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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25년(1592) 부산첨사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김호가 살았던 집이다. 17세기전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집터는 신라시대 절터였다는 설이 있는데, 주변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석조물이 있고 마당의 우물돌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김호의 후손 김헌용이 사망하여 지금은 큰아들 김철하가 관리하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운 김호(金虎)의 고택이라고 가전(家傳)되어 오는데 적어도 400년은 충분히 되었을 것이라고 후손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 댁은 경주의 남산서록(南山西麓), 오릉(五陵)에서 들어가는 어구에 위치한 마을의 끝에 자리잡았는데 신라시대의 절터였다는 설이 있다. 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초석(礎石) 등 석조물들이 흩어져 있는데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우물돌도 있다. 또 삼국시대 초기의 연화(蓮華)무늬 숫막새도 수습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될 당시엔 토담 밖에 없었던 것을 그 후에 남쪽편으로 솟을삼문형 대문을 세웠는데 그 담장의 신조(新造)와 함께 안채와는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지정조사시의 대상은 기와이은 맞배지붕의 안채와 초가집인 뜰아래의 아래채 및 안채, 동북방에 있는 가묘(家廟)이었다. 안채의 평면은 一자형의 외줄박이 홑집이다. 정면 좌측부터 부엌(일간반(一間半)), 방, 고방, 방(각 1간식)으로 통칭 3간집이라 부르는 그런 유형이다. 삼간집에서는 부엌은 통상 제외하는 것이어서 이런 사간반 집도 삼간집이라 범칭되는 것이다. 각 간의 주간(柱間)은 같으나 건넌방만은 약간 좁아졌다. 건넌방은 다른 간에 비하여 하방(下枋)의 높이도 높다. 그리고 동측면에 작은 문짝을 달았다. 나지막한 뒷동산을 뒤에 두고 있는 터전은 북고남경(北高南傾)의 사면(斜面)을 이루고 있어서 안채의 뒤쪽 댓돌은 외벌대이고 앞쪽은 세벌대의 높이로 만들어야 하였다. 산석(山石)을 주초(柱礎)로 하여 방주(方柱)를 세웠다. 기둥머리엔 민도리를 얹었고 장혀는 없으나 문이 달리는 부분에서는 문인방을 두어서 장혀를 대신할 수 있게 하였다. 기둥에 벽선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앞퇴도 쪽마루도 없이 보석(步石)딛고 바로 방문을 열고 들어서게 된다. 고방과 건넌방도 마찬가지이다. 저상식 (低床式)의 구조만이 아직 고수되고 있는 원초형(原初形)이라 할 수 있으나 고방(庫房)을 판상(板床)하여서 구조상 고상형(高床形)과 절충됨이 있음을 보인다.

이 집에서 주목할 점은 처리한 기법들이 고식(古式)이라는 점과 고방(庫房) 앞에 문짝을 달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래채 굴뚝이 부엌의 부뚜막에 있다는 남방식 요소의 특징과 함께 이 집을 지정하게된 학술적인 가치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상청(上廳)에 문짝을 다는 예는 안동지방 북쪽에서는 드물게 발견된다. 안동군 녹전면 일대가 북방의 한계선인듯이 보이는데 이런 집들은 경주, 월성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그런 집들 중에서 고식을 보이는 유례(類例)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일대의 기와집은 대략 삼량가(三樑架)의 맞배집이다. 맞배집의 박공은 각각의 특색을 지녀 묘미가 넘치는데 이 집은 그 중에서도 고식이란데 값이 있다. 아래채는 소박한 초가로 동향하였고 부엌은 북단에 있다. 간반(間半) 크기이고 다음이 방, 또 방이고 남단이 우물마루깐 대청이다. 대청은 방에 면한 부분 외에는 삼방(三方)이 개방되었다. 일종의 내루(內褸)와 같은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초가의 질박한 구조인 점은 다른집과 다를바 없으나 방에 불 지핀 연기가 빠지는 굴뚝이 부엌 부뚜막의 서쪽 끝에 시설되어 있다. 이런 구조는 남해(南海)의 사량도(蛇梁島) 등에서도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지방에서는 많은 불을 때어야 하므로 아궁이의 반대편에 굴뚝을 단단히 세워야 하였으나 남쪽에서는 약간의 불기만으로 만족 되었으므로 이런 시설을 하고 대신 숙화용(宿火用)의 시설을 거기에 하여서 이중의 효과를 얻으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