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정조의 삶

문성식 2011. 1. 30. 13:02

정조의 삶
◇첫번째 이유-드라마틱한 삶
정조(1752~1800)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헌세자(사도세자)와 영의정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의 아들이다. 8살에 세손에 책봉되고, 11살이 되던 해 2월에 효의왕후를 맞아 가례를 치렀으며, 그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모습을 봐야했다. 2년 뒤 정조는 영조의 맏아들(10세에 죽음)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돼 종통을 잇게 된다. 비록 혈통상 아버지는 사도세자이지만 족보상 그는 영조의 맏아들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왜 그의 아버지는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었고, 세손 시절 숱한 암살 기도에 시달리면서 큰아버지의 양자로 왕위를 잇게 됐을까? 세손에 책봉된 뒤 왕위에 오르기까지 17년의 기간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비록 왕실의 적통을 이어받았지만 세손 시절부터 수차례 암살 위협을 받았고, 실제로 궁내부로 괴한들이 난입해 목숨을 위협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려면 증조할아버지인 숙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숙종은 노론이 지지하던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소론이 밀던 희빈 장씨를 총애하며 정국을 주도했다. 급기야 희빈의 소생인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려 하고, 송시열을 비롯한 대다수 노론이 이를 반대하자 숙종은 '기사환국'으로 불리는 대대적 옥사를 벌여 노론을 견제한다. 하지만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듯 희빈이 사사되고, 인현왕후가 복권하면서 노론들은 원자인 경종을 몰아내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경종은 왕위에 오르지만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을 후계자로 지목하고는 후사도 없이 4년 만에 병으로 죽게 된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은 경종, 그 뒤를 이은 연잉군, 즉 영조. 소론이 지지하던 경종이 죽고 노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영조가 즉위하자 해괴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영조가 진상한 게장을 먹고 병석에 있던 경종이 죽었다는 것.

이른바 독살설이 나돌면서 이인좌의 난까지 발생한다. 아울러 영조의 어머니가 궁중에서 잡일을 보던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점을 들어 왕위 계승의 정통성마저 뒤흔들려 한다. 이런 정치적 혼란 상황을 잠재운 것이 바로 노론 세력이었고, 이후 영조는 탕평책을 펴며 소론이나 남인을 요직에 등용하며 노론을 견제하려 하지만 '누구 덕분에 왕이 됐는데?'라는 노론의 명분 내세우기에 밀려 번번히 실패하게 된다. 이를 지켜본 사도세자는 노론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고, 이를 눈치챈 노론 세력들은 사도세자에 대한 중상모략으로 급기야 뒤주에서 숨지게 만든다. 정조는 바로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은 사도세자의 아들. 노론에게 정조는 존재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정치적으로 반드시 제거해야 할 인물이었다. 갈등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된다.

◇두번째 이유- 뛰어난 처세술
정조는 인내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비록 즉위 직후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지만 뿌리 깊은 노론 세력을 축출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대세는 노론이 쥐고 있었기 때문.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조는 20년 넘게 준비 작업을 펼친다. 자신을 지지하는 학자를 길러내고, 아울러 자신의 친위부대를 편성해 왕권을 강화한다. 장용영이 바로 그 것.

노론 손아귀에서 놀던 훈련도감 등 군을 재편해 장용영을 만든다. 또 영의정 채제공의 상소를 받아들여 노론과 담합하며 정치 자금의 근원이 된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행통공을 발표하며 세제 개혁을 이룬다. 노론, 소론, 남인에 상관없이 우수한 젊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한다. 당시 노론은 규장각을 극구 반대했다. 이유는 상소를 검열하는 기관인 사간헌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상소를 올릴 수 있는, 즉 왕과 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부서였기 때문이다. 노론은 이미 숙종 시절부터 언론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사간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규장각의 설치는 정치적으로 노론을 견제하는 동시에 정조의 지지 기반이 되는 새로운 세력을 키워내고 막강한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정조의 열렬 지지자인 남인 중 정약용, 채제공을 발탁해 수원성을 쌓게 한다. 당시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긴 정조는 수원 화성을 쌓음으로서 노론에게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이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정치적 의도를 깔고 있었다. 아울러 웅장한 능행을 통해 견고한 왕권을 보여주고, 능행에 동원되는 군사들을 합법적으로 훈련시킬수 있었다.

아울러 정조는 그림과 글씨에 빼어난 예술가인 동시에 뛰어난 학자였다. 왕을 교육하는 '경연'에서 오히려 정조는 신하들을 가르치는 경지에 이르렀고, 천재 중의 천재로 꼽히던 정약용과도 대등하게 학문을 논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유로 정조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수완이 뛰어난 왕에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시기를 만들어냈고, 학문이나 예술면에서도 조선 어느 시기에 비해 풍성한 결과물을 낳게 한다. 정약용은 그의 저서에서 '여자를 가까이 하지도 않고, 내시들 중 어느 하나를 가까이 두지도 않고, 사냥도 즐기지 않고, 사치스런 물건을 좋아하지도 않고, 오로지 학문하는 신하만을 귀히 여기고 또 성품이 온유해서 비록 왕이지만 성을 내거나 큰소리를 내는 일이 없어 어느 신하이건 임금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한다.'라고 정조를 표현하고 있다.

◇ 세번째 이유-죽음에 대한 의혹들
죽음이 안타까운만큼 그 죽음을 둘러싼 의혹도 커지게 마련이다. 최근 방송이나 책을 통해서도 정조의 독살설은 확산되고 있다. 정조에게 우호적이던 남인이 많이 살던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회자되던 정조 독살설은 1993년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의 인기에 힘입어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후 역사평론가 이덕일 씨가 펴낸 '조선 왕 독살사건'을 통해 구체적인 정황 증거들이 제시되고, TV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도 정조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에 왕의 독살을 언급한 구절은 전혀 없다. 다만 야사에서는 왕의 독살을 기성 사실로 받아들인다.

특히 정조의 독살은 최근 학계에서도 많은 논란이 일고 있는 사건이다.
정조는 1800년 5월 30일 남인을 중용하겠다는 취지의 '오회연교(五晦筵敎)' 발언을 한 뒤 불과 20여일 후에 갑작스레 숨을 거둔다. '부친인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의지를 밝혔고, 아울러 남인을 중용할 뜻을 표명한 일이었다. 정조는 종기가 악화돼 그 해 6월 24일 훗날 논란이 되는 민간요법 '연훈방'을 사용했으나 일시 증세가 호전됐을 뿐 혼미상태에 빠진다. 이 요법은 급성 수은중독 위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흘 뒤인 6월 28일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구급 처방의 일종인 '성향정기산'을 직접 올리겠다고 실내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정조는 운명했다. 당시 예법에도 어긋나는 처사이고, 정조와 평생을 정적 관계에 있던 정순왕후가 임종을 지켰다는 점에서 의혹은 더욱 커진다. 정조는 왕대비인 정순왕후가 들기 전에 '수정전'(왕대비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말을 남기고 의식을 잃는다. '수정전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서 독살설의 유력한 증거로 보는 이도 있고, 후사를 당부하기 위해 정적이었던 정순왕후를 부르는 말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어찌 됐건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정권을 장악하고 정조가 펼쳤던 개혁정치는 뒷걸음치게 된다. 정조가 사망한 직후 전국 곳곳에 왕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익명의 대자보가 나붙었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간 정약용은 '여유당전서'를 통해 독살이란 표현을 남긴다. 물론 독살 여부는 아직도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