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여준 신학문을 수용한 청년, 개혁적 자강운동을 꿈꾸다

문성식 2013. 12. 16. 15:41

여준 서간도 독립운동의 지표를 제시한 선각자

신학문을 수용한 청년, 개혁적 자강운동을 꿈꾸다

2012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여준 선생의 위패.

여준(呂準, 1862~1932) 선생은 1862년(철종 13년) 죽산군 원삼면 죽릉리(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릉리)에서 아버지 규필(圭弼)과 어머니 해주 오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이며 본명은 조현(祖鉉), 자는 성무(聖武), 호는 시당(時堂)이다. 선생의 부인 역시 해주 오씨이며, 1906년경 혼인하여 이름이 운달(運達)인 아들을 하나 두었다.

여준 선생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이나 증언은 없어 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의 행적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1880년대 선생이 20살을 넘긴 시기부터이다. 선생은 향리에서 기초적 학문을 습득하다 성년이 되어 서울로 가서 교우 관계를 넓히며 학문적 깊이를 더했다. 여기에는 재당숙(7촌)이 되는 여규형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규형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 남부 호현방 회동(현 중구 회현동 일대)에 살고 있었다. 근처에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였던 이상설(李相卨, 1870~1917)과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 1869~1953) 등이 살았다. 따라서 7촌 조카인 여준을 이들에게 소개하고 어울리게 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20대 시절에 이상설, 이회영, 이시영, 서순만, 이범세 등과 어울려 한학뿐 아니라 신학문도 섭렵하였다. 24세 되던 해인 1885년에는 이들과 신흥사에서 8개월간 합숙하며 한문, 수학, 영어, 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기도 했다. 이때 이시영은 여준을 두고 절재(絶才)로 칭송하며 그의 학문적 깊이를 극찬하였다.

선생은 신학문에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과거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7세가 되던 1888년에 선생은 관학인 성균관과 사학(四學)에 재학하는 유생을 대상으로 치루는 응제(應製)에 응시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이것은 당시 여규형의 관직 생활이 순탄치 못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삼국간섭과 이어 벌어진 을미사변 등으로 급변하고 있었다. 또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간섭이 심화되고 친러 세력이 득세하였다. 이때 지방 유림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을 몰아내기 위한 의병을 일으켜 봉기하였으며, 개화 세력은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외세 배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시국 속에서 1898년 9월 여준 선생은 이상설, 이회영 등과 함께 남산의 홍엽정에 올라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국을 토로하며 그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했다. 그들은 우선 이천만 동포를 깨우치고 일으켜 세워 민지(民智)를 계명하고 정치를 쇄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야 문화가 발전하고 풍기가 선명해져서 독립과 자유가 완전해지고, 세계 열강과 나란히 경쟁한 다음에야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어 이상설의 집에 서재를 만들어 수시로 회합을 가지며 정치ㆍ경제ㆍ법률ㆍ동서양사 등 신학문에 관한 책들을 강독하며 서로 열띤 토론을 하였으며, 신학문 서적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또한 개화 혁신을 통해 국가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새로운 방도를 준비하고자 하였으며, 국가의 자주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할 계획도 세웠다.

이와 함께 여준 선생은 중국의 양계초(梁啓超)가 지은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애독하였다. 당시 개혁적 자강운동가들은 나라를 구하고 자강혁신을 통해 부국강병을 위한 방략을 사회진화론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음빙실문집]을 통해서였다. 여준 선생도 이 책을 통해 국가의 자강혁신을 위한 방법을 구하려 한 것이다.

간도 지역 민족 교육에 앞장선 서전서숙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는 과정에서 격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던 애국지사들은 당시 민중의 태도를 보고 느낀 바가 많았다. 처음에 상소운동과 가두연설을 통해 민중의 호응을 이끌어 내려 하였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백성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육계몽에 눈을 돌렸다.

여준ㆍ이상설ㆍ정순만ㆍ이동녕 등도 황무지 개척권 양여 반대 운동과 을사늑약 강제 체결 반대 운동을 통하여 민중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 교육을 위해 1906년 10월 북간도 연길현 용정촌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우게 되었다.

이상설 등의 일행은 용정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에서 제일 큰집인 천주교 회장 최병익의 집을 사들여 1906년 10월경 건물을 개수하여 서전서숙을 세웠다. 이때 학교이름을 서전서숙이라 한 것은 ‘서전(瑞甸)’이 그곳 지방을 총칭하는 지명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서전서숙을 세우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본 관헌의 검문을 피하기 위하여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처음 학교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금을 내어 운영하였다. 학교는 이상설이 숙장으로 총괄하며 이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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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준 선생이 제2대 숙장을 맡아 운영에 관여했던 서전서숙.

90년대 초 서전서숙의 모습.

서전서숙은 인근의 한인 청소년 22명을 모아 개숙하였으며, 처음에 학생들을 고등반은 갑반과 초등반인 을반으로 나누었다. 폐교 당시 학생수를 보면 갑, 을, 병으로 나누어 모두 74명이었다. 이곳에서는 역사ㆍ지리ㆍ수학ㆍ국제공법ㆍ헌법 등 근대적 학문을 가르쳤다.

현재 중국 지린성 옌벤 조선족자치주 룽징시 용정실험소학교 내에 위치한 서전서숙 기념비.

1907년에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숙장을 그만두고 학교를 떠나면서 학교 사정은 어려워졌다. 거기다가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 활동비를 학교 재정에서 충당하였다. 여준 선생이 2대 숙장을 맡았지만 학교는 곧바로 재정난에 빠졌다. 여기에 민족교육을 실시한다는 이유로 통감부 간도파출소의 감시와 방해는 점점 심해져갔다. 결국 서전서숙은 학교 운영을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 폐교하기에 이르렀다.

숙장인 여준과 남은 교원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서숙의 갑반 학생을 거느리고 훈춘현 탑두구로 이주하여 서전서숙을 재건립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학생을 더 모집하여 3개 반 74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1년간 단기 속성과정으로 수업을 마쳐 모두 졸업시키고 완전 폐교하였다. 서전서숙은 개숙하여 1년도 안되는 시기인 1907년 8, 9월경에 폐숙하여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존속되었지만, 간도 지역 민족교육의 선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산학교에서 민족 교육운동에 힘쓰다

서전서숙이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고 여준 선생이 국내에 돌아왔을 무렵,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화 되어 거의 식민지 단계에 접어들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더 교육을 통한 자강혁신만이 쓰러져가는 국권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라 여겼다.

선생은 서전서숙에서의 교육 활동을 위해 용정으로 출국하기 전까지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따라서 선생이 귀국하자마자 1907년 4월에 상동청년회와 관서 지방 기독교도가 주축이 되어 창립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여준 선생은 신민회에서 함께 활동을 하며 학교 설립을 구상하고 있던 이승훈과 연결되어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에 참여하였다. 이승훈은 먼저 초등학교 과정의 강명의숙을 세워 신교육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중학교 이상의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그 해 12월 24일 오산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오산학교에 부임한 여준 선생은 수신ㆍ역사ㆍ지리ㆍ산술ㆍ대수ㆍ국가학ㆍ법학통론ㆍ한문ㆍ헌법대의 등을 맡아 가르쳤다. 선생은 이상설 등과 오랫동안 신학문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오산학교 학생들에게는 경이의 대상이었다. 시골의 궁벽한 곳에서 견문이 좁은 학생들은 선생의 박학다식함에 끌리어 존경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습득하는 데 노력하였다. 밤에도 학생들은 그를 모시고 한자리에 모여 세계의 대세와 민족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이광수도 여준이야말로 평생 잊지 못할 분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내가 오산학교에 부임하였을 때 교원 중에서 가장 어른 되는 분은 여준이었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로서 키는 작고 목소리는 크고 야무졌으며 높은 식견을 가진 애국지사로서 학생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이승훈은 마산도자기회사 사장, 신민회 평안북도 총감으로 있을 때여서 평양, 서울 등지로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학교 일은 대부분 여준 선생이 맡아 처리하였다. 따라서 당시 학생들은 선생을 교장으로 생각할 정도로 교무 업무를 그가 총괄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에서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여준 선생은 안중근의 의거를 칭송하면서 스스로 힘을 길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일본 세력을 물리쳐 제2의 이토 히로부미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로 전교생을 상대로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하였다.

“지금 남강 선생이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의 원수 이등(伊藤)은 죽었다. 그러나 이등이 죽었다고 우리가 안심할 수는 없다. 이등의 대신 또 나올 놈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니 우리는 안중근의 뒤를 이어 제2, 제3의 이등을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우리나라를 먹으려 하지 않고 우리나라를 계발시켜 동양 3국이 서로 붙들고 나아가 서구의 백인종 나라들과 대항하려는 원대한 이상을 가진 위대한 정치가라고 선전하는 자도 있으나 우리는 그 자들의 모략에 속아서는 안 된다. ……

우리는 깨어야 한다. 일어나야 한다. 속지 말고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위하여 일로(一路)매진(邁進)하자.”

고향에 세운 삼악학교

당시 선생이 몸담고 있던 신민회에서는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운동 중 신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여준 선생 역시 이러한 신민회 활동의 일환으로 1908년 용인 원삼면 죽릉리에 삼악학교(三岳學校)를 세웠다. 이곳은 선생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었다.

삼악학교는 현재 초등과정 정도의 학교로 여겨지는데, 교육 과정 역시 이승훈이 오산학교에 앞서 설립한 강명의숙이나 상동청년학원의 초등 과정인 공옥학교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민족적인 사립학교에서는 공립학교와는 달리 역사나 지리 과목에 비중을 두어 민족교육을 지향하였다. 삼악학교 역시 교과 내용을 통해 민족정신과 구국정신을 길렀을 것이다. 학교 운영과 관련해서는 일제의 ‘사립학교령’으로 인해 국가나 지방 관청의 보조를 받을 수는 없었으며 유지들의 기부금품 납부도 제한하였다. 이에 따라 선생이 앞서 관여했던 서전서숙이나 오산학교처럼 무상으로 교육할 수 없었다.

선생은 삼악학교의 설립을 주도하였지만 짧은 기간만 관여하였으며 실제 그 운영은 오태선과 오용근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선생은 후일 오산학교의 1회 졸업생인 김도태와 3회 졸업생인 김공집을 삼악학교로 보내 교육 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그러나 삼악학교는 국권피탈 후 선생이 서간도로 떠나고, 일제의 탄압이 심해짐에 따라 자연적으로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이루어진 독립군 양성

1909년에 이르면 일제의 탄압이 심화되어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이 어렵게 되었다. 이때 신민회 간부를 중심으로 국외로 활동 무대를 옮겨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되자 국외에서의 독립운동기지 건설론이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에 신민회 간부들은 백두산과 가까운 서간도 지역으로 대거 이주 계획을 수립하였다.

1910년 말부터 신민회 간부들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순차적으로 국경을 건너 1911년 2월경에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의 추가가에 도착하였다. 서간도에 도착한 민족운동가들은 1911년 여름 농업을 장려하고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경학사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학생들에게 민족교육과 함께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신흥강습소는 1912 7월 합니하(哈泥河)에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고 낙성식을 가졌다. 이로써 신흥강습소는 일정하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중등 교육과정을 가르칠 수 있는 상당한 시설을 갖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변신한 것이다. 서간도의 민족운동가들은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기 위해서 민족정신이 투철하고 교육의 경험이 풍부한 교육자가 필요했고, 여준 선생을 신흥무관학교 운영을 위한 적임자로 보고 그를 불러들였다.

여준 선생은 국권이 피탈되자 그 다음해인 1911년 오산학교 교원을 그만두고 자신과 형의 가족을 이끌고 1912년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진 합니하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은 재정상태가 곤란한 이 학교의 지원 방법을 강구하는 한편 부족한 교사를 충당하기 위해 자신이 오산학교에서 가르친 제자 가운데 교육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교사로 불러들였다. 여준 선생 자신도 이 학교에서 영어 등을 가르쳤으며 1913년에는 이상룡의 뒤를 이어 교장에 취임하여 실제 학교의 운영을 전담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교장 이하 교사와 학생 모두 민족정신으로 무장하고 국권회복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교사나 학생 모두 어려운 환경 속에서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참아냈던 것이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눈바람이 살을 에는 혹한에도 아침마다 체조를 시켰고 교장 여준 선생은 조회 시간에 애국가와 교가를 우렁차게 부르는 학생들 앞에서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도 한다.

선생은 한편으로 1915년에서 1916년에 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부민단(扶民團)에서도 활약하였다. 부민단은 만주 땅 부여의 옛 영토에서 부여 유민의 부흥 결사를 세운다는 뜻과 함께 이주민들을 지켜 부양한다는 뜻도 있다. 당시 부민단에는 의병장 허위의 형인 허혁이 총장으로 있었고, 여준 선생은 교육회장으로 이탁은 교육회 부회장의 직무를 맡아보았으며, 학무장은 이상룡이었다. 이들은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만주의 각 지방을 분담하여 징수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여준 선생과 이탁은 유하현을 맡았다.

선생은 부민단 활동을 하며 교육회를 이끌고, 신흥학교 유지회를 대신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운영 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그는 서간도 일대에서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계속되고 또 이주민 상호 불신이 남아있는 상황에서도 모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선생이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언제까지 맡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1916년 10월에 양기탁이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이탁과 여준이 학교를 중심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1917년 이후에 교장에서 물러났을 것으로 보인다.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여준 선생은 1917년경에 신흥무관학교 교장에서 물러나면서 유하현 합니하를 떠나 길림(吉林)으로 옮겨 민족운동에 전념하였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이어 독일과 중국의 강화가 성립하면 독일, 러시아, 중국이 연합하여 일본에 대한 군사적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국제 정세 변화의 추이를 살피며 선생은 이시영과 함께 이들 나라에 일본의 군사적 정보를 제공하면 우리 독립운동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한편으로 이에 따른 요원을 양성할 계획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제가 눈치를 챈 상태였으며 독일이 패전했기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선생은 계속해서 길림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에는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정령으로 추대되었다. 대한독립의군부는 1919년 음력 1월 27일(양력으로 2월 27일) 길림의 여준의 집에서 여준ㆍ박찬익ㆍ황상규ㆍ김좌진ㆍ정원택ㆍ정운해 등이 모여 조직한 것이다. 그 다음날에는 긴급회의를 열고 가까운 여러 곳과 구미에 독립선언서를 보낼 것을 결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해 3월 1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여준 선생은 정령의 위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여준 선생은 대한독립의군부 정령의 자격으로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 38인의 발기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39명의 발기자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가운데 직접 관련된 사람은 여준을 비롯한 길림에 있으면서 ‘대한독립의군부’ 결성에 참여한 사람들이며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은 해외 교포사회의 지도급 명망가로 보여진다.

3ㆍ1운동 이후에 서간도의 독립운동가들은 변화된 시대 상황에 순응하기 위해 부민단의 조직을 대대적으로 확대 개편하여 1919년 3월 한족회를 결성하였다. 국내외에서 전개되는 모든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통제할 중앙 정부 건립의 최고 목표를 두었던 한족회는 우선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수행할 최고 주체로서 군정부 건립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919년 4월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므로 한족회는 그 산하에서 군정부의 역할을 담당하기로 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서로군정서의 군자금 영수증.

여준 선생은 서로군정서에 부독판으로 참가하였으며 독판 이상룡, 정무청장 이탁, 참모부장 김동삼, 사령관 지청천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서로군정서는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계속해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로 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정예부대를 편성한 서로군정서는 압록강 대안의 강계, 삭주 등지로 국내 진입작전을 벌이는 등 본격적 대일전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 여준 선생은 윤세복과 1919년 10월에 급진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여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하고자 했다. 또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이를 위해 백두산 부근에 사무소를 설치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일제 측 자료에 의하면 선생은 또 하얼빈에서 러시아를 통해 군용총 500정을 구입하였으며, 당시 급진단이 있는 화전현에 모여진 군용총은 3,000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선생이 급진단을 상당한 무장력을 갖춘 항일독립군으로 발전시키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여준 선생이 부독판으로 참여한 서로군정서 등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는 혈전을 통한 무장투쟁 방법을 추구하였다. 그러다 보니 임시정부 내의 준비론을 주장한 세력과의 공고한 연대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서간도의 독립운동 세력은 군사활동의 중요성과 이에 소요될 재정의 확보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임정의 준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입장 차이가 컸다.

더구나 임시정부는 1920년 10월에 벌어진 만주 지역의 경신참변에 무기력하게 대응함으로써 이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에 대해 서간도의 여준 선생 이하 3인과 북간도의 박재눌 외 13인이 주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상대로 강력하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여준을 비롯한 간도의 민족운동가들은 임시정부가 외교론과 준비론을 중시하면서 이 지역 간도의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을 중요시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여준을 중심으로 한 만주의 무장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의 처사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며 항의를 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초기부터 내부분열과 임시 대통령 이승만의 독선 등으로 그 역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1921년 5월 26일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액목현에서 임시정부와 관련하여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의 개조와 함께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여준ㆍ이탁ㆍ김동삼ㆍ곽문ㆍ김진삼 등의 연서로서 결의서를 작성하여 임시의정원에 보냈다. 이 결의서에서 정부의 개조를 요구하고,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람은 퇴거를 해야 하며, 이러한 제의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간서 지역 의원을 소환하겠다고 하였다.

생의 마지막까지 계속된 독립운동

선생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였지만, 그 변화가 기대에 못 미쳤다. 그래서 이상룡과 의논하여 액목현 황지강자에 서로군정서를 대신할 군정서를 열어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으로 흩어진 서간도의 독립군을 규합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이곳으로 모여든 사람들을 농병으로 편입하고 황학수에게 조련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또 선생은 자신이 최고의 독립운동 방략으로 생각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22년 액목현 대갱지(현 교하현 남강자향)에 검성중학교를 세워 신흥무관학교의 뒤를 잇고자 했다. 그는 이 학교의 교장을 맡았으며, 삼악학교과 신흥무관학교 시절 그의 제자였던 오광선을 체육 선생으로 불러들였다.

여준 선생과 이탁 등은 이곳을 서로군정서의 새로운 산실로 생각하였으며, 둔전제를 실시하여 장기 항일 투쟁전략을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이 학교는 남만청년동맹에 의해 좌경화되었으며 1927년에는 청년강습소로 개칭되었다.

여준 선생은 검성학교가 좌경화 되면서 관계를 끊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선생은 교하를 떠나 서란현 화수천 농장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이곳에서 3부 가운데 정의부와 관계하면서 동포들의 교육을 위한 만주 농민교과서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교과서 편찬을 위해 진력하였다. 아울러 이 지역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교육기관에 대한 지원활동도 함께 하였다.

1930년 7월에는 북만주 위하현에 위치한 김광택의 집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에도 참여한다. 하지만 이때는 그의 나이가 70을 바라보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실무를 담당하기보다는 고문을 맡아서 활동하였다. 이때 그의 아들 여운달은 한국독립당 훈련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말년에는 서란현 화수천과 오상현에 살면서 민족운동을 계속하였다. 허은의 구술에 의하면 만주사변 와중에 이상룡은 동지였던 여준과 이장녕이 중국 군벌에게 총살당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매우 상심하였는데, 당시 여준과 이장녕은 북만주의 오상현에서 이웃하며 살며 서로 오가고 행동도 거의 같이 했다고 한다. 한편 조경한의 회고에 의하면, 1929년 경 선생이 서란현 화수천에 살았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30리 지점에 이장녕이 살았다고 했다.

따라서 그가 1929년 이후 오상현으로 옮겨 살다가 만주사변의 와중인 1932년에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허은의 증언에 따르면 여준의 독자인 아들(여운달)을 중국 군벌이 와서 잡아가려 하였다. 선생은 자기 아들이 죽으면 자신도 죽겠다고 하며 아들이 붙잡혀가고 난 집에다 불을 질러 안팎 노인이 거기서 불타 죽었다고 했다.

한편 조경한의 회고에 의하면 1932년 6월 여준과 이장녕이 난적(亂賊)에게 해를 당한 비보를 듣고 추도식을 거행했다고 했다. 여기서 난적은 중국군 패잔병으로 생각된다.

여준 선생은 국권피탈을 전후하여 국내와 서간도에 민족교육운동에 훌륭한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말년에까지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죽음은 너무나 허망하였다. 더욱이 그의 후손도 아들의 죽음으로 끊어졌으며, 그의 죽음 곁에는 따르는 사람조차 없어 시신과 유품을 거들 수도 없었다.

여준 선생의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의로운 행적은 1968년에 가서야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이 훈장은 국내에는 가까운 후손을 찾을 수 없어 현재는 1907년부터 서간도로 망명하기까지 그가 봉직했던 오산중고등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여준 선생은 한말 자강개혁운동 차원에서의 교육운동과 국권 피탈 후 만주 서간도의 독립운동사에서 항상 중심에 있었으며 그의 업적 또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생과 가족 모두 만주에서 희생을 당하고 그와 관련한 자료나 저작이 거의 멸실되었다. 그러다보니 극히 단편적인 자료만 남아있어 그에 대한 평가가 너무나 미흡한 사실은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참고문헌
  • 조경한, [백강회고록], 한국종교협의회, 1979.
  • 김태근, <여준의 민족운동 연구>, 아주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5.
  • 김태근, <여준의 생애와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 속의 용인],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2009.
김태근 /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공식 카페
이달의 독립운동가 (http://cafe.naver.com/bohunstar.cafe)
발행2013.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