 5년(1805년) 의열 화주가 크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물로서는 법당의 삼존불, 후불탱화, 나한십육존불, 영탱, 석조물 등이 있으며 불을 밝히는 데 사용하였던 정료대가 남아있고 절 오른쪽 골짜기에 고승들의 부도(浮屠) 6기가 이 절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용천사라는 이름은 맑고 풍부한 석간수가 끊임없이 용솟음쳐 흘러내리고 있어 용천(湧泉)이라 부쳐진 것이라고 전한다. 이 용천의 샘물은 가물 때나 장마가 질 때도 늘 일정한 양의 맑은 물이 흐르고 사철 마르지 않으며 한겨울에도 어는 법이 없다고 한다. 1300년 전에도 흐르던 이 샘물은 지금도 여전히 중생들의 감로수가 되어 우리의 마른 목을 축여주고 있다.
〔지정문화재〕
〔교통안내〕
-자가용
* 북대구 IC를 나와서 대구 신천대로를 따라 가다가 가창댐 입구에서 우회전을 한다.(댐 입구에 운흥사, 달성조길방가옥 표지판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비슬산 헐티재를 넘어오면 오른쪽 길가에 용천사가 있다.
* 청도 → 풍각 → 각북 → 오산리 → 용천사(30분 소요)
-대중교통
대구역에서 풍각행 버스(경산 버스) 이용, 용천사 입구에서 하차
청도역에서 택시 이용(10,000원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