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8.jpg 경주(慶州) 남산(南山) 서록(西麓)에 위치하여 있는데,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봉토자락에는 호석(護石)을 받쳤던 자연석(自然石) 받침돌이 몇 개 나와 있다. 봉분(封墳) 앞에는 한 단 낮아져 석상(石床)이 놓여 있고 그 앞에는 다시 석축(石築)을 쌓아 단(段)을 설치하였으나 모두 후대(後代)에 축조한 것이다.

이 고분(古墳)은 규모면에서 일반 서민층의 것은 아니지만 위치(位置)와 봉분(封墳) 형식으로 보아 신라 초기인 일성왕(逸聖王)의 재위시기와는 동떨어진 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으로 추정되며, 문헌에도 일성왕(逸聖王)의 장지(葬地)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라 제7대 왕(王)인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재위(在位) 134-154)은 재위기간에 북쪽 변방으로 침입하는 말갈(靺鞨)을 막았고, 또 농토를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는 등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민간에서 금(金)·은(銀)·주옥(珠玉)의 사용을 금지시키는 등 검소한 생활을 권장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