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08.jpg 조선 후기의 정조가 그린 국화도. 종이 바탕에 수묵. 세로 86.5㎝, 가로 51.3㎝. 동국대학교도서관 소장.

 

보물 제743호인 〈정조대왕필파초도 正祖大王筆芭蕉圖〉와 쌍폭〔對聯〕으로 간주된다. 이 둘은 여러 폭으로 된 병풍에서 떨어져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전래된 그림으로는 서울대학교에 소장된 대폭의 〈묵매 墨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전칭작인 〈이금사군자병 泥金四君子屛〉, 1987년 일본 야마토문화관(大和文華館)에서 개최된 조선의 병풍 특별전(1987.4.2∼5.10.)에 출품된 〈군자화목도병풍 君子花木圖屛風〉 등이 있다.

국화는 서기전 중국의 고전인 ≪초사 楚史≫·≪예기 禮記≫ 등에 이미 언급된바, 특히 동진(東晋)의 전원시인 도잠(陶潛)의 시 〈음주 飮酒〉 이래로 줄기차게 시인묵객들에 상찬되던 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국화를 재배하였고 중국이나 일본에 신라국(新羅菊)·백제국(百濟菊)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전래된 당시 그림은 없으나 대체로 중국과 같은 양상으로 국화가 그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청자나 분청사기에 들국화〔野菊〕가 주문양(主文樣)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 청화백자나 산수화에 부분적으로 국화가 등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묵국(墨菊)으로서는 이산해(李山海) 필로 전해지는 개인 소장품 한 폭과 17세기 중엽에 활동한 홍진구(洪晋龜) 등이 그린 소폭이 있을 뿐이다.

매화나 대나무가 조선 중기(1550∼1700경) 화단에서 우리적인 정형(定型)을 이루는 것과는 달리 국화는 오히려 난초보다도 늦게 그려진 듯하다.

즉, 18세기 이후 조선 후기 및 말기 화단에서 근대로 이르면서 크게 성하였다. 18세기에 문인화가 이인상(李麟祥)의 〈병국도 病菊圖〉, 강세황(姜世晃)의 〈사군자 四君子〉·〈국충도 菊蟲圖〉 등이 정조에 선행한 그림들이다.

특히 강세황의 경우 그림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충이 함께 그려졌으며 괴석(怪石)이 등장하는 등 정조의 〈국화도〉와 공통점이 보인다.

이와 같은 국화에 괴석을 곁들인 일반적인 양식은 말기 화단으로 이어진다. 허련(許鍊)·허형(許瀅) 부자와 김수철(金秀哲신명연(申命衍) 등을 비롯하여 도식화된 청화백자의 문양으로도 조선 말기에 등장된다.

아울러 야마토문화관에서 출품된 병풍의 예와 같이 국화 한 가지만이 아닌 사군자 및 연(蓮)·오동(梧桐)·모란(牡丹)·파초·소나무〔松〕·포도(葡萄) 등과 함께 6곡 또는 8곡 이상의 병풍으로 일괄하여 그려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