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전 모습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개태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본존상의 높이 4.15m, 죄협시보살의 높이 3.53m, 우협시보살의 높이 3.46m.

 

개태사는 936년에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멸망시킨 뒤 후삼국통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절로서, 이 삼존불상은 개태사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광배는 결실되고 없으나 대좌와 불신을 합친 높이가 4.15m이므로 광배까지 장륙상(丈六像 : 1丈6尺, 약 4.75m)으로 조성한 것이 분명하다. 이 불상들은 원래는 두세 부분으로 절단되어서 넘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면서 붙여 놓아 현재는 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육계를 제외한 전체 머리 모양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나, 얼굴은 이마와 눈초리 부분에서는 넓고 턱으로 내려올수록 좁아지는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눈초리 부분이 유난히 팽창되고 크고 길게 표현되어 불안(佛眼)으로서의 신비로움이나 선정(禪定)에 든 모습을 표현하는 데는 부적합한 것처럼 보인다.

 

복원후 유난히 좁은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크고 두드러지게 묘사되어 눈과 이마 사이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큰 눈에 비해 코와 입은 매우 작은 편으로, 입은 코에서 인중이 두드러져 내려오면서 곧바로 형성되었다.

이처럼 작고 빈약하게 처리된 코와 입은 9세기 후반의 불상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특징이다. 결국 전체 얼굴의 특징이나 세부적인 특징은 9세기 후반 불상들의 얼굴과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으나 너비가 넓고 깊게 새겨져 둔한 느낌을 준다. 신체는 거의 원통형에 가까운 체구로서 어깨 너비와 발목 너비가 거의 비슷하여 불균형하고 신체의 굴곡이 거의 배제된 모습이다.

즉,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상체만이 둥글게 처리되었을 뿐 신체의 굴곡이 거의 없는 괴체형(塊體形 : 덩어리 모양)의 체구를 표현하고 있다.

 

원통형의 신체와 더불어 손발이 유난히 큼직한 점 역시 이 불상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왼손을 배에 대고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한 두 손은 모두 약간씩 구부려 변화를 주고 있다.

왼손은 손가락들이 거의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조잡하게 복원하였고, 오른손은 중간의 세 손가락 끝이 절단되었다. 두 발은 유난히 큼직하고 투박한데 그냥 사각형으로 만들어 줄만 파내어 발가락을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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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상(복원후) 불신(佛身)의 둔중하고 투박한 수법은 상체를 거의 드러낸 우견편단의 법의(法衣)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내려온 대의(大衣) 자락은 배에서 무릎 아래까지를 덮으면서, 왼쪽 허리로 돌아가 왼손으로 이 자락을 잡은 것처럼 표현되었다.

어깨에서 배로 이어진 대의 자락은 띠주름을 이루고 있으며, 팔의 주름은 돌출의문〔凸型衣文〕으로서, 전체적인 옷주름은 매우 성글고 완만한 선을 이루고 있다. 발목 부근에 표현된 옷주름은 상의(裳衣 : 치마)로, 평행 계단식 옷주름인데 매우 도식화되었다.

이러한 불의의 특징은 810년의 창녕탑금당치성문기비(昌寧塔金堂治成文記碑)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9세기 초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또한 9세기 후반의 불상, 가령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상(국보 제63호)이나 축서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대좌는 사각형으로, 하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중심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꽃 테두리를 굵은 띠 모양으로 처리한 연꽃의 모습은 신라 후기의 형식과는 다른 특이한 것으로 9세기부터 나타나는 형식이다.

10세기경의 부도(浮屠)에 이러한 무늬가 나타나며 또한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의 머리관석〔頭冠石〕의 연꽃무늬와 비슷한 것이어서 같은 형식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좌협시보살상은 머리 부분을 새로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래서인지 귀로 돌아내려진 머리칼이 표현되지 않아서 어깨에 내려진 머리칼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어깨까지의 높이가 2.63m로, 무릎 부분 또한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복원해 놓았는데, 머리와 함께 세 부분으로 절단되었던 것이다.

보살상(복원후) 이 협시보살은 기본적으로는 본존불과 같은 수법이지만 어깨와 가슴 등은 본존불보다 좀더 부드럽게 처리되었다. 또한 양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는 천의(天衣) 자락은 비록 형식화되었지만 뚜렷하고 유려하게 묘사되었다.

 

우협시보살은 좌협시보살과 거의 같은 수법이나, 머리 부분이 완전하여 보살상의 특징을 좀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본존의 얼굴보다 좀더 갸름하면서 세련된 얼굴, 송나라 때의 조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행 계단식 옷주름과 팔찌 등의 표현으로 본존불과 같은 투박성도 다소 보이지만 보다 세련되고 섬세한 조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 삼존불은 후삼국통일 초기의 힘과 역량이 잘 표현되어 있다. 즉, 4m에 달하는 거구라든가 괴체감 있는 신체의 표현 등에서 굳건한 통일의 기상이 잘 드러난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태조가 지은 〈개태사창건발원문〉이 실려 있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