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명 대학의 의사가 한국 에 자문교수로 파견 나온 사례는 많지만, 해외 유명 대학병원에서 한국 의료진에게 먼저 자문교수를 제안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홍진 교수의 이야기다.
해외 전문가와 우울증 공동 연구
- ▲ 전홍진 교수
전 교수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우울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불면증이나 식욕부진 등의 증상 이 나타나도 우울증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도 사회적으로 불이 익을 당할지 몰라 치료를 미루는 경향이 있다. 전 교수는 "결국 한국인들은 장기간 우울증으로 고통받다 자살 시도 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서양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 표출을 꺼리지 않고 정신 문제에 대한 이해가 높다. 따라서 미 국의 연구를 기반으로 국내의 우울증을 연구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전 교수는 MGH 연수 중 서양의 임상 데이터를 직접 비교하며 한국의 우울증에 대해 명확하게 분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자문교수 위촉과 관련해 "해외 전문가들과 공동연구할 경우 다양한 임상 데이터를 얻을 수 있고, 연구가 설계 과정부터 함께 진행되기 때문 에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자신의 질병을 밝힐 수 있는 분위기 조성 돼야"
- ▲ 하버드대 의대 매사추세츠종합병원(MGH) 연수 당시 전홍진 교수.
전 교수는 우울증이 자살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먼저 사회적 편견을 없애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우울증 환자가 제대로 치료받기 위해서는 우울증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질환이고, 이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한다.
"서양에서도 우울증 환자가 사회적으로 곤란을 겪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1800년대 후반 미국 보스턴 지역에 서는 정신 질환이 있는 사람은 모두 마녀로 몰려 죽임 을 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정신 질환에 대한 관심이 커집니 다. 과거의 마녀사냥 등 정신 질환에 대한 잘못된 인식 을 반성하고 변화를 도모하게 됩니다."
전 교수는 "미국의 정신 질환에 대한 인식 변화에는 유 명인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우울증 등 정신 질환이 있었던 유명인이 TV 프로그램<오프라 윈프리 쇼> 등에 나와 자신의 병을 공개하고, 치료받으며 정 상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전 교수는 미국에서의 체험도 알려줬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 어느 학부모 모임에 참가했어 요. 그때 제가 우울증에 대해 연구를 한다고 하자 학부모들이 전문가처럼 질문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정신 질환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어릴 때부 터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 교수는 전했다. 그 덕분에 미국에서 정신 질환에 대한 편견 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문제가 나타나도 적절한 해법을 찾기 쉬운 것이라고 전 교수 는 분석했다.
자살예방 예산 턱없이 부족한 한국, 정책적 변화 절실
전 교수는 우울증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면 국가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덴 마크·스웨덴·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의 예를 들었다. 이 나라 국민들은 경제적으 로 여유롭지만 상대적으로 자살률이 높았다. 일조량 부족으로 우울증에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핀란드와 덴마크 정부는 전 국민의 정신건강평가를 주기적으로 시행했다. 이를 계기 로 자살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전 교수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서는 사람들이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모범 사례가 미국 보스턴이다. 지난 6년간 보스턴의 75세 이상 노인 자살은 한 건도 없었다. 보스턴만의 독특한 '튜터링' 정책 덕분이다. 보스턴에 거주하는 외국인 이 도서관에 등록하면 지역 노인과 연결돼 문화적 교류를 하게 되며, 이를 통해 노인들은 사회 적 관계를 맺고 자연스럽게 우울증을 완화·예방할 수 있다고 전 교수는 전했다.
전 교수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자살예방 예산이 매우 적다"고 한탄했다. 서울시의 정신보건 및 자살예방 예산은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20분의 1에 불과하다. 전 교수는 "우리나라는 국 민 1인당 소득 3만 달러를 바라보는 선진국"이라며 "인식과 정책의 변화를 통해 전 국민이 정신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외국 전문가와의 꾸준한 교류를 통해 우리나라의 우울증 문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할 것이라고 밝혔다.
/ 이현정 기자 lhj@chosun.com
사진 조은선 기자
사진제공 삼성서울병원
월간헬스조선 2월호(118페이지)에 실린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