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보물 제25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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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622 보경사 |
소재지 | 보경사 |
지정일 | 1963.01.21 |
수량/면적 | 1기 |
시대 | 고려시대 |
소유자 | 보경사 |
관리자 | 보경사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상북도 포항시 송라면 중산리 보경사寶鏡寺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비. 1224년(고종 11) 건립. 비신높이 183㎝, 너비 104㎝, 두께 17㎝.
보경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이다.
원진국사(1171∼1221)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國師)로 예우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이 비는 이수(이首)가 없고 비신(碑身)의 상단(上端) 양끝을 귀접이한 규수형(圭首形)을 하고 있다.
귀부(龜跌)와 대석(臺石)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고 귀두(龜頭)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는 용두화(龍頭化)된 것이며, 귀갑(龜甲)은 6각형의 갑문(甲紋)내에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겼고 비좌(碑座)는 단엽(單葉) 44개의 연판(蓮瓣)을 장식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얹었다. 비신의 상단에는 '원진국사비명(圓眞國師碑銘)'이라고 전자체(篆字體)로 횡서(橫書)하였으며 비문(碑文)은 "고려국보경사주지대선사증시(高麗國寶鏡寺住持大禪師贈諡) 원진국사비명병서(圓眞國師碑銘병序)"로 시작되고 있다. 특히 비석의 둘레에는 당초문양(唐草紋樣)의 독특한 장식법을 쓰고 있고 또한 고려(高麗) 중기(中期) 이후부터 나타나는 비석의 상단 양끝을 귀접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와 유사한 비석은 보광사 중창비(重創碑), 억정사 대지국사비 등에서 볼 수 있다. 원진국사는 고려 중기의 고승(高僧)으로 속성(俗姓)은 신씨(申氏)이며 이름은 휘(諱)이고 13세 때 계(戒)를 받았으며 51세 때 입적(入寂)하였다.
귀부(龜跌)와 대석(臺石)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고 귀두(龜頭)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는 용두화(龍頭化)된 것이며, 귀갑(龜甲)은 6각형의 갑문(甲紋)내에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겼고 비좌(碑座)는 단엽(單葉) 44개의 연판(蓮瓣)을 장식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얹었다. 비신의 상단에는 '원진국사비명(圓眞國師碑銘)'이라고 전자체(篆字體)로 횡서(橫書)하였으며 비문(碑文)은 "고려국보경사주지대선사증시(高麗國寶鏡寺住持大禪師贈諡) 원진국사비명병서(圓眞國師碑銘병序)"로 시작되고 있다. 특히 비석의 둘레에는 당초문양(唐草紋樣)의 독특한 장식법을 쓰고 있고 또한 고려(高麗) 중기(中期) 이후부터 나타나는 비석의 상단 양끝을 귀접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와 유사한 비석은 보광사 중창비(重創碑), 억정사 대지국사비 등에서 볼 수 있다. 원진국사는 고려 중기의 고승(高僧)으로 속성(俗姓)은 신씨(申氏)이며 이름은 휘(諱)이고 13세 때 계(戒)를 받았으며 51세 때 입적(入寂)하였다.
비는 입적 3년 뒤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당대의 문신 이공로(李公老)가 지었고 김효인(金孝印)이 썼다. 김효인은 충렬왕 때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아버지로 글씨에 뛰어났다. 따라서, 이 비문은 구양순체(歐陽詢體)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활달함을 잘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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