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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당(書百堂)이 있는 줄기의 배후 등성이에 높이

앉혀진 서향집이다.

대문채는 3간(間)이며 가운데가 문간이고 남쪽 1간은 행랑방이며 북쪽은 외양간이다(옛날에는 마구간이었다고 함).

대문채와 사랑채 사이는 넓은 마당이며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대청이 곧바로 건너다 보인다. 마당의 북변에 4간의 광채가 대문채에 접해서 一자로 세워졌고 광채와 대문채 사이에는 일각문을 두어 연결짓고 있다. 이 광채는 3간이 광이고 안쪽 끝간은 1간의 온돌방이다. 이 온돌방은 문간과 사랑채의 넓은 마당 중간을 점하는 연계점이 되며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하는 주위 관리에 필요한 청지기 방이었다고 생각된다. ㅁ자 안채에 一자 사랑채가 부설되는 일은 보통 있는 예이지만 넓은 사랑마당과 그 광채를 여유있게 안배한 예는 흔치 않은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넓은 마당에는 또 통가리를 설치하는 등 과거 농업생산 위주의 재산관리에도 필요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랑채의 기능과 비중도 그만큼 증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는 마당에서 나직한 기단상(基壇上)에 一자로 세워진 5간집이며 2간 대청과 2간의 온돌방, 2간전퇴(間前退)로 4간이 구성되고 안쪽 1간은 간반통(間半通)(2간크기)의 부엌인데 안채의 부엌 아랫방 및 연접된 찬광(마루방)과 직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에서 안으로 내왕하는 쪽대문과 긴 토방을 이 부엌 앞에서 가로 내었다. 안채도 지대에서 나직한 기단 위에 세웠다. 대개의 대가(大家)들은 사랑채와 안채를 드높은 기단 위에 세우던 것이 통례여서 양동(良洞)에서도 이렇게 낮은 기단은 흔치않은 예에 속한다 하겠다.

안채도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5량집이긴 하나 대청끝에 전퇴주(前退柱)를 세우지 않고 툇마루를 부설하였다. 안채의 기능은 통례대로 안방과 대청, 건넌방 그리고 부엌으로 나뉜다. 부엌은 3간이나 되는 여유있는 안배를 보이고 있으며 그 끝은 부엌 아랫방의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대청마루 건넌방은 너비가 5척 미만의 좁은 마루방인데 영남대가(嶺南大家)들에 간혹 보이는 대청고방이다. 이 고방 아래쪽에 연접되는 온돌방은 대청마루의 툇마루와도 물리어져 있는 안사랑방(혹은 작은사랑)이다. 안사랑방 아래로는 헛청 1간과 광 1간이 달려 있으며 헛청은 안사랑 부엌기능도 겸하고 우물이 있는 뒤울안으로 통하는 뒷문을 두었다.

안채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면한 아래채(행랑채)는 중심에 안대문간을 두고 사랑쪽으로는 3간의 행랑방(온돌방)을 두었으며 반대편에는 3간의 간막이 없는 광을 두고 있다. 여기의 대문이 본래의 안대문이며 통상 안에서 출입하는 문이다. 앞에 쓴바와 같이 사랑부엌 앞에 붙은 쪽대문은 사랑방 심부름을 위한 일각문이고 안사랑 밑에 달린 뒷문은 샘물을 길어 나르기 위한 협문이어서 각 문은 제가끔 명확한 기능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대문과 사랑채 그리고 안채가 모두 같은 방향인 서향이다. 이 점은 그 아래 손동만씨의 서백당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물(勿) ”자의 한획에 해당하는 배산(背山)줄기가 북에서 남주(南走)하고 있어 자연히 배산임계(背山臨溪)의 원칙을 따른 것이다. 기둥은 모두가 방주(方柱)이나 사랑채의 전열주(前列柱) 5개와 내주(內柱) 1개는 원주(圓柱)이다. 사랑채 기둥머리에는 첨차와 단익공(單翼工)을 받쳐 소위 초익공(初翼工)집으로 치장하였다. 처마는 내외채가 모두 홑처마이다. 내외채의 기단(基壇)이 높지않은 점과 내당에는 두리대주(大柱)를 쓰지 않은 점, 그리고 툇마루의 퇴주(退柱)를 생략한 점, 내외대청에 분합문이 생략된 점등으로 보아 비교적 실용에 치중한 간소한 구조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