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b9ffc122b92f6292ad38f1f83b4d564.JPG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5.3m.

 

삼국사기》에는 이 절의 창건에 관한 두 가지 설이 있다. 748년(경덕왕 7) 왕의 총신(寵臣) 이준(李俊/李純)이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개창(改創)하여 단속사라 하였다는 설과, 763년(경덕왕 22)에 현사(賢士) 신충(信忠)이 벼슬에서 떠나 지리산에 들어가 삭발하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하였다는 설이다.

 

통일신라 이래의 고찰(古刹)로서 고승이 속출하여 1,000여 년의 법통을 이어왔는데, 1568년(선조 1) 유생(儒生)들에 의해 불상(佛像)·경판(經板) 등이 파괴되고, 이어서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타버린 후 재건되었으나 현재는 폐사가 되어 있다. 이 곳에는 현재 보물로 지정된 단속사지 동삼층석탑(東三層石塔, 보물 제72호)과 서삼층석탑(보물 제73호)이 있고, 윗부분이 떨어져나간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다.

이 밖에도 신라·고려 때의 이름난 승려들의 부도(浮屠)와 탑비가 많이 있었던 모양이나 지금은 몇몇 고승의 비신단편(碑身斷片)의 탑본(?本)만이 전할 뿐이다.

 

단속사 터에 동서로 세워진 쌍탑 중 동탑으로 2층기단 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양식의 방형 삼층석탑이다.

하층기단은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을 한데 붙인 4개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면석은 비교적 높은 편으로 면마다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2개씩 모각되었다.

 

갑석(甲石)은 두툼하고 윗면은 약간의 물매를 잡았으며, 중앙에는 단면이 직각과 모를 둥글게 죽인 2단의 굄을 각출하여 상층기단의 면석을 받치게 하였다.

 

상층기단의 면석은 4매의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한 장으로 된 갑석을 얹었다. 각 면에는 우주형과 중앙에 탱주 하나씩이 각각 모각되었고, 갑석은 밑에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으며, 윗면에는 하층기단과 같은 2단의 굄을 각출하여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를 각각 따로 만들었는데, 옥신에는 알맞은 크기의 우주를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옥개석은 비교적 얇은 편인데 수평을 이룬 처마 밑에는 5단의 받침이 있고, 지붕면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의 끝에서 가볍게 반전하였다. 지붕의 중앙에는 굄을 각출하고 처마의 네 귀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까지 남아 있는데, 노반에는 부연이 붙은 갑석형을 각출하였고, 복발은 편구형(扁球形)에 두 가닥의 띠를 두른 양식이며 앙화는 2단의 받침 위에 팔화(八花)를 돋을새김하였다.

이 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균형이 알맞아서 안정감이 있고, 돌다듬기의 수법 또한 정연하여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