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이만도 독립운동의 사표(師表)로 부활한 강직한 선비

문성식 2013. 12. 16. 15:39

이만도 독립운동의 사표(師表)로 부활한 강직한 선비

이만도가 선택한 선비의 길

2012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만도 선생의 순국유허비.

“우리 역사 5,000년에 가장 우리다운 것은 선비의 삶이다. 선비는 누구나 추구하는 인간상(人間像)으로 글과 도덕을 존중하고 의리와 범절을 세워 살아가는 모든 이를 말한다.” 조동걸 교수가 쓴 ‘하계(下溪)마을 독립운동기적비(獨立運動紀蹟碑)’의 첫 구절이다. 하계마을은 바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 선생의 고향이다.

선비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글과 도덕, 의리와 범절이다. 이러한 덕목이 겨레가 나라를 잃어가고 또 잃었을 때 어떠한 대응으로 나타났는지 따져보면 선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온 나라에 선비가 없는 곳이 어디에 있었을까. 그렇지만 모든 곳에서 모두 역사적 책무를 다하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선비라고 모두 선비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만도는 선비였다. 그것도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참’선비였다. 나라가 무너질 때, 선비가 걸었던 길은 대개 다음의 세 가지였다.

첫째, 외침에 맞서 싸워 오랑캐를 쓸어낸다(擧義掃淸).
둘째, 적절한 곳을 찾아 유교적 규범을 보존한다(去之守舊, 浮海去守).
셋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致命遂志, 致命自靖).

이만도는 순서대로 세 가지 길을 모두 선택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다음으로는 은거에 들어갔으며, 끝내는 목숨을 끊었다. 이는 결코 쉬운 일도 아니며 흔한 경우도 아니다. 그의 삶을 좇아가며 뜻을 새겨보자.

장원급제하고 나선 벼슬길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 하계마을의 향산 이만도 고택.

이만도의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이다. 1842년(헌종 8)에 태어났다. 본래 조상의 고향은 퇴계 묘소를 머리맡에 두고 있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하계마을이지만, 조부가 경북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 난곡으로 은거할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퇴계의 11세손인 그가 선대 고향 하계마을로 돌아온 때는 만 14세였다. 이듬해 1856년 생부가 과거에 급제하자, 자신도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겠다는 각오를 굳혔다. 그는 “내가 벼슬하지 못하면 이 손가락을 펴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여 왼쪽 엄지손가락을 10년 동안 굽혔다가 급제 후에야 비로소 폈다는 이야기를 뒷날 밝혔으니, 어느 만큼이나 과거 공부에 매달렸는지 알만하다. 그 사이에 만 18세 되던 1859년 결혼하였다. 부인은 닭실마을(봉화 유곡(酉谷)) 권승하(權承夏)의 딸이다. 처숙부 권연하(權璉夏)는 이름난 학자요, 부친과 가까웠다. 그 인연으로 이만도는 1866년 장원급제로 관직에 나갈 때까지 처가를 드나들며 두 어른 아래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만도는 문과에 장원 급제한 인물이다. 만 24세가 되던 1866년, 곧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그해, 창경궁 춘당대(春塘臺)에서 열린 정시(庭試) 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한 것이다. 이만도는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병조좌랑ㆍ사간원 정언ㆍ홍문관 부수찬이 되자마자 경연에 들어가 진강하였다. 그는 홍문관 부교리에 이어, 사헌부 장령과 지평, 병조정랑, 사간원 사간 등을 거쳤다. 대개 청직(淸職)을 지낸 셈이다.

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1876년, 그는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올린 상소를 두둔하였다. 그 바람에 이만도는 파직당하기도 했다. 얼마 뒤 복직된 그는 사헌부 집의, 성균관 사성, 홍문관 응교 등을 지냈다. 이어서 그가 양산군수를 지낼 때는 세금 징수가 너그럽고 물난리를 만나 어렵던 백성을 도와 칭송이 높았다. 다시 상경한 그는 홍문관 수찬(修撰)에 이어 1882년 통정대부로 공조참의에 올랐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4월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두 달 뒤인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에도 두 번이나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벼슬길을 아예 마음속에서 도려내 버렸다. 고향에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짓고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백동서당 계첩(契帖)에 적힌 제자가 209명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많은 문도를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의병장이 되다

이만도가 처음 의병에 관심을 둔 때는 1894년 갑오년이다. 그해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왕권을 농락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틀 뒤에 일본군은 청군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나라 안이 온통 벌집을 쑤셔 놓은 듯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7월 14일 이만도는 안동에 가까운 문중을 둔 서상철(徐相轍)이 제천에서 보내온 통문을 받았다. 그 요지는 7월 25일에 안동부의 향교 명륜당에 모여 적의 무리를 토벌하는 날짜를 약속해 달라는 것이었다. 7월 20일 서상철이 직접 예안향교로 찾아와 이만도에게 거병하자고 말하자 그는 주저하였다. 서상철의 주장이 옳지만 왕의 공식 명령이 없이 군사를 모집하기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서상철은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고, 일본군 병참부대가 있던 상주 함창의 태봉을 공격했다가 패하여 충청도 청풍으로 빠져나갔다.

태봉전투가 벌어지던 9월, 이만도 앞에 왕의 밀령이 전달되었다. 가까운 신하들을 삼남지방에 보내 의병 봉기를 촉구하던 소모관 이용호(李容鎬)가 그를 찾은 것이다. 이제는 망설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서려는데 이번에는 소모관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히는 바람에 뜻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상의 묘역인 일월산 자락으로 은거했다. 그런데 기가 막히는 소식이 그를 불러냈다. 1895년 을미사변이 그것이고, 게다가 단발령 소식까지 들려왔다. 단발령이 예안에 도착한 날이 1896년 1월 11일(음 1895.11.27)이다. 단발령이 시행된 지 2주일쯤 지난 뒤였다. 단발령이 삼남지방에서 시행에 들어간 때가 대개 명령이 내린 뒤 열흘 남짓 지난 무렵이다. 따라서 단발령 소식과 시행이 거의 같은 때 시작된 것이다. 안동과 예안 일대에서 나온 통문은 여러 곳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오늘날의 향산고택. 안동댐 건설로 하계마을이 수몰되자, 1972년 안동시 안막동으로 이전하였다.

이만도는 곧 의병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머뭇거릴 수도 없을 만큼 다급했다. 만 54세가 되던 때였다. 동생 이만규, 아들 이중업도 함께 나섰다. 선성의진이 결성된 날은 1896년 1월 23일(음 1895.12.9)이라 판단된다. 이는 안동의진이 결성된 지 엿새 지난 시점으로, 주변 지역에 비하면 매우 빠른 거병이었다. 이는 그가 한 해 앞서 거병하지 못했음을 자책하면서 얼마나 서둘렀는지를 헤아리게 만든다.

이만도가 대장을 맡고, 온혜 출신 이중린과 이인화가 각각 부장과 유격장을 맡았다. 하지만 선성의진을 구성하자마자 안동의진이 관군과 맞서 싸우다가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큰 충격을 주었다. 안동은 예안에 비해 큰 곳이고, 의병의 규모도 대단했다. 그런 안동의진이 패했다는 소식은 선성의진 병사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에 이만도는 1월 31일(음 12.17) 병사들을 점검하여 그들의 동요를 막으려 애썼다. 하지만 병사들은 곳곳으로 흩어졌다. 결성 9일 만인 2월 1일(음 12.18), 선성의진이 사실상 흩어지고 만 것이다. 이만도는 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를 집안 후손인 이중린ㆍ이인화ㆍ이중언ㆍ이빈호ㆍ이중엽ㆍ이찬화 등이 맡아 나갔다. 3월에 펼쳐진 태봉전투는 바로 이들의 작품이었다.

“을사5적의 목을 베소서”

1905년 박제순-하야시 억지합의(을사늑약)가 있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는 상소를 올렸다. 다리에 종기가 생겨 움직이기 힘든 터라, 그는 아들 중업(中業)을 시켜 이에 항거하는 상소를 올렸다. 왜적을 물리치기에 앞서 먼저 을사5적의 목을 베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는 종사가 위태로운데 몸이 폐인이 되어 움직일 수 없어 피맺히는 울분을 봉서(封書)에 담아 올린다고 적었다. 이어서 지금의 화가 오랜 평화로 말미암아 풍속이 약해져 일본에게 개항을 받아들인 탓도 있지만, 5적이 일본과 내통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을미년 변란에 대한 복수의 계책은 제대로 세우지도 않고 5적이 5조의 계약을 맺어 임금을 협박하고 조약을 체결케 했으니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만도 선생이 올린 상소문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을사늑약에 협력한 다섯 간신들의 목을 벨 것을 주장했다.

그의 상소문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외교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나라가 없어질 것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그는 “외부(外部)를 동경(東京)으로 옮긴다는 한 가지 조항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천하에서 하나의 나라라고 할 수 없고, 토지와 인민과 재부(財富)가 다 저들의 곁다리가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통감부 설치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이만도는 통감부가 설치됨에 따라 황실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가 송두리째 없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만국공법에 물어서라도 협박에서 나온 조약을 폐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그가 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서양 세력을 물리쳐야 할 사(邪)로 규정하고, 금수로 여겼던 터였다. 그러던 그가 만국공법에 기대서라도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고 조약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절박하던 심정도 느끼게 된다.

일제의 통치를 부정하며 단식 끝에 순국

상소를 올린 뒤 이만도는 영양 일월산 서북쪽 산촌으로 들어갔다. 그는 궁벽한 곳에 자리 잡고 바깥사람과 만나지 않으면서 남루한 옷으로 지내며 산나물로 목숨을 이어나갔다. 스스로 죄인이라 일컬었다. 특히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재산에 자주 머물며 그 앞에 엎드려 죄인으로서 근신 생활을 하였다. 1907년에는 융희황제 즉위에 가선대부(종2품), 1910년 자헌대부(정2품)를 내렸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 이만도에게 이 소식을 알려준 이는 가까이 지내던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이었다. 그 날이 9월 4일(음 8.1)이니, 국치를 당한 지 엿새 뒤였다. 고림이라는 깊은 골짜기까지 그 소식이 전해졌으니, 이 무렵에는 온 나라에 다 알려졌을 것이다. 예견했던 일이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비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날마다 증조부 묘소에 나아가 통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가 목숨을 끊는 그 순간까지 매일 곁에서 기록한 [청구일기(靑邱日記)]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청구일기의 표지와 1910년 8월 14일조.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시점부터 작성한 것으로, 이만도의 단식 순국 과정이 일기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9월 17일(음 8.14) 음식을 끊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라에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도 을미년 변란에 죽지 못하고, 다시 을사년 5조약 체결에도 죽지 못하고 산에 들어가 구차하게 연명한 것에는 그래도 이유가 있었다. 지금 이미 아무것도 기대할 만한 것이 없어졌는데, 죽지 않고 무엇을 바라겠느냐? 변란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지체하고 목숨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은 자진할 방도를 찾지 못한 때문이다. 지금 뜻이 정해졌으니, 명동에 가서 생을 다할 참이다. 다시는 여기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소식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방문자들이 늘어났다. 아들과 형제들, 손자와 외손자가 도착하고, 가까이 지내던 동학들이 왔다. 그들 모두 눈물로 만류하였지만, 이만도는 한 가지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 14세 되던 1856년 부친 휘준이 과거에 급제하던 날, 다짐한 이야기다.

“나는 오직 입신하는 것과 공부하는 것이 선조를 따를 수 없을까봐 두려워, 왼쪽 엄지손가락을 굽히고 마음으로 ‘나에게 대업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면 이 손가락은 다시는 펴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그 뒤 1866년에 이르러 선조의 음덕으로 문과에 급제하고서야 비로소 손가락을 펴게 되었다.”

9월 25일, 단식 9일째 되던 날, 군수 이경선(李敬善), 일본인 아타 나카이치[阿多中一], 순사 권대균(權大均)이 와서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만도는 온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답했다. 순사 권대균이 나서서 단식을 그만두라고 말하자, 그는 엄하게 꾸짖어 내쳤다. 일본인이 칼을 풀어 놓고 모자를 벗은 뒤 엎드려 음식 들기를 권하자, “나라가 이미 망한데다가 몸 또한 병들어 이제 죽음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먹고 안 먹는 것이 외국인에게 무슨 상관인가?”라고 되물어 내쳤다.

9월 27일(음 8.24) 그는 새로운 사실을 주문했다. 자신이 죽은 뒤 ‘순국’이란 말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틀 뒤에는 ‘선생’이란 말도 쓰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만약 제문에 그러한 말이 들어 있으면 삭제하고 읽으라고 단단히 일렀다. 자신은 그런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나온 당부였다.

10월 3일(음 9.1) 단식한 지 17일이나 되었지만, 정신과 기색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그는 “내가 때때로 냉수를 마셨더니, 물기가 장부를 적셔 죽지 않은 것 같구나.”라고 말하면서, 물 마시는 것마저 그만 두었다. 이튿날, 제문을 받으면 꼭 점검하여 ‘선생’ 두 글자를 고치라고 거듭 일렀다. 요즘 부르는 호칭 가지고 싸움하는 인물들에게는 커다란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10월 7일(음 9.5) 단식 21일째 되던 날, 경찰이 와서 위협했다. 예안주재소 일본인 경찰 한 사람, 수비병과 순검 각각 3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정신이 있을 때 권해도 먹지 않았다니, 지금 정신이 없다면 모시는 사람들이 왜 음식을 올리지 않는가. 속히 미음을 가져오라. 내가 당장 강제로 음식을 먹여야겠다.”라고 나섰다. 이 무렵 이만도는 며칠 전부터 기운과 호흡이 미약하고 말이 입으로 나오지 않을 만큼 기력이 다한 상태였다. 그런데 일제 경찰의 협박 소리에 그가 갑자기 큰 소리로 꾸짖기 시작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는 명대로 자진하고자 하거늘, 지금 너희들은 나를 빨리 죽이고 싶은가? 내 빨리 죽고 싶으니 즉시 총포로 나를 죽여라” 창문을 열고 가슴을 내보이면서 계속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당당한 조선의 정2품 관리다. 어떤 놈이 나를 설득한다는 것이고,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위협하는 것이냐. 너는 어떤 놈이냐. 너는 어떤 놈이냐?”

10월 8일(음 9.6) 그는 이제 기력이 다했다. 말이 입 밖으로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10월 10일(음 9.8) 그는 세상을 떠났다. 단식 24일째 되던 날, 장렬하게 순국한 것이다.

향산 이만도 선생 순국유허비. 앞면의 제자(題字)는 백범 김구의 글씨이고, 뒷면 비문은 위당 정인보가 썼다.

이만도는 전통적인 의리를 무겁게 여겼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군왕에 대한 의리 지키기였다. 이는 그가 살았던 시대가 국가와 군왕의 위기였고, 따라서 가장 높은 덕목이 곧 군왕을 지키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의병을 일으킨 것이나, 나라가 무너짐에 자정순국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유소(遺疏)를 통해 죽음을 선택한 이유 세 가지를 밝혔다. 30년 전부터 벌어진 사태를 목숨 걸고 막지 못한 것. 을사년에 신하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 경술국치를 막지 못한 것이 그 세 가지다. 이것은 군왕을 지키지 못한 이유들이자,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였다. 이는 의리 지키기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유학적 도리가 갖는 효용성을 절대적으로 믿은 데서 나왔다. 이를 ‘주자학 근본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유학이 절대적 진리를 갖춘 사상체제임을 확신하고, 그 절대적 진리가 자연세계에 속해 인간사회에도 유용하다고 보았다. 이를 문화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도덕적 덕목으로 바꾸어 구현하면 사회적인 안녕과 질서가 보장된다. 이를 굳게 믿은 그였다. 그런데 일제 침략 때문에 규범이 무너진 것이다. 그런 마당에 그가 택할 마지막 길이 바로 순국이었다. 단순히 자결(suicide)이 아니라 순교(martyrdom)의 뜻까지 담겨 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항일투쟁을 이어간 그의 후손들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 중간에 이중업의 아내 이야기가 나온다.

이만도의 순국은 후손들에게 등대와 같았다. 그들이 걸어간 걸음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동생 만규는 의병에 참가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아들 중업은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참전하고, 아버지를 여읜 뒤 1910년대에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4년 안동과 봉화 장날에 붙였다는 <당교격문(唐橋檄文)>은 그 가운데 하나다. 1921년에는 중국 쑨원[孫文]과 우패이푸[吳佩孚]에게 독립청원서를 직접 전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출발 직전이던 1921년 6월 갑자기 세상을 떠남에 따라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들 중업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항일투쟁을 벌인 인물이었다.

며느리 김락의 항일투쟁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시어른의 순국, 남편의 항일투쟁, 게다가 두 아들과 두 사위의 독립운동을 지켜본 안주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9년 예안 3ㆍ1독립만세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수비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끝에 두 눈을 모두 잃었다. 이 사실은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현 경북지방경찰청에 해당)가 고등계 형사를 위한 지침서로 제작한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에서 확인된다.

두 손자와 손녀사위 모두 독립운동가로 성장했다. 그들은 광복회 군자금을 모집하고 제2차 유림단의거에 기여했으며, 사회운동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만주에 건설된 독립군 기지에 군자금을 공급하다가 종가의 재산을 거덜낼 정도였다.

나라 사랑, 이제는 우리 차례다

이만도의 죽음은 많은 가르침을 준다.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에 앞장서서 겨레를 짓밟아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인물이 즐비한 마당에, 그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마음을 다졌다. 이것은 나라의 체면이요 겨레의 자존심이다.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오랑캐 나라의 백성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자, 한 임금의 신하임을 다짐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는 의로움을 택하고, 그 뜻을 하나씩 가르치면서 갔다. 그 교훈은 큰 울림으로 남기 마련이다.

우리가 다시 그를 찾는 이유는 이 시대를 열어갈 교훈을 되새기는 데 있다. 조상을 자랑하자는 것도 아니고, 지역 사람을 내세워 어깨를 으쓱거리자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한 가지 이유는 이 시대가 갖고 있는 문제를 풀어가는 슬기를 배우고 그렇게 살아가자고 다짐하는 데 있다. 어느 시대나 과제가 있기 마련이고 지금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역사적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시대의 과제는 무엇인가. 하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요, 다른 하나는 심각한 편 가르기다. 이기주의는 개인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문중 이기주의, 계급 이기주의 등 너무나 다양하다. 편 가르기도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무슨 짓인들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사실 확인은 하려 들지도 않고, 누가 주장했느냐만 가지고 편이 갈린다. 이를 고치자면 통합을 이끌어낼 포용력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하고 기리는 이유는 바로 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데 있다. 시대정신을 갖고 역사적 과제를 해결할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다. 그래서 ‘나라 사랑은 우리 차례’라는 것이다.

김희곤 /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공식 카페
이달의 독립운동가 (http://cafe.naver.com/bohunstar.cafe)
발행2013.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