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종교개혁, 무엇을 바꾸어 놓았나? 2

문성식 2013. 12. 14. 14:55

 

종교개혁, 무엇을 바꾸어 놓았나?  

ㅡ 엘시 맥키 

 

중세 후기의 설교
설교는 어떠했는가? 사실상 중세 후기에는 개신교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설교가 있었다. 그러나 설교가 예전적 삶의 중심은 아니었다. 목회자와 사람들은 미사에서 설교가 있는 것을 좋아했지만 미사는 설교 없이도 완전하고 효과적인 은혜의 수단이었다. 대부분의 사제들은 설교자로 잘 훈련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칼뱅처럼 대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설교 핸드북을 사용했는데 이 책들은 모두 라틴어 서적이었다. 그래서 사제들은 이 설교 샘플들을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해야만 하는 도전에 직면했다. 미사를 드릴 때 성경은 라틴어로 읽혔다. 어떤 설교들은 성경에 대한 것이었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는 영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 만약 본문이 어려운 경우에는(시편 137편처럼) 교화할 수 있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기에, “네(바빌론의)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시 137:9)을 그리스도의 바위에 작은 죄를 내어다 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많은 설교들은 성경에 직접 근거하지 않았다. 그 설교들은 사람들에게 선한 도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예가 되는 몇 가지 주제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일곱 가지 대죄(seven deadly sins), 일곱 가지 중요 덕목(seven cardinal virtues), 일곱 가지 자비의 행동(seven acts of mercy), 죄를 고백하는 바른 방법, 혹은 축일을 정하고 기념하는 성자들의 기적에 대한 설교들.

교구에서 설교를 듣지는 못할지라도 경건생활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은 항상 있었다. 성인들, 특별히 하늘의 여왕으로 그려지고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는 사람들이 필요한 안전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인생은 힘들고 질병과 죽음, 사고, 기아와 역병 그리고 전쟁으로 가득 차 있다. 성인들이야말로 죄인들을 돕는 최고의 옹호자, 즉 죄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자들로 여겨졌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중세 후기의 세상은 철저히 위계질서적인 사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청원을 해야 했는데 이는 그 높은 사람이 자신보다 더 높은 사람에게 그의 소원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내가 청원할 것이 있다고 해서 바로 가장 높은 사람에게 직접 갈 수는 없었다.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 외에도 성지순례라든가 금식, 또는 다른 종류의 헌신적 행동들이 있었는데 이는 사람들을 세상의 위험에서 보호하고 영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총을 얻도록 돕는 것이었다. 정의상 가장 거룩하게 사는 방법은 항상 기도하는 수사나 수녀가 되는 것이었다. 수사나 수녀는 매일 매일 시편을 읽으며 기도했기에 평신도들은 종종 이렇게 거룩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여 일종의 기도 형태로 만들어진 짧은 기도문을 반복적으로 외웠다. 수도원의 수사들이 시편 150편 전체를 외웠다면, 평신도들은 묵주를 가지고 아베 마리아 기도를 150번 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생활을 인도하는 종교적 권위들은 교회에 의해 주도된 성경과 이성 그리고 성령의 집합체였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은 종교적 지식과 권위의 한 근원이었다. 그러나 자연 이성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셔서 그것으로 하나님에 관한 것을 이해하도록 하신 것이다. 성령은 지상의 교회가 구원에 관한 가르침에 있어서 잘못되지 않도록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교회의 권위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학식이 높으면서 목회자 학자들이나 가브리엘 비엘과 같은 교사에 의해 지원받는 목회자들의 손에 있었다.

이즈음 서유럽에서 교육의 수준이 올라가고 있었고 이것은 경건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실상 로마 제국이 초기 중세 사회의 도래와 함께 붕괴된 후에 교육이 급격하게 쇠락한 바 있었다. 수도원과 다른 목회자 공동체에서만 교육이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명하기 위해 땅에서 일해야 했고 교육을 장려했던 도시생활도 매우 급격하게 하강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들은 늘어나고 상업은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강을 따라가는 교통수단은 육상 교통수단보다 쉬웠다.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교육의 수준은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의 비율은 사뭇 제한적이었지만 늘어나고 있었다. 이제 교육은 라틴어를 배우는 목회자에게만 관계된 것이 아니었고, 평신도들이 상거래를 위해 자기 말로 읽고 쓰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렇게 늘어가는 도시와 문명(literate) 인구는 교회와 개인적 목적을 위하여 증가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은 교회의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상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교회의 온갖 남용과 그 가르침의 부적절함에 (한때는 자신들이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점점 더 불만을 갖게 되었다. 15세기 중엽 유럽을 찾아온 금속활자의 ‘발견’은 더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자극했는데, 이는 교회와 사회에 대한 더 많은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

결국 목회자든 평신도든 개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칼뱅이 태어나기 수백 년 전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때로 종교개혁가들은 자신의 교구를 개선하려는 주교였고 어떤 때는 수도회였는데, 이들은 수도회의 규칙을 지키는 데 점점 나태해져가는 수도회를 보면서 더 순수한 수도원적인 삶의 형태를 회복하고자 했다. 때로는 더 거룩한 삶을 경험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어 하던 평신도거나 평신도 단체이기도 했다. 때로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설교를 제공하고 싶어 하던 학자이기도 했다. 14세기 말엽의 한 개혁 운동은 현대적 경건(Modern Devotion)이라고 불리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가장 유명한 대표는 토마스 아 켐피스로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 운동은 일종의 신비적, 종교적 공동체생활 운동으로 목회자와 평신도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교회가 처방한 여러 경건활동보다 더 내적이면서 영적인 것을 추구했다. 그들은 교회가 요구한 이러한 활동들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더 성경적인 설교와 성경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믿는 개인들과 그룹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들은 설교에 만족하지 않고 목회자만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성경을 직접 들고 읽으며 성경을 설교하고 싶어 했다. 영국에 있던 이런 그룹은 롤라드(Lollards)였는데, 이들은 14세기 학자 존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제들의 주된 과제는 설교하는 것이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어 불가타 성경(The Vulgate)을 영어로 번역했다. 이것은 성사를 통해 은혜가 전해진다는 가톨릭교회의 중심 되는 신학적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었다. 목회자들 역시 교육을 받지 못한 평신도들의 수중에 성경이 들어가는 것은 그들을 이단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걱정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목회자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했다. 영국 교회 지도자들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교의 허락 없이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는 것은 중형에 해당한다고 선언했고, 1409년부터는 사형에 처할 수 있게 되었다. 15세기 초기에 보헤미아에 있던 또 다른 그룹은 후스파였는데 이들은 모든 것을 성경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큰 관심 중 하나는 성찬 시 평신도가 빵뿐만 아니라 포도주도 받을 권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일부 평신도에 의해 주도되었든 대부분의 평신도들에 의한 것이든, 이러한 주장들은 교회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사실 롤라드나 후스파, 또 다른 그룹들은 모두 이단으로 정죄되었거나 핍박을 받아 지하로 숨었는데 그렇다고 그들의 사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인문주의
개혁의 다른 운동은 인문주의였다. 이것은 지적인 개혁이었지만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문주의자들은 성경과 초대 교회 교부들의 글을 원문으로 읽기 위해 원어로 돌아가길 원했지만 교사가 적었기 때문에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읽는 것이 헌신된 기독교 학자들 가운데 퍼져가고 있었다. 그들이 성경을 원어로 읽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교회가 해석해온 구절들이 유일한 해석이 아니라는 것, 나아가 교회의 해석이 실제 원어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전통 교회와 교회가 주장하던 신학과 영적생활에 대한 이해에 큰 도전이 되었다.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은 교회 안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전통적인 교회와 분리되지 않고는 (물론 이들이 교회 자체와 분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한 개혁을 이룰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주 관심은 교회의 실천이라고 믿었다. 또 다른 이들은 필요한 주 개혁의 대상은 교리라고 보았다. (16세기가 동터올 무렵) 서유럽 전체에 개혁의 기운은 무척 컸고 무엇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상당한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막상 개혁 운동이 힘을 받기 시작했을 때 그 많은 공통의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차이 또한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새롭게 개혁되는 교회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냐는 것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개혁자들
전통 교회와 분리해야겠다고 느낀 개혁자들 중 ‘개신교도’(Protestant; 항의자)라고 불린 사람들은 은혜와 구원 그리고 하나님을 바로 예배하는 것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본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사상은 “믿음만으로, 은혜만으로 의로워짐”이라는 유명한 가르침의 핵심과 관계되었다.

그러나 때로 무엇이 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은혜나 믿음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둘 다 구원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을 새로운 통찰력이 되게 한 차이는 ‘만으로’(alone)라는 말이었고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느냐’였다. 믿음은 교회에 의해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믿고 그에 따라 선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은혜란 그러한 선한 행위와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고 하나님은 은혜를 거저 주신다고 배웠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만약 사람들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잘 사용하면 더 큰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배웠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 안에 있는 것’(what lies in them)으로 행할 수 있었고, 자신의 선한 행위로 구원에 참여할 수 있었다. 개신교도들은 믿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믿음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믿음의 내용)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 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가치가 없는 죄인들을 기꺼이 구원해주신다는 것을 믿어야만 했다. 개신교도들은 은혜는 단지 하나님의 선물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데 아무것도 기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구원은 순전한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에만 근거한 것으로, 죄인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의롭게 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자비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존조차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다음의 설명이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한 컵의 물이라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파란색 잉크를 그 물속에 넣어 물을 파랗게 만들었다. 이것이 ‘전적 타락’이다. 사람의 모든 면은 죄로 물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와 다른 스콜라 신학자들은 인간의 정신이 할 수 있는 놀라운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육신과 비교하면 원죄로 인해 그렇게 나쁘게 변질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면 다른 개신교 개혁자들처럼 칼뱅 역시 인간의 모든 면은 동일하게 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물은 완전히 파랗다는 것이다. 이신칭의란 마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시야와 파란 물 사이에 필터로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그리스도를 통해 보시고 죄인을 그리스도처럼 정결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또 재생(regeneration)과 성화(santification)의 관점에서, 성령은 비록 이 생에서 온전히 맑게 할 수 없을지라도 파란 물을 점점 덜 파랗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과 은혜로 의로워지는 것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무서우면서도 자유로운 것이다. 중세 후기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머지는 알아서 해주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는데 구원에 대한 이 불확실성은 상당히 심각한 영적 문제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가르침의 중요성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확신을 가져도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해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의 약속을 해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구원에 대해 불안해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이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쉴 수 있는 소식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실 분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통 교회에게는 큰 도전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은혜란 안수 받은 목회자에 의해 집전되는 성사에 의해 오는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믿음과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성사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고, 목회자도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것은 영적인 혁명이었다. 이 혁명의 종국을 보기 전에 믿음과 은혜로 의로워지는 사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