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독립의 염원을 가슴에 품은 청년 승려
‘민족 불교’의 구현자인 범산(梵山) 김법린(金法麟, 1899~1964) 선생은 1899년 경북 영천군 신녕면 치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김정택(金玎宅)과 김악이(金岳伊) 소생 1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으며 본관은 김령(金寧)이었다. 본명은 진린(振隣)이고 승려로서의 이름은 법윤(法允)이었는데, 중국에 망명하여 바꾼 이름이 ‘법린’이고 호는 범산이다.
신녕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선생의 나이 열두살 무렵에 나라가 망하였다. 아래 회고에서 보이듯 그는 국망을 슬퍼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유년시절부터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신념을 가졌고, 그것이 일생의 염원이 되었다.
내 나이 열두 살 때(1910년, 합방 당시), 조국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 통곡하는 어른들의 그 몸부림을 보았다. 그분들의 서러워하던 모습이 내 일생의 가는 길을 지배하는 자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평생 동안 조국 독립(祖國獨立)의 염원(念願)이 유일의 신념처럼 몸에 배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 부친의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자 선생은 고향 인근의 명찰인 은해사(銀海寺)로 1913년에 입산, 출가하였다. 당시의 사찰은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은해사에서 양혼허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한 선생은 1914년까지 은해사에서 배우다가, 범어사(梵魚寺)로 승적을 옮기고 떠났다. 김법린 선생은 범어사에서 신식학교인 명정학교(明正學校) 보습과(중학과정) 및 구학 교육인 강원과정(사교과)을 배웠다. 이때 국어학자인 권덕규(權悳奎, 1890~1950)와 독립투사인 서상일(徐相日, 1887~1962)에게 배우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그가 조선어학회 활동과 3ㆍ1운동에 참여한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범어사는 항일 불교, 민족 불교의 중심 사찰이었다. 범어사는 1912년 서울 인사동에 임제종 포교당을 개설하면서 민족 불교의 중앙 본부 역할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인재양성 차원에서 명정학교 졸업생 중에서 엘리트를 선발하여 서울 유학을 보냈다. 그 대상자로 김법린 선생이 선출되어, 1917년에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얼마 후, 불교계 신식학교인 중앙학림으로 편입하였다. 당시 중앙학림은 전국 각처의 우수한 청년 승려들이 입학하여 배우던 학교로, 불교에서는 가장 선진적인 신식학교이었다. 그래서 중앙학림의 청년 승려들은 불교와 신문명을 배우면서 불교계와 민족의 진로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그 고민의 무대가 유심회(唯心會)라는 자생적인 조직체였다.
이 즈음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서울 계동 자신의 집에서 [유심]이라는 계몽지를 발간하며 민족 청년들의 각성을 고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따금 중앙학림의 특강에 나가서 학승들을 지도하였다. 이런 흐름은 자연스럽게 한용운과 김법린 선생을 비롯한 중앙학림의 학생들과 끈끈한 연계를 갖게 하였다.
김법린 선생이 공부했던 중앙학림의 정문. 선생은 중앙학림 재학 당시 만해 한용운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한용운 선생과의 인연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 만해의 대중불교론을 중심으로 불교 혁신운동을 펼쳤다.
3ㆍ1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하루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밤 열시 한용운은 그를 따르던 중앙학림의 학생들을 자신이 처소로 불러들였다. 여기에서 만해는 3ㆍ1운동에 임하는 자신의 소회와 학생들에게 당부를 개진하였는데,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환희의 감정이 가득했다.
한용운의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는 당부를 받은 김법린 선생은 동료들과 함께 범어사 포교당(인사동)으로 가서 만세운동의 전개대책을 숙의하였다. 역사적인 3ㆍ1절 그날, 선생은 탑골공원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3월 4일, 김상헌과 함께 범어사로 내려가서 범어사 만세운동을 추동하였다. 선생은 범어사 학인들과 협의하여 선언식을 거행하고, 선언서를 등사하여 30여 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범어사 인근의 동래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4월 하순에는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상완ㆍ백성욱ㆍ김대용과 같이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 있었던 김법린 선생은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었다. 국내에서 그는 불교계 동지들에게 상해 임정의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 연후에는 만주 안동현으로 건너가 동광상점이라는 쌀가게를 내고, 그곳을 근거로 상해와 국내간의 비밀 활동을 하였으니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혁신공보]의 발행이었다. 그 후에는 상해 임정의 밀령에 의하여 독립사료의 집성과 전달에 나섰다. 그의 임무는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집을 발간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모으고, 그를 초록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수집한 자료를 들고 농부로 위장하여 상해로 향하였다.
당시 상해에 모였던 승려들이 추진한 것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집과 불교계의 힘을 총집약하는 조직체인 의용승군의 조직이었다. 이런 구도에서 범어사, 통도사의 재원이 임정에 전달되고 중견 승려가 임정 고문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학승 김포광이 불교 대표로 상해에 파견되었다. 또한 중견 승려 12명의 이름으로 발표한 불교 승려선언서가 상해에서 발표되었다. 그 연후 김법린 선생은 의용승군 조직체의 가동을 위해서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는 범어사, 석왕사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기밀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1920년 4월 신상완이 검거됨으로써 일제의 검거망에 걸려들었다. 당시 김법린 선생은 일제에 체포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파리에서의 유학, 그리고 피압박 민족대회 참가
선생은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자신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독립운동을 지속할 것 인가, 아니면 보다 먼 미래를 위해 학업을 재개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던 그는 결국 학업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나의 스물두 살에 이르렀고 젊음을 구사(驅使)하기엔 무엇인가 내 안에 허전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 길로 만주(滿洲)로 가서 독립군(獨立軍)에 가담할 것이냐, 아니면 미주(美洲)로 건너가서 학업(學業)을 계속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히 생각하던 끝에 우선 다시 상해로 가서 영어(英語)와 중국어(中國語)를 공부하기로 했다.
선생은 결국 1920년 4월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였다. 거기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면서 미국 유학을 생각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단념하였다. 그 무렵 유능한 중국 청년들을 선발하여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는 유법장학회(留法獎學會)가 있었는데, 선생은 그 장학회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기존 이름인 김법윤을 김법린으로 개명하고, 범어사에서 보내준 여비와 [불화사전(佛和辭典)] 1권을 들고 프랑스로 떠났다. 1921년 2월, 상선을 타고 싱가포르 해협과 인도양을 거쳐 40일 만에 마르세이유항에 내려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어느 부호의 집에 들어가서 청소부로 일하며 불어를 배웠다. 선생은 고등학교, 파리대 부설 외국인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파리의 동포들을 규합하여 한인친목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23년 11월, 파리대학교(소르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1926년 7월,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은행에 근무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한 김법린 선생의 기사. 1927년 3월 23일 동아일보에 실린 것이다. 선생은 아세아민족회의 조선 측 위원으로 대회에 참석하였다.
바로 이럴 즈음 김법린 선생에게 새로운 도전이 다가왔다. 1927년 2월 10~14일,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였다. 이 대회는 한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대회이다. 세계 각 21개국 174개 단체가 참가한 이 대회를 이용하여 조선에서도 독립운동의 여론 조성의 기회로 삼자는 인식이 팽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대표로 4명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김법린, 이극로, 이미륵(이의경), 황우일이었다. 김법린 선생은 파리한인회 회장 자격으로, 이극로와 황우일은 서울 한인작가언론인협회 소속으로, 이미륵은 재독 한인학생회 소속으로 대회 본부에 등록하였다. 김준연과 허헌은 비공식적으로 대회를 참관했다.
김법린 선생은 본회 첫날인 2월 10일 조선의 태극기가 게양된 회의장에서 일제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2월 14일 최종회에서 선생은 '아세아민족회'의 조선 측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리고 이날 조선대표단은 '한국대표단 결의안'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그것은 일본으로부터 한국 독립의 확보, 한국에서 일본 스스로 취한 모든 권리는 헛된 시도라는 요지의 내용이 담겨 있는 문건이다.
조선 대표는 대회의 개최 이전에 한국 식민통치 상황, 독립 투쟁의 의지 등을 정리한 8쪽 분량의 책자인 [한국의 문제(DAS KOREANCHE PROBIEM)]를 각국 대표에게 전달하였다. 이 책자(이미륵 소장본)는 독립기념관에 기증, 보관되어 있다. 책자의 저자는 전하지 않는데, 재독 유학생 단체 소속의 유학생들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법린 선생이 대회에서 행한 연설문의 내용은 현재 전하고 있다. 베를린 노이어 도이처 출판사(Neuer Detscher Verlag)에서 대회 의사록을 모두 독일어로 번역하여 [에그몽 궁전의 봉화]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자에는 김법린 선생 연설문의 전문, 한국 참가자 명단과 직책, 한국 대표단의 결의안이 수록되어 있다.
고국으로 돌아와 불교계 혁신에 나서다
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고 나서 선생은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해 12월 9~1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반제국주의연맹 총회에 최린과 함께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보고하였다. 그후 선생은 프랑스에서 학업을 지속하려고 하였으나, 국내 불교계의 간곡한 귀국 요청으로 1927년 중반 귀국을 결심하였다.
좀 더 공부하야 박사학위나 얻어 가지고 오려 하였으나 고국 떠난 지도 오래였고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간절하매, 본국에서 일하는 분의 일을 돕는 것이 그곳에서 학창생활을 더 계속하느니 보다 낫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칠팔년 만에 본국에 돌아오니 모든 것이 많이 변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 안을 중심으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래는 교육계에 힘쓰며 더욱 학술방면에 연구코자 합니다.
귀국한 그는 범어사, 각황사 등에서 강연을 하는 한편, 권상로가 주관하는 잡지사인 불교사에 입사하여 식민지 불교 정책을 비판하고 불교의 미래를 제시하였으며, 특히 유럽 지역의 불교학 동향을 상세하게 전달하였다.
이렇게 귀국 후 강연, 기고 활동을 하던 선생은 점차 국내 불교계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파악하였다. 그는 그 문제 해소를 위한 활동에 나서 일제 사찰령의 부정, 불교의 통일운동, 종단 건설운동의 성격을 띠는 운동들을 주도했다. 그 결과 불교계 자주적인 규율인 종헌(宗憲)을 제정하고, 종단 성격을 갖는 교무원 및 종회를 출범시켰다. 이런 결실은 불교 자주화 운동사에서 있어서 귀중한 의미를 갖는다. 불교계 구성원은 종헌에 의거하여 자주, 자립의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그 대회의 진행을 감시하면서 대회의 파장을 예의주시하였다. 그 결과 김법린 선생을 경찰서로 구속하기도 하였다. 선생이 주도한 종헌 제정은 근대 불교 최초의 자주적인 의사 결정, 불교의 근대적 시스템화라는 역사를 남겼다. 그러나 3~4년 후, 종헌 체제는 일제의 억압, 친일적 주지들의 비협조로 해소되었다.
귀국 즉시 다양한 활동을 하던 선생은 자신의 학문을 더욱 정비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단행하였다. 그는 일본 고마자와(駒澤)대학에서 초기불교 언어와 인도철학을 공부하였다. 바로 그 즈음 국내의 불교 청년들은 항일 비밀 결사체인 만당(卍黨)을 결성했다. 만당은 자주적 불교화, 민족불교 지향을 위한 것이었으며 김법린과 함께 불교 혁신에 나선 동지들이 추진하였다.
만당은 비밀 엄수, 당의 절대 복종을 약속한 당원만 선발하였는데, 그 수가 전국적으로 80여 명에 달하였다. 강령은 정교 분립, 교정 확립, 불교 대중화를 표방하였으며 불교의 자주화, 식민불교에 저항을 통한 민족 불교를 표방하였다. 일제에 저항 노선을 갖고 비밀리에 결성되었으며, 당수로 한용운을 추대한 것 등을 보면 만당은 민족운동의 결사체임이 분명하였다.
김법린 선생은 일본에서 만당 결성의 소식을 듣고, 즉각 만당 일본 지부의 결성에 나섰다. 그래서 다수의 불교 청년들을 당원으로 포섭하였다. 그리고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동경 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1932년 3월 귀국하였다. 귀국한 그는 모교인 중앙불전에서 원전 중심의 강의를 하였다. 이는 그가 근대 불교학의 전수자임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불교]지에 식민불교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다수 기고하였다. 그의 이런 입장은 한용운의 노선을 지지하는 현실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한용운 불교 혁신의 논리는 대중불교론(大衆佛敎論)이었다. 그래서 김법린 선생도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민중본위적 불교운동>을 주장하였다.
산사로부터 도시에로 승려 본위로부터 신도 본위로 은둔적 독선적 불교로부터 사회적 경제적 불교로 진출하자! 즉 민중 본위의 불교운동의 제창은 現下 조선불교 갱신운동의 당면안 중 하나다. (중략)
종교는 사회적 현상이다. 대중의 교도(敎導)가 그의 천직이요, 대중과의 접촉이 그의 생명이다. 이 천직을 망각하고 이 생명을 무시함이 현재 조선불교와 같은 자 없나니, 보라! 신조선의 전도에 적체한 제 문제에 대하여 조선불교는 어떠한 지도적 방안과 독실적(篤實的) 분투로서 그 시급한 해결을 성원 기도하는가?
그런데 그 무렵 불교계 내분이 있었다. 교단 운영의 재정 문제와 함께 불교 노선에 대한 이견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 구도였다. 그 결과 비밀 결사 만당의 자진 해소, 불교지의 휴간이 나타났고, 김법린 선생은 중앙불전에서 퇴진하였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만당의 동지인 최범술이 주지로 있는 다솔사로 들어가 칩거하였다. 선생은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다솔사 강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후일을 대비하였다.
“조선어의 쇠퇴는 조선 민족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남 사천의 다솔사에는 동양철학의 귄위자인 김범부(金凡父, 1897~1966)도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범술, 김법린, 김범부라는 지성적 엘리트들의 집합처인 다솔사는 자연적으로 민족지사들의 모임처가 되었다. 그리고 한용운, 만당의 당원, 경남 지역의 민족지사들이 왕래하는 명소가 되었다.
1935년 9월, 다솔사 강원과 해인사 강원이 합병되자 김법린 선생은 해인사 불교 전문 강원의 원장을 맡았다. 1936년 1월에는 범어사로 옮겨가서, 범어사 불교 전문 강원 학감을 맡으면서 후배 승려들을 지도하였다. 그는 다솔사와 범어사 강원에서 불교, 영어, 역사 등을 강의하면서 민족의식,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다. 특히 해인사에 있을 때에는 팔만대장경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조선민족 및 불교문화 재건을 고민하였다.
1938년 무렵, 항일 비밀결사체인 만당이 노출되어 당원들이 대거 일제에 체포되었다. 김법린 선생도 진주경찰서에 3개월간 수감되는 고초를 겪었다. 모진 고문을 이겨낸 그는 범어사로 다시 돌아와 강원에서 강의를 지속하였다.
한편, 범어사에서 강의하던 그 무렵부터 선생은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관여하였다. 김법린 선생이 조선어학회에 참여한 것은 외국에서 유학하면서 모국어와 언어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진 것에서 비롯되었다. 더욱이 그는 초기 불교를 공부하면서 불교 언어에 대한 많은 소양을 가진 학자였다. 그래서 그는 조선어학회의 사전 작업 시에 프랑스어와 불교 용어의 심의와 자문을 맡았다.
조선인으로서 조선어를 모른다는 것은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잃고, 조선 민족의 존재를 망각함에 이르는 것이다. 조선어의 발단은 조선 민족의 발전에 지대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조선어의 쇠퇴는 조선 민족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조선어를 연구하여 조선의 발달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생은 조선어 자체가 민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조선어의 쇠퇴는 민족의 멸망을 의미하기에 한글의 발달을 적극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입장에서 조선어학회에 적극 참여하고 분투하였다. 그렇지만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피체되어 1942년 10월 19일, 함남 흥원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선생은 최현배, 이희승 등 12명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9차례의 공판을 통해 징역 2년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결국 1945년 1월 18일, 출옥하였다. 그의 구속으로 인해 범어사 강원은 강제 폐교를 당하였으며 선생 또한 고문으로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범어사에서 요양,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생의 독립 의지, 민족의식마저 휴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드디어 해방, 불교와 민족의 진로를 걱정하다
1945년 8월 15일, 역사적인 해방의 날이 밝았다. 범어사에 있던 김법린 선생은 그를 따르던 일단의 인사들과 함께 급거 상경하였다. 서울 선학원으로 간 그는 서울의 유지 승려들과 상의하여 우선은 교단 집행부를 접수하였다. 8월 19일, 그는 중앙 교단이 있는 태고사(현, 조계사)로 가서 구 집행부들을 면담하고, 정상적으로 평화스럽게 종권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조선불교혁신회를 조직하고, 9월 22일 태고사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승려대회에서는 불교의 진로, 식민지불교의 잔재 제거, 해방공간의 불교 정책 등을 결정하였다. 이런 과정을 주도한 선생은 조선불교 총무원장(總務院長)의 자리에 올랐다. 김법린 선생과 함께 교단 집행부에 가세한 승려들은 일제하의 만당 당원들이었다.
새로 출발한 교단 집행부는 1946년 3월, 제1회 전국교무회의에서 결정한 노선을 신중하게 이행하였다. 그 결정은 교헌제정, 교구제 실시, 재산통합, 교도제 실시, 역경사업 발기, 일제 잔재의 제거, 광복사업의 협조 등이었다. 당시 김법린 선생이 추진한 노선은 일제하 불교에서 한용운과 자신이 구상하였던 대중불교, 대승불교 노선이었다. 과거의 산간 불교, 승려 중심의 불교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불교로 가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노선은 혁신 계열의 이의 제기, 정치적 혼란, 미군정의 비협조 등으로 인하여 혼탕한 길로 빠져들었다. 혁신 계열의 반발로 일시적으로는 교단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며, 미군정의 사찰령 철폐, 사찰 재산 임시보호법의 시행, 일본 불교의 사찰 인수 등은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불교 교단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선생의 고민은 깊어 갔다. 선생은 만해 한용운의 주장인 대중불교, 대승불교로 가야 함을 역설하고, 그를 실천하고자 하였으나 교단의 분열이 깊어지자 더 이상 총무원장의 직위에 있는 것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 대중불교의 좌절이었다.
불교계의 최일선에서는 후퇴하였지만 김법린 선생은 광복사업, 국가 재건사업에는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선생은 비상국민회의 대의원(1946.2),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원(1946.12), 감찰위원회 위원(1948), 고등고시 위원(1949), 고시위원회 위원장(1952),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1953), 원자력 위원장(1959), 문교부 장관(1952), 부산 동래 제3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5ㆍ16이 일어난 직후에는 그의 모교이자, 불교계의 대표적인 대학인 동국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3년 7월에는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그의 열정을 마지막으로 쏟아 부을 대상으로 교육이 선택되었다. 김법린 선생은 공부, 학문을 최우선으로 하는 노선을 제시하였다. 특히 승려들의 교육에 많은 신경을 쓰던 선생은 학교 발전에 지나치게 매진하다 1964년 3월 14일 심장마비로 순직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6세이었다.
김법린 선생은 승려의 신분으로 민족 독립, 조국 재건의 최일선에 서 있었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다. 또한 불교 대중화, 대승불교운동을 제창한 불교 혁신론자였다. 그의 뜻은 비록 아직까지도 이 땅에 뿌리내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기개, 정열, 의지는 불교사, 민족 독립운동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 참고문헌〈단행본〉
-
- 김광식, <김법린과 피압박민족대회>, [불교평론] 2, 2000.
- 김광식, <만해, 불교청년들을 단련시킨 용광로: 한용운과 김법린>, [유심] 16, 2004.
- 김광식, [우리가 만난 한용운], 참글세상, 2010.
- 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출판부, 2011.
- 김상현, <김법린, 한국불교 새출발의 견인차>, [한국사 시민강좌], 2004.
- 권기현, <김법린의 생애와 독립운동>, [밀교학보] 7, 2005.
- 김상현, <김법린과 한국 근대불교>, [한국불교학] 53, 2009.
- 조준희 <김법린의 민족의식 형성과 실천>, [한국불교학] 53, 2009.
- 이봉춘, <범산 김법린의 사상과 활동>, [한국불교학] 53, 2009.
- 강미자, <김법린의 민족운동과 대중불교운동>, [대각사상] 1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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