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무엇을 바꾸어 놓았나?
ㅡ 엘시 맥키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세계관이라 하는데, 수세기 동안 모든 곳에는 종교적인 세계관이 있었다. 종교적인 세계관은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특별히 선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종교와 연관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종교는 삶의 모든 측면과 상관이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세계관의 반대편에는 세속적인 세계관이 있다. 이 세속적인 세계관은 삶의 모든 측면은 종교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당신의 신앙은 사적인 문제며, 공적인 영역에서는 당신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어울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세속적 세계관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계몽주의 이후 서양 세계를 주도하는 세계관이 되었다. 그러나 칼뱅이 자라난 중세 시대나, 그가 사역했던 종교개혁 시대에는 종교적인 세계관이 있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해야 되는지에 정확하게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모든 가치의 기초로 삼았다.
하나의 기독교적 몸
서구 유럽에서 종교적 세계관의 한 가지 표현은 온 사회가 하나의 기독교적 몸, 즉 “corpus Christianum”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은 교회의 리더들과 시민 사회의 리더들이 모두 한 가지로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는 동일한 경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즉시 세례를 받는 것은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한 도시나 국가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다.
때로는 한 사회, 한 교회라는 생각이 잘 작동되는 듯하다. 하지만 종종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데 특히 중세 후기에 심했다. 교회는 자신들이 모든 사회의 권위 위에 존재한다며 온전한 권위를 주장했다. 어떤 교황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영적인 권위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권위까지 주셨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중세 후기에 세속 정부는 점점 더 많은 권세를 가졌지만 그렇다고 전적인 권위를 가지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결혼과 연관된 모든 것들은 교회의 임무였다. 그래서 세속 정부는 주교들에게 이러한 문제들을 담당하도록 했다. 이런 방식으로 중세 사회는 마치 하나의 기독교 공동체 행세를 했다. 그러나 누가 무엇을 맡게 되는지, 누가 어떤 것에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을 보여주는 한 예는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생각이었다. 사제, 수녀, 수사와 같은 사람들은 거룩하고 하나님을 위해 따로 세워진 사람이며, 세속 군주들이나 부인들, 봉제업자, 제빵업자, 농부들은 세속적이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다 기독교인이지만 한 부류는 하나님께 더 가까운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이 사물에, 시간에 또 장소에 적용되었다. 먼저 사물을 보면 제단과 성물은 거룩하고 화분이나 그릇들, 농기구들은 세속적이며 거룩하지 않게 여겼다. 또 시간을 보면 성인들의 기념일이나 주일은 거룩하지만 나머지 날은 거룩하지 않으며, 장소를 생각하면 교회는 거룩하고 다른 장소는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 거룩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아주 쉽게 말해준다. 그러나 때때로 거룩한 사람들이 거룩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이류 기독교인(second class Christians)이라고 느꼈다.
중세 후기의 성례
초대 교회 교부 성 키프리아누스(St. Cyprian)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모두 이것이 진실이라고 동의했지만 누가 혹은 무엇이 교회인지에 대해서는 항상 동의하지 않았다. 칼뱅이 자라난 세상에서 교회는 사제들에게 성만찬을 받는 사람들로 정의되었는데, 여기서 사제들은 주교에게 안수 받은 사람들이고 그 주교는 그 위의 주교에게, 그는 또 그 위의 주교, 결국 사도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이것이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이다[때로 사제는 단순히 성례를 베푸는 자들이라는 이유에서 목회자(clergy)로 정의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만약 사도적 계승에 근거한 사제로부터 성례를 받았다면 당신은 교회에 속한 것이었다.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 밖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성례전에 참여해야 했고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때때로 사람들은 교회에 순종해야만 할 만큼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먼저 성사(sacraments; 개신교에서는 ‘성례’로 번역하나 여기서는 중세 가톨릭교회에 대한 설명이므로 ‘성사’로 표기함- 역자 주)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성사는 은혜의 수단으로 아무도 성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일곱 개의 성례가 있었는데 모두 다 예전적인 의식이며, 라틴어로 적법한 사람에 의해 정확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집전될 때 유효한 것이었다. 첫 번째 성사는 세례였다. 모든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아야 했는데 이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었다(영아 사망률이 높던 당시 상황에서 즉각적 유아세례는 중요했다- 역자 주). 세례는 모든 사람이 아담에게서 받은 원죄를 씻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세례가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교회는 누구든지 세례를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종종 병약한 아이들을 받은 산파들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주기도 했다. 아이가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면 대부모(godparents)와 친구들을 초대하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 아이가 나이가 들면 견진성사(confirmation; 개신교에서의 입교)를 받게 되었다. 주교만이 견진성사를 베풀 수 있었다. 견진성사 때 주교는 아이에게 손을 얹고 기름을 붓는데, 이는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성령으로부터 강한 능력을 받기 위함이었다. 만약에 주교가 게을러서 자기 교구의 마을들을 방문하지 않는다면 견진을 받아야 할 나이의 아이들이 견진성사를 받을 수가 없었다(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견진성사는 믿음에 관한 일정한 지식을 갖는 것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교는 성사를 받아야 할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고 설명할 수 있느냐를 테스트하지 않고 성사를 행하는 것 자체가 은혜를 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세례와 견진성사가 한 번 받는 것이라면 다른 두 가지의 성사, 즉 고해성사와 미사는 자주 행하는 것이었다. 세례가 원죄를 다루지만, 사람은 자라면서 자범죄(actual sins)를 범하게 되기 때문에 그 죄들을 해결받기 위한 다른 성사가 필요했다. 고해성사는 바로 죄인들을 구해주는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고 사죄함을 받았다. 그리고 ‘보속행위’(죄를 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는 작은 죄에 대해서는 기도문을 외우는 것을, 중대한 죄에 대해서는 순례를 가는 것 등을 요구했다)도 있었다. 사람들은 미사에 가서 성찬을 받기 전에 고해성사를 끝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은 만약 자신들이 ‘고해성사에서 죄를 잊어버리면 어쩌나’,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면 어쩌나’ 하며 염려했다. 그리하여 성찬을 받는 것이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일까’ 염려하여 자주 성찬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모든 사제들은 매일 미사를 집전했다. 비록 사제들이 그 성찬을 받은 유일한 사람들이긴 했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미사에 참여하기만 해도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미사에는 참석하지만 성찬은 구경만 했다. 어떤 때는 사제와 그를 돕는 자들만이 미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래도 모든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은 성찬을 받도록 되어 있었고, 그것은 보통 부활절 전 한 주간이었다. 성찬을 받는다 해도 평신도들은 떡만 받았는데 이는 성찬을 받는 중에 그리스도의 피인 포도주를 흘릴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성사로는 신품(ordination), 혼배, 그리고 종부(extreme unction)성사들이 있다. 신품성사는 후보자를 축성하여 성사를 집례할 특별한 거룩함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제나 주교만이 고해성사, 미사, 그리고 종부성사를 집전할 수 있었다면, 주교만이 견진성사나 신품성사를 집전할 수 있었다. 혼배성사는 결혼할 수 있는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하고 연합하는 것을 유효화하는 성사였다. 비록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혼을 축복하기 위해 혼배미사를 원했지만 사제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일곱 번째 성사인 종부성사는 임종 직전에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사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의 보통 수단이었다.
대부분의 성사들은 신품성사로 자격을 갖춘, 그리하여 높은 지위를 가진 기독교인이 된 사제들이 집전했다. 그들이 가진 특권 때문에 사제들과 평신도들 사이에 갈등이 종종 있었는데, 이는 사제들은 종교적으로나 시민법적으로 전혀 다른 법 아래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죄를 지은 목회자들은 세상 군주가 아니라 주교만이 재판할 수 있었다. 성찬에서도 목회자(clergy)만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지 않았던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어떤 주교들은 세속 군주이기도 해서 교회의 권세뿐만 아니라 세상의 권세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종종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남용했다(예를 들어, 칼뱅의 아버지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어떤 사람을 빚 때문에 출교할 경우). 그들 중 일부는 독신 서약 혹은 청빈 서약에 따라 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많은 교구 사제들이 매우 가난했다. 그중 어떤 사람들은 진짜 사제가 다른 일을 하는 동안 교구의 일을 대신 하기로 고용된 대리였다. 종종 각종 남용은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연유되기도 했지만 (잘못된) 제도의 결과였는데,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목회자와 평신도 간의 갈등을 초래한 이유들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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