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해남군 삼산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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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
사진출처 : | 20091226촬영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頭輪山)에 있는 절.‘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이 절은 426년(구이신왕 7) 신라의 정관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하여 만일암이라 하였고, 508년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善行比丘)가 중건하였다는 〈만일암고기〉의 기록과 514년(법흥왕 1)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하는 〈죽미기〉의 기록이 있다.
또 895년(헌강왕 11) 도선(道詵)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00사찰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하였는데, 대흥사도 그 중의 하나라는 설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았던 혜장(惠藏)은 이들 기록이 창건자의 활동시기로 볼 때 모두 신빙성이 없다고 보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사은(思隱)·성유(性柔) 등 세 승려의 부도(浮屠)가 있었다고 했는데, 이들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없으나 고려시대 승려이므로 대흥사가 고려 이전에 창건된 것은 확실하므로, 혜장이 주장한 신라 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에는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였다.
이 절이 크게 중창된 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대흥사를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라고 보고 자신의 의발(衣鉢)을 대둔산에 전할 것을 부촉(咐囑)한 임진왜란 뒤의 일이다. 1607년(선조 40) 해남의 외딴 곳에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배려에 의해서 이 절은 배불(排佛)의 강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그 뒤 1665년(현종 6)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1669년(현종 10)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으며, 1811년(순조 11) 천불전이 불타자 1813년 완호(玩虎)와 제성(濟醒)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흥사는 배불의 그늘 속에서 수많은 강사와 종사를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고승은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이다. 13대종사를 출생순으로 열거하면, 해동화엄종의 중흥조로 존경받았던 의심(義諶), 담론(談論)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던 삼우(三遇), 화엄(華嚴)의 도리와 백가(百家)에 통달했던 도안(道安),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칭송받았던 문신(文信),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가졌던 추붕(秋鵬),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회를 열었던 지안(志安)이 있다.
그리고 그 학문이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대우(大愚), 검소와 청빈의 생활로 평생을 살았던 회정(懷淨), 문자를 떠난 곳의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의 근원을 찾도록 가르쳤던 새봉(璽封), 대흥사의 정진당(精進堂)에서 늘 화엄법회를 열었던 체정(體淨), 인욕행이 남달리 뛰어났던 해원(海源), 대승경전에 통달하여 많은 저술을 후세에 남겼던 유일(有一),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이름난 의순(意恂) 등이다.
13대강사들은 모두가 제10대 대종사였던 체정의 문도로 원오(圓悟)·광열(廣悅)·영우(永愚)·승제(勝濟)·성규(聖奎)·정일(鼎馹)·태관(泰瓘)·행인(幸仁)·복혜(福慧)·윤우(尹佑)·시연(示演)·혜장(惠藏)·각안(覺岸) 등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대흥사의 옛모습은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북원은 대웅보전·나한전·시왕전(十王殿) 등 24개 소의 당우가 있었고, 남원은 극락전·대장전(大藏殿)·지장전 등 12개 소의 당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문제점이 있다. 대흥사의 현재의 사역(寺域)은 북원보다 남원이 훨씬 넓은데도 좁은 북원 쪽에 더 많은 당우가 집중적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흥사는 사지(寺址)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金塘川)의 냇물을 중심으로 가람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고, 지금도 남원·북원이라고 한다. 또, 남원·북원의 법당들은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별원(別院)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북원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군(一群)과 남원의 중앙부에 있는 천불전과 서산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한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草衣)가 중건했던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심으로 한 일곽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의 편액이 있으며, 이 건물은 현재 큰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웅보전 동편에는 응진전(應眞殿)이 있으며,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 앞에는 보물 제320호인 응진전전삼층석탑(應眞殿前三層石塔) 1기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라고 한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인 천불전은 1811년(순조 11) 불탄 뒤 1813년에 중건한 것으로, 내부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천불상은 옥돌로 만든 것으로, 완호 등 10인이 6년에 걸쳐 경주 옥돌로 조성하였다. 천불이 완성된 뒤 해로를 통하여 이 절로 옮기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일본에 닿게 되었으나, 일본인들의 꿈에 이 천불이 나타나서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둔사로 가는 중’이라 하여 다시 대흥사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천불전 좌우에는 불경을 배우는 학승들이 기거하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인 용화당(龍華堂)과 강사가 기거하는 건물이 있으며, 정면에는 가허루(駕虛樓)가 있다.
표충사는 대흥사의 사격(寺格)을 말해 주는 대표적인 건물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공훈을 세웠던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四溟)과 처영(處英)의 영정을 봉안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 일원의 당우 배치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표충비각(表忠碑閣)과 조사전(祖師殿), 정면에 삼문(三門), 삼문 밖에는 2층 누각인 의중당(義重堂)과 앞쪽으로 중문인 예제문(禮齊門)과 정문인 호국문(護國門)이 있다. 또, 의중당의 동쪽에는 서산대사의 유품을 비롯하여 절의 유물(遺物)을 보관하는 서산대사유물관이 있다. 표충사의 건물은 1789년(정조 13)에 건립되었고,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며, 정면 3칸의 맞배집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인 대광명전은 표충사 동쪽 300m 지점에 있으며, 조선 후기 초의가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이 지역을 동국선원(東國禪院)이라고 부른다.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석가불의 삼신불을 봉안하였고 ‘井’자의 천장에는 연화문과 운학(雲鶴)을 그렸다. 이 연화문과 운학 문양은 그 색채뿐 아니라 문양 자체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뛰어난 작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초의가 직접 단청을 하였다고 한다.
대광명전 옆에는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전면 8칸의 보련각(寶蓮閣)과 요사채가 있다. 이 밖에도 대흥사 역대 고승들의 부도와 비석을 봉안한 비전(碑殿)이 있다. 이 비전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서산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대흥사 13대종사와 13대강사 등의 부도 및 비가 있다.
지정문화재 목록 및 해설
『대둔사지』약기[大芚寺志略記]
전라도 해남현은
서울 숭례문으로부터 1천 7리 거리가 되는 곳에 있다.
백제 때의 이름은 새금(塞琴)이고
신라 때의 이름은 침명(浸溟)이며,
고려 때의 이름은 해남(海南)이다.
본조 태종대왕 때에 해진(海珍)이라고 이름을 짓고
세종대왕 때에 다시 해남이라고 바꿨으며,
지금은 당악(棠岳)으로 부르기도 한다.
북쪽으로는 영암까지 80리가 되고
동쪽으로 강진까지 30리,
서쪽으로 진도까지 1백 리,
남쪽으로 제주까지 9백70리가 된다.
또 동쪽 병영(兵營)까지는 60리이고
서쪽 수영(水營)까지도 60리 거리가 된다.
그리고 해남 해안문(海晏門)에서 남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두륜산 대둔사가 있다.
웅장하게 지축을 휘감고 서리어,
자리 잡고 있는 터만 해도 55리나 된다.
동쪽을 등지고 서쪽을 향하고 있으니
하늘이 내린 견고한 요새라 하겠다.
동쪽에는 서기령(曙氣嶺)이 있고
남쪽에는 해임령(海臨嶺)이 있으며
서쪽에는 오도령(悟道嶺)이 있고
북쪽에는 구곡 시내[九曲水]가 흐르고 있다.
한 줄기 물이 아홉 구비의 시내[九曲溪]를 이루었고,
구비마다 다리를 놓아 산문으로 들어가는 길을 만들었다.
밖에서 보면 그 안에 이렇게 큰 절이 있다는 것을
도저히 알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두륜(頭輪)과 가련(加蓮)의 두 봉우리가
주산이 되어 하늘을 떠받치면서,
방장산(方丈山)과 제주[瀛洲]와 더불어
서로 백중을 겨루고 있다.
산 안에는 두 개의 큰 골짜기가 있으니,
왼쪽은 장춘동(長春洞)이고
오른쪽은 금강동(金剛洞)이다.
그리고 이 두 골짜기가 한 계곡으로 합쳐지는
가운데 자리에 바로 대둔사가 있다.
배가 움직여 나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자리는
신라의 고승 아도 화상이 점을 쳐서 정한 곳이다.
대둔사는 양 나라 무제 천감 13년,
신라 법흥왕 15년 갑오(514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그 후 수 나라 대업 13년 신라 진평왕 39년 정축(617년)에
원효국사가 재건하였으며,
당 나라 개성 원년 신라 희강왕 원년 병진(836년)에
자장법사가 세 번째로 중건하였다.
또 당나라 의봉 원년 병자**에
의상조사가 네 번째로 중건하고,
당나라 건부 2년 신라 헌강왕 원년 을미(875년)에
도선국사가 다섯 번째로 중건하였다.
신라 말엽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의 사적은
문헌이 없어 고찰할 수 없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은 후 명나라 만력 31년에
선조 36년 계묘(1603년)에 청련(淸漣)과 원철(圓徹) 조사가 다시 세웠고,
청나라 강희 4년 을사(1665년)에 심수(心守) 비구가 다시 중창하였다.
삼한과 삼국 이래로 사찰의 크고 아름다움은 나라 안에 제일이라 하였고,
성곽처럼 겹겹 둘러싼 산세로 삼남 지역에 이름을 날렸다.
아홉 구비 긴 계곡이 굽이쳐 흐르니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중국 무이(武夷) 땅 같다고 칭찬하였다.
진중(秦中)의 우공산천(藕孔山川)이나 호중건곤(壺中乾坤)과 같다는 것도
사방의 문을 높이 걸고 내다보는 경치가 뛰어나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런 대둔사와 두륜산의 형세와 절경 및 흥망성쇠는
중관 해안(中觀海眼) 대사가 지은 『죽미기(竹迷記)』 1권과
다산 정약용이 지은 『대둔지(大芚志)』 2권에 전해진다.
대둔사에는 또 표충사(表忠祠)가 있다.
서산대사가 입적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유언하셨다.
“내가 죽은 뒤에는 내 가사와 바리를
전라남도 해남현 두륜산에 있는 대흥사에 전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해마다 내가 죽은 날에는 재를 받들게 하여라.
그것은 첫째는 나라에 부지런히 충성하는 공을 영원히 이어 가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혁혁한 공을 세운 자취를 영원히 보존하려는 것이다.”
제자들은 엎드려 아뢰었다.
“저희 제자들만 해도 벌써 천 여 명이나 됩니다.
또 우리나라 안에는 금강산이나 묘향산 같은 명산과 대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뜻으로 이것을 두륜산에 전하라고 하십니까?”
스님은 말씀하였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내가 그리 하라고 시키는 뜻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냐?
두륜산은 바다 한 귀퉁이에 치우쳐 있어서 산이 비록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나는 세 가지 이유에서 그곳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첫째 이곳은 진기한 꽃과 풀 따위가 철마다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면과 비단 등 직물과 온갖 농산물은 풍족하게 영원토록 줄어들지 않을 땅이다.
그러므로 나는 두륜산은 영원히 오래오래 보존될 땅이라고 보는 것이다.
북쪽에는 월출산(月出山)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으며
남쪽에는 달마산(達摩山)이 지축을 휘감아 서리어 있다.
또 동쪽에는 천관산(天冠山), 서쪽에는 선은산(仙隱山)이 우뚝히 솟아
서로 마주 바라보고 서있다.
바다와 산이 사방에서 호위하고 구름과 골짜기가 깊고도 멀어서,
실로 그곳은 영원히 기세가 기울지 않을 땅이니라.
그리고 둘째는,
국왕의 감화가 천리 밖에까지는 모든 일에 두루 미쳐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 하늘 아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 하나,
그렇게 멀리 떨어진 땅에서는 나라를 향한 충성심이 일어나기 어려운 법이다.
비록 내가 세운 공이 별로 대단한 것은 못 되지만,
주상 전하의 깊은 은혜를 이 물건들을 보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왕의 교화를 드러내 보여 줄 수 있다면,
어찌 후세에 나무 위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되어
그 땅의 우매한 풍속을 깨우쳐 바로잡는 효과가 있지 않겠는가.
또 셋째는, 처영 등 나의 여러 제자들이 모두 남방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중이 되었을 때에 그들과 함께 두륜산에서 법을 들었더라.
그러니 그곳이 바로 종통의 돌아갈 곳이니라.
그곳을 어찌 소중히 여기지 않겠는가.
이상의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내가 뜻을 이미 정했다.
너희들은 내 유언을 그대로 지켜서,
내 가사와 바리를 꼭 그곳으로 보내도록 하여라.
또 선조 대왕께서 내리신 “대선사(大禪師)”의 교지를
두륜산에 옮겨 간직하여라.”
이러한 사실은 『보장록(寶藏錄)』 제1권에 실려 있다.
건륭 53년 무신, 우리 정종대왕 12년(1788년)
왕께서는 사당을 세우도록 명하고 사액을 내리셨다.
두륜산에 지은 사당은 표충사라 하고
묘향산에 지은 사당은 수충사(酬忠祠)라고 하여,
사명대사와 뇌묵(雷墨) 대사를 좌우에 배향하였다.
그리고 다시 7년이 지난 갑인년에는
서산대사 화상찬(畵像贊)과 당명(堂銘)을
임금이 직접 지으셔서 본원에 내리셨다.
주상 전하의 찬란하게 빛나는 문장은
우리 산문에 만세를 전할 보배가 되었다.
관가에서 제수를 마련하여 주었고,
조세를 면제하는 복호 토지 5결과 보솔 30명을 내리어
2월과 8월 가운데 정일(丁日)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동치 11년 신미(1871년)에 부역을 면제하는 일과 보솔이 취소되었기에
절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한식과 중양절에만 차례를 올리기로 하였다.
또 비변사에서는 두륜산의 소나무 채벌을 금하고
대둔사에서 잣기름을 진상하도록 명령하였기에,
이곳이 나라를 위하여 복을 비는 대가람이 되었다.
정해년 봄에는 새로 산제당을 세워
해마다 한번씩 복을 빌도록 하였다.
산의 고요함과 절의 장엄함에 대해서는
정다산의 「산성론(山城論)」 1편과
송파 이희풍(松坡 李喜豊)의 「산성론」 1편에 자세히 실려 있다.
또 제주도가 바라보이는 자리에
제주 목사와 판관, 대정(大靜) 현감, 정의(旌義) 현감의 직책을 맡은
네 사람이 들어와 자면서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이 곳은 배를 타는 중요한 길목이 되기 때문이다.
절 안에는 8도의 이름난 스님의 비석을 세워둔 집이 있다.
비원(碑院)에는 탑이 51기가 있고 비는 16기가 있으니,
모두 고금에 빛나는 명승들의 유적이라
보는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할 만한 것들이다.
여기에는 장계곡(張磎谷)이 지은 서산대사비(西山大師碑)와
김우형(金宇亨)이 지은 풍담 의심(楓潭義諶) 스님의 비석,
이덕수(李德壽)가 지은 월저 도안(月渚道安) 및
설암 추붕(雪巖秋鵬) 스님의 비석이 있다.
그리고 홍계희(洪啓禧)가 지은 환성 지안(喚惺志安)과
호암 체정(虎巖體淨) 스님의 비석이 있고,
번암 채제공(蔡樊庵濟恭)이 지은 상월 새봉(霜月璽?) 스님의 비석,
김상복(金相福)이 지은 함월 해원(涵月海源) 스님의 비석,
이충익(李忠翊)이 지은 연담 유일(蓮潭有一) 스님 비석이 있다.
또 채희암(蔡希庵)이 지은 대둔사사적비(大芚寺事蹟碑),
열수 정약용(丁洌水若鏞)이 쓴 연파 혜장(蓮坡慧藏) 스님 비석,
서유린(徐有麟)이 쓴 표충사비(表忠祠碑),
이제 권돈인(權?齊敦仁)의 완호 윤우(玩虎尹祐) 스님 비석,
남병철(南秉哲)의 철선 혜집(鐵船惠楫) 스님 비석 등이 있다.
침계루(枕溪樓)에는 시인들이 읊은 시를
현판에 이어서 도리 위에 걸어 두었다.
여기에는 백호 임제(白湖林悌)와 석천 임억령(石川林億齡),
옥봉 백광훈(玉峯白光勳), 청음 김상헌(淸陰金尙憲),
이천 이홍주(梨川李弘?), 천연 이석보(天然李奭輔),
고산 윤선도(孤山尹善導), 송호 백진남(松湖白振南),
낙서 윤덕희(駱西尹德熙), 열수 정약용(冽水丁若鏞),
문암 민철호(門巖閔哲鎬), 유산 정학연(酉山丁學淵),
백파 신헌구(白坡申獻求), 청전 이학래(靑田李鶴來)가
지은 시들이 걸려있다.
*원문에는 “법흥왕 15년”이라 되어 있으나, 양무제 13년은 신라 법흥왕 원년이며 지증왕 즉위년으로 계산할 경우에 15년이 된다. 따라서 원문에 있는 “법흥왕 15년”은 “지증왕 15년”과 “법흥왕 원년”이 섞여서 생긴 오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기 676년이다. 앞의 연대와 모순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교통안내
해남읍 버스터미널 앞에서 완도 방면 13번 국도를 따라 읍내를 벗어나면 길 왼쪽으로 대 둔사 가는 827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827번 도로로 가다보면 신기리에서 두 갈래 길인데 오른쪽 807번 지방도로로 계속 가면 대 둔사 입구 숙박단지가 보인다. 숙박단지 끝에 있는 대둔사 앞에서 절까지 경내버스가 수시 운행.(해남읍에서 숙박단지까지 약 9.5km)
현지교통
해남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둔사행 군내버스 이용 / 30분 간격 / 25분 소요(절입구 매표소 아래 종점까지). 종점에서 절까지 걸어서 30분 소요.
주변관광지
등산코스
▷ 종주로 : 매표소-장춘동-능선-고계봉-오소재-능허대-가련봉(정상)- 만일재-두륜봉(구름다리)- 도솔봉-작전도로-혈망봉-오도재- 향로봉-능선-상가촌 (8시간소요)
▷ 1코스 : 매표소-장춘동-대흥사-삼거리-북암-오소재-능허대-가련봉(정상)-천년수(만일암터)-일지암 -삼거리-표충사-대흥사
▷ 2코스 : 매표소-장춘동-대흥사-삼거리-북암-천년수(만일암터)-만일재-두륜봉(구름다리)-진불암-물 텅거리골-표충사-대흥사(4시간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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