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0.jpg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 있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수중릉(水中陵)으로 동해변(東海邊)에서 200m 떨어진 바닷속에 있다. 봉길리(奉吉里) 앞 바다 물속에 솟은 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대왕(大王) 바위라고 불러왔다. 대왕암(大王岩) 위에 올라보면 가운데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고, 그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내어 맑은 바닷물이 파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水路)로 들어오고 서쪽 수로(水路)로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은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대왕암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넓적하고도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데, 길이 3.6m·너비 2.85m·두께 0.9m의 거북 모양의 화강암석으로 수면(水面)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이 돌 밑에 어떤 특별한 장치를 해서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유골(遺骨)을 봉안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돌 밑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7141.jpg 대왕암에서 중앙의 장골처(藏骨處)를 중심으로 사방에 수로(水路)를 설치한 것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사리탑(舍利塔)의 형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즉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탑(印度塔)의 경우나 백제의 미륵사탑(彌勒寺塔) 하부에 4방으로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이 대왕암에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재위(在位) 661-681)은 본명이 김법인(金法敏)이고, 무열왕(武烈王)의 맏아들로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평정하고, 당(唐)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의 영주(英主)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81년 7월에 왕(王)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문무(文武)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불식(佛式)으로 화장(火葬)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왕이 죽어서도 동해(東海)의 용(龍)이 되어 왜구(倭寇)를 막겠다는 유지를 받든 것으로 신라 사람들은 왕(王)이 용(龍)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대석(大石)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하였다고 한다.

7142.jpg 문무왕(文武王)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은 동해변(東海邊)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고 금당(金堂) 밑에 동해(東海)를 향하여 구멍을 뚫어 동해(東海)의 조수(潮水)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는 동해(東海)의 용(龍)이 된 부왕(父王)이 조수(潮水)를 따라 금당까지 들어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인근 해변에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는데 신문왕(神文王)이 이곳에서 대왕암(大王岩)을 망배(望拜)한 곳이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영주이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문무왕이 재위 21년만인 681년에 죽자,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장례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으므로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이 능은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자연바위이다. 남쪽으로 보다 작은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둘레에는 썰물일 때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이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마치 호석처럼 보인다.

대왕암에 올라보면 마치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로(水路)를 마련한 것처럼 되어 있다. 특히,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는 파도를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이 외부에 부딪쳐 수로를 따라 들어오고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의 공간에는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이 안쪽의 공간은 비교적 넓은 수면이 차지하고 있고 그 가운데는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하고도 큰 돌이 놓여 있다.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문무왕의 유골을 이 돌 밑에 어떤 장치를 해서 보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수중발굴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이 판석(板石)처럼 생긴 돌 밑에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아울러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더구나 바위의 안쪽에 마련된 공간에 사방으로 수로가 마련되어 있는 것은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관한 탑의 형식에 비유되고 있다.

즉,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의 산치탑의 경우나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익산 미륵사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지금까지 그러한 예가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