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7.jpg 신라의 시조왕릉(始祖王陵)으로 전하는 오릉(五陵)은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봉토분(封土墳)으로 4기(基)는 원형분(圓形墳)이나 1기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되어 있다.

제1릉(第1陵)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m로 5기(基) 가운데 가장 높고 크다. 제2릉(第2陵)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이다. 제3릉(第3陵)은 제2릉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7.2m로 표형쌍분(瓢形雙墳)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원형분(圓形墳) 2기(二基)가 합쳐진 것이다. 제4릉(第4陵)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m이다. 제5릉(第5陵)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m이다.

이와 같이 5기(基) 중 1기(基)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2인용 무덤이기 때문에 오릉(五陵)의 실제 피장자는 6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이와 같은 대형(大形)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에 출현하는 것으로 후세(後世) 수축(修築)이었으면 몰라도 혁거세왕(赫居世王) 당시의 고분 형식은 아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오릉(五陵)을 사릉(蛇陵)이라 했는데,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남해왕(南解王)·유리왕(儒理王)·파사왕(破娑王) 등 박씨 사왕(朴氏 四王)을 사릉원내(蛇陵園內)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고,《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서는 혁거세왕(赫居世王)과 알영부인(閼英夫人)을 합장(合葬)하려 하자 뱀의 이변(異變)이 있어 각각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이와 다른 기록을 하고 있는데, 혁거세왕(赫居世王)이 재위 62년만에 승천하였다가 그후 7일만에 유체(遺體)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고 왕후(王后)도 따라 승하하니 사람들이 합장(合葬)하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여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냈으므로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하며 담암사(曇巖寺) 북릉(北陵)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담암사(曇巖寺) 위치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오릉(五陵)의 제실(齊室)인 숭덕전(崇德殿) 앞의 홍살문(紅箭門)이 사찰의 당간지주(幢竿支柱)를 이용하여 서 있는데, 오릉(五陵) 옆에 사찰(寺刹)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를 담암사(曇巖寺)의 유물로 믿고 있다.

숭덕전(崇德殿)은 조선 세종(朝鮮 世宗) 11년(1429)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 선조(宣祖) 33년(1600)에 재건하였고, 숙종(肅宗) 20년(1694)에 수리하였으며 경종 3년(1723)에 사액(賜額)되었다. 또한 경내에는 영조(英祖) 35년(1759)에 세워진 혁거세왕(赫居世王)과 숭덕전(崇德殿)의 내력을 새긴 신도비(新道碑)가 있다. 숭덕전 위편에는 알영왕비의 탄생지라 하는 알영정(閼英井) 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