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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호]한산모시짜기(韓山모시짜기)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27.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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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14호
명 칭 한산모시짜기(韓山모시짜기)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67.01.16
소재지 충남전역



※ 본문설명

모시는 오랜 기간동안 이용되어 온 직물로서 일명 저포·저치라고도 하며, 모시나무가지를 꺾어 그 껍질을 벗긴 것을 재료로 한다. 통일신라 경문왕(재위 861∼875) 때 당나라에 보낸 기록으로 보아 외국과의 교역품으로 이용되었다. 모시풀은 다년생으로 뿌리쪽 줄기가 황갈색으로 변하며, 밑의 잎이 시들어 마를 때 수확한다. 보통 1년에 3번 정도 수확하는데 5월∼6월초, 8월초∼8월하순, 10월초∼10월하순이며 두번째 수확한 모시가 품질이 제일 좋다.

한산모시는 한산에서 만드는 모시로 예로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서 품질이 우수하며 섬세하고 단아하여 모시의 대명사로 불리어 왔다. 제작과정은 재배와 수확, 태모시 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굿 만들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모시표백 순이다. 우선 재배하여 수확한 모시를 훑고 겉껍질을 벗겨 태모시를 만든 다음 하루쯤 물에 담가 말린 후 이를 다시 물에 적셔 실의 올을 하나하나 쪼갠다. 이것을 모시째기라고 한다. 쪼갠 모시올을 이어 실을 만드는데, 이 과정을 모시삼기라 한다. 이 모시삼기의 과정은 실의 균일도가 가름되는 과정으로 한산의 모시삼기기술은 우수하여 균일도가 일정하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실을 체에 일정한 크기로 서려 담아 노끈으로 열 십(十)자로 담아 모시굿을 만든다. 모시날기는 실의 굵기에 의해 한 폭에 몇 올이 들어갈지 결정하는 것이다. 모시매기인 풀먹이기 과정을 거친 후 베틀을 이용해 모시를 짠다. 마지막으로 모시표백은 물에 적셔 햇빛에 여러 번 말려 백저포, 곧 흰 모시가 된다.

모시는 보통 7새에서 15새(보름새)까지 있는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 하고 숫자가 높을수록 고운 최상품으로 여긴다. 1새는 30㎝ 포폭에 80올의 날실로 짜여진 것이다. 모시는 습도가 모자라면 끊어지기 쉬우므로 더위에도 통풍이 안되는 움집에서 짜야 하고, 바람이 불거나 비오는 날에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근래에는 염소표백을 하여 흰 모시를 만들기도 하며, 섬유공업의 발달과 함께 수요가 줄어들어서 이 지방의 모시짜기 기술도 점차 쇠퇴하고 있다.

한산모시는 우리나라의 미를 상징하는 여름 전통옷감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아 제작기술을 보호하고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현재 한산 모시짜기 기능보유자로는 문정옥, 방연옥이 인정되어 있다.

※ 보충설명

모시는 기호지방에서도 짜는 곳이 여러 곳이나, 예로부터 한산지방의 모시가 이름이 있었다. 한산지방의 부녀자들은 대개가 모시를 짤 수 있는 기능을 지녔고 그와 같은 기술집단 가운데서 문정옥의 솜씨가 두드러진다.

모시는 다년생인 모시나무의 가지를 꺾어 그 껍질을 벗긴 것을 재료로 하여 짠다. 심은 그해나 다음해부터 수확하여 쓸 수가 있으며 5월 말에서 6월 초에 초수(初收)를 하고, 8월 초순에서 8월 하순에 이수(二收)하며, 10월 초순에서 하순에 삼수(三收)하여 한 해에 세 차례를 벤다.

잎과 옆가지를 따고 원대를 모시칼로 껍질을 벗긴다. 모시톱으로 외피를 훑어내면 이것을 태모시라 한다. 태모시는 물에 담갔다가 볕에 바랜 다음 모시올을 이빨로 쪼개낸다. 이것을 쩐지에 걸어 놓고 밑쪽과 끝쪽을 무릎에 비벼 맞이어 날줄과 씨줄로 한다. 이를 삶아서 모시올의 굵고 가늘기에 따라 새가 결정된다. 일곱새에서 보름새까지 있는데 모시올 10올을 1모라 하고 8모가 1새가 된다. 10새쯤 되면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고 곱다. 새가 결정되고 난 다음에는 날을 세운다. 열올의 실끝을 젓술대 구멍에 꿰서 날틀에 하나하나 걸어간다. 8새를 나르려면 날틀 한 끝에서 한 끝까지 서른두 차례를 돌아야 한다. 모시올이 바디에 꿰어지고 한 끝은 도투마리에 고정된다. 다 맨 모시올은 도투마리와 더불어 베틀로 옮겨진다.

베틀 앞에는 앉을개가 놓이고 거기에 올라 앉아서 모시를 짠다. 토끝이 걸린 매듭대를 앞에 안고 허리의 붓태줄로 매듭대 끝을 동여매고 바딧집, 바디, 잉앗대, 눌림대, 비경이, 사침대, 말코, 도투마리 등의 순으로 정리하고 짜기 시작한다. 모시를 짜는 데는 습도의 공급이 필요하기 때문에 때때로 물줄개로 날줄의 마른 부분을 적신다. 10새 이상의 세모시는 통풍이 잘 되는 방이나 마루에서는 짤 수가 없다.

습도가 모자라면 끊어지기 쉬우므로 삼복 더위에도 통풍이 안되는 움집에서 짜기 마련이다. 잘 짜는 솜씨면 4∼5일이면 한 필을 짤 수 있으며 모시 한 필에 소용되는 모시의 양은 약 1, 312g(350문)에서 약 1, 500g(400문)이 드는데 세모시는 375g(100문)이면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끝에서 손끝으로 짜는 모시의 수요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데 이는 현대사회의 복식문화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1928. 9. 9 ~ | 보유자 인정: 1967년 1월 16일

 

 

살을 째고 피를 매어 오뉴월 짧은 밤을
왈캉달캉 베를 짜서 논을 살까 밭을 살까
베를 걸어 한필 짜면 닭이 울고 날이 샌다
피를 매어 짠 모신데 어찌 이리 곱고 희냐
베틀에서 허리 펴니 이 내 몸은 백발이라
- 베틀노래 중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한산모시짜기”

모시, 곧 저포(苧布)는 우리나라 상고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기간 동안 이용되어 온 직물로서 모시풀, 곧 저마(苧麻)의 섬유를 가지고 제직(製織)하여 옷감으로 사용하여 온 동시에 외국과의 교역품으로도 이용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 제직기술은 고도로 발달하여 일찍이 40새(升, 피륙의 날을 새는 단위) 이상의 모시를 생산해냈는데 정교하기가 비길 데 없었다. 중국만 하더라도 30승포는 고귀한 용도로 사용되었고 길복(吉福)으로 15승포로 사용하여 왔던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모시(紵苧)는 마(麻)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草本)으로 삼(麻)을 가늘게 하여 만든 베를 전(絟)이라 하고 전이 가늘고 하얀 것을 저(苧)라 한다. 그러나 통상 우리가 사용하는 모시는 모시풀의 껍질을 벗겨 삼베와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모시베(苧布)라 하고 날이 아주 가늘게 짜진 모시베를 세모시베(細苧布)라 한다. 모시는 삼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직물로 사용되어 의류(衣類)로 발전되어 왔다. 또한, 천연섬유 가운데 우리나라를 알리는 질 좋은 특산물로서 해외로부터 호평을 받아 왔다. 이는 우리나라가 우수한 모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자연 풍토적 여건을 가지고 있으며 모시를 제직하는 기술면에 있어서도 인근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 등의 타 지역 모시 생산 국가들에 비해 차별화된 기능과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모시 생산지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한산지역의 모시기원은 삼국시대부터이며, 신라시대 한 노인이 건지산에서 약초를 캐러 올라갔다가 처음으로 모시풀을 발견하여 이를 이 지방에서 재배하여 모시짜기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산모시의 명성은 이미 삼한시대 그 이전부터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 특산품으로 자리를 차지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당시 인근의 변한과 진한 지역에서도 이미 광폭세포를 직조하였고 변한포 등이 진상품으로 강대국에 바쳐졌던 기록이 있으므로 예나 지금이나 타 지역에 비해 우수한 모시질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유리한 자연 환경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던 한산지역이 인근 지역과 함께 질 좋은 모시를 생산하였음은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조선시대 모시의 용도는 여름용의 소재로써 모든 종류의 옷에 사용되며 특히 외출용 겉옷과 의례용 포류, 그리고 여자들의 속바지류 등에 주로 많이 보인다. 또한 상복(喪服)과 군복(軍服)에도 사용되었다. 모시옷은 특히 하얗게 표백되고 잘 손질된 정갈한 옷 맵시 때문에 사대부가의 기품을 돋보이게 하는 고급의료이지만 이같이 표백한 흰색의 모시 외에도 다양한 색으로 염색을 들여서 입기도 하였는데 주로 쪽염과 치자염 그리고 홍화 염색을 많이 하였다.

 

근래에는 염소표백을 하여 흰 모시를 만들기도 하며, 섬유공업의 발달과 함께 수요가 줄어들어서 모시짜기 기술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967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11월 28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 6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택견, 줄타기와 더불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모시. 삼국시대 문헌에도 등장하며 경사와 위사 모두 저마를 사용하여 짠 것을 생모시라 하는데 까실까실하여 여름철 옷감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옥색, 치자색, 분홍색 등으로 염색하여 사용하였다.

모시 잘 짜기로 소문이 자자하던 문정옥 선생

문정옥 선생은 1928년 9월 9일 충남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 교율마을 302번지에서 부친 문팔봉 선생과 모친 신순철 여사의 5남 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3형제였는데 형제간에 우애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런 연유로 큰아버지가 집안 대소사를 결정하였는데 아이들 교육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여자아이들은 가르치면 못 쓴다’는 어른들의 편견 때문에 손아래 남동생들은 학교를 다녔으나 선생은 집에서 가사 일을 도왔다. 당시 화양면 교율마을에서는 모시를 많이 짰다. 문씨 집안에서는 선생의 모친만이 모시를 짰는데, 솜씨가 좋아 보름새 등 고운 세모시를 많이 짰다. 힘든 모시 짜기를 일부러 시키지 않았지만 선생은 모친의 어깨너머로 모시 째기, 삼기 등을 스스로 배웠다. 타고난 눈썰미 덕분에 또래들보다 수도 잘 놓고, 골무도 잘 만들어서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칭찬을 듣곤 했는데, 모시 자기 역시 그러했다. 선생이 모친의 가르침대로 모시를 짜서 처음으로 1필을 완성한 것이 16세 때의 일이었다. 21세 되던 해(1948년)에 한산면에 살던 김기태 선생과 혼인하였다.

 

혼례를 치른 뒤에는 남편인 김기태 선생이 베틀을 짜주어 다시 모시 짜기를 지속할 수 있었다. 평생 모시를 짜왔던 선생이 잠시 손에서 모시를 놓았던 적은 한국전쟁 때뿐이었다. 시댁은 가난했던 까닭에 소유한 밭이 없어 모시를 별도로 재배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시장에서 태모시를 사다 짜거나 삯모시를 짰다. 당시, 무엇보다도 모시를 잘 짜면 며느리를 잘 얻었다고 하였고, 모시를 못 짜면 며느리를 못 들였다고 했을 정도로 모시를 잘 짜는 며느리들이 인기였다. 그런 까닭에 식구들 식사준비나 다른 집안 일들, 들일은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모두 맡아서 하고 선생은 모시만 짰다. 모시를 잘 짠다는 소문이 돌면서 먼 곳에서도 모시를 맡기러 오곤 했는데 보통 모시 한 필 가격의 2~3할 정도를 공임으로 받았다. 삯모시는 동네 사람들이 와서 사정하면 짜주곤 했는데 삯모시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다 날아 가져오면 제일 어려운 모시매기와 짜기 과정을 해주었다. 모시 짜기를 한 지 20여년이 넘자 그 솜씨가 널리 알려지면서 소문을 듣고 외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1967년 1월 16일 마침내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보유자에 오르게 되었다. 그저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해온 것뿐, 보상을 바라던 것은 아니었다. 2000년에는 선생의 뒤를 이어 첫 제자 방연옥 선생이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이외에도 전수교육 조교인 박승월, 고분자 선생이 활동하고 있다. 선생은 현재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어 한산면 지현리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모시 일을 하고 싶은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주요작품

한산모시, 문정옥, 2160×30cm

한산모시 (Hansan mosi)
문정옥 선생은 모시의 전통과 현재화 움직임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한산을 중심으로 한 모시 활성화 노력이 일정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도 선생의 역할에 힘입은 바 크다. 선생의 작품은 같은 일을 하는 분들과 비교할 때, 기술의 숙련도는 물론, 결과물의 완성도에서도 빼어나다. 옷감의 차이는 눈으로 변별되지 않더라도 써본 사람이 더 잘 아는 법이다.
문정옥 선생이 사용하던 베틀

 

 

용두머리: 베틀 선다리 위쪽에 가로로 놓여 있으며 중간과 가장자리에 홈을 파서 쇠꼬리와 눈썹대를 끼우도록 된 나무이다.
베틀신대: 베틀 신 끝에 달려서 잉아대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나무 막대
벱대: 도투마리에 날실을 감을 때 날 올들이 서로 붙지 못하도록 하며, 매기를 할 때 날실의 중간 중간에 끼워 넣는 직경 2~3cm 정도의 통으로 잘라서 만든 대나무 막대기
도투마리: 날실을 감아 두는 틀
채머리: 선다리 뒤쪽에 있는 누운다리로 도투마리를 얹도록 한 지지대
비경이: 잉아올과 사올을 벌려주며 북실이 잘 통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는 역할
선다리: 베틀을 수직으로 지탱하는 버팀목이며 위에는 용두머리가 가로로 놓여 있다.
: 씨실인 실꾸리를 넣고 북 바늘로 고정시켜 바디 바로 앞 날줄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실을 짜는 도구이며 옆에 작은 구멍이 나서 실을 통과시키게 되어 있다. 무명실용 북은 크기가 크고, 모시용 북은 작다.
누운다리: 베틀을 수평으로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앞은 높고 뒤는 낮게 되어 있다.

 

약력
1928
서천군 화양면 출생
1967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인정
1989~2003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작품전 출품
2008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명예보유자 인정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1947. 12. 16. ~ | 보유자 인정: 2000년 8월 22일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위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 김말봉 작사, 금수현 작곡의 가곡 <그네> 중


 

여인네들의 땀과 피와 침과 눈물로 완성되는 천년명품 한산모시

 

우리나라 직물의 역사상 마직물은 견직물과 함께 가장 오래전부터 의료로 사용되어 왔으며 특히 모시는 천연섬유 가운데 우리나라를 알리는 질 좋은 특산물로서 해외로부터 호평을 받아 왔다. 이는 우리나라가 우수한 모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자연 풍토적 여건을 가지고 있으며 모시를 제직하는 기술면에 있어서도 인근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 아시아 등의 타지역 모시 생산 국가들에 비해 차별화된 기능과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대 우리나라 저마 직물의 제직에 대한 문헌 기록은 『중국정사조선전(中國正史朝鮮傳)』에 나타난 기록이 가장 오래된 사료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마직물 재배와 제직의 역사는 부족연맹국가시대에 이미 한반도 전역을 포함한 북방의 부여, 옥저, 동예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었고 당시의 마직물은 여름용 의료로써 남녀 외출용 겉옷이나 여자들의 일상복으로 많이 보편화되었으며 제직 기술면에 있어서도 폭이 넓고 섬세한 마직물을 제직하였을 정도로 이미 그 기술이 우수하였다.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저마(苧麻) 껍질을 쪼개고 이은 실로 짠 우리나라 여름철 직물이다. 특히 한산의 모시는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생길 만큼 가늘고 곱기로 유명하다. 모시풀은 다년생 식물로 보통 1년에 3번 정도 수확하는데 수확 시기가 이르면 섬유가 약하고, 늦으면 올이 굵고 거칠기 때문에 8월 초순에서 하순 사이에 수확하는 모시가 제일 좋다. 타지역 모시와 구별되는 한산지역의 모시짜기 특성은 토양과 기후, 지세를 바탕으로 생산된 모시풀의 질과 제직 기술면에서 우수성을 갖는다. 세저포(細苧布), 광폭세포(廣幅細布), 문저포(紋苧布), 사저포(紗苧布), 저포교직(紵布交織)의 측면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1. * 세저포 : 머리카락보다도 곱게 짜여진 모시로 삼국시대는 30~40승까지 제직되었으며 고려시대는 20승포, 조선시대는 15승포까지 제직되었다. 모시의 승수는 천의 폭이 넓으면 승수가 높아지므로 당시 천의 폭을 알지 못하면 모시의 섬세함의 정도를 추측하기 어렵다. 오늘날 한산모시의 포폭은 대개 29~36cm이며 보통 최고로 곱게 짤 수 있는 것이 12승 모시라고 한다.

  2. * 광폭세포 : 폭을 넓게 해서 짜서 만든 모시로 삼국시대 문헌기록에 나타나며 당시 예측되는 천의 폭의 범위는 50cm 내외, 또는 60~78cm 내외로 추측된다. 광폭의 모시는 고려시대 모시이며 현재 한산지역에서는 62cm까지 제직하고 있다.

  3. * 문저포 : 고려시대 문헌기록에는 나타나나 현재까지 유물이 없으므로 그 제직법을 잘 알 수는 없으나 고려후기 직물 중에 화문(花紋)으로 된 생초 직물처럼 사직과 평직으로 교차된 형태로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4. * 사저포 : 사직(紗織)으로 짠 고급모시로 추정되며 중국의 공물로 보낸 물품 중에 사저포 공평포 등이 있었다. 당시 사직으로 짠 견직물처럼 동일한 기법으로 제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5. * 저포교직 : 저마교직(苧麻交織), 사저교직(絲苧交織), 면저교직(綿紵交織) 등 모든 다른 천연섬유와 교직을 행하여 왔다. 일반적으로 사저교직은 경사올을 견사로 짜고 위사올을 저사로 짰으며 면저교직은 “춘사”라 하며 주로 경사올을 면사로 하고 위사올에 저사를 넣어서 짰다.

     

 

화학섬유가 판을 치는 오늘날에도 모시의 희소가치가 여전히 높은 것은 인조섬유가 범접하기 어려운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피드와 효율을 지향하던 산업화의 시대가 지나고 근래 삶의 가치에 주목하게 되면서 모시는 다시 미래형 섬유의 하나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모시와 다른 섬유를 교차 직조하여 만든 천이 기능성 섬유로 활용되는 등의 상황은 모시의 저력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산모시짜기 기능은 1967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500년 역사를 지닌 한산모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방연옥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방연옥 선생은 1947년 12월 16일 충남 서천군 기산면 가공리 36번지 옹근절 마을에서 부친 방자순 선생과 모친 박수영 여사의 2남 6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선생이 모시 짜기를 처음 접한 것은 친정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환갑이 넘어서까지 모시 짜기를 하였는데 선생이 모시 짜기를 배우려고 할 때마다 모시짜기가 정말 힘들다며 다른 일을 하라고 하며 못 배우게 하셨다. 그러나 모시 짜기를 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자란 선생은 자연스레 접하게 되었고 6살 때부터는 바디 꿰기를 할 정도로 모시 짜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숙제보다 모시 일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는데, 사실 한창 모시에 재미를 붙였을 때에는 학교 가서도 공부하는 것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모시 하는 것만 생각나곤 했다. 그래서인지 훗날 문정옥 선생께 모시 짜기를 전수받을 때 이미 어머니한테 배운 바가 있어 보다 쉽게 터득할 수 있었다.

 

선생의 나이 29살 되던 1973년 한산면 지현리에 사는 이소직 선생과 혼인하였다. 한산면으로 시집와서 살던 중 우연한 기회에 동네에 사는 문정옥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모시 짜기를 배우게 되었다. 문정옥 선생 댁에서 짬이 날 때마다 일을 도와드리던 중 문정옥 선생의 권유로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모시 짜기를 배우게 된 것이다. 1981년 생애 최초로 짠 모시 4필은 약 12만원을 받고 팔았다. 당시 쌀 2가마니에 해당하는 꽤 큰 금액이었다. 모시를 판 돈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생활비로 가정경제의 보탬이 되기도 하였다.

 

실을 입술로 찢어 모시섬유를 만드는 ‘모시째기’는 숙련도에 따라 품질이 좌우된다. 한산모시의 ‘숨은 비법’은 이 모시째기에 있다. 모시풀 껍질을 벗겨서 말린 다음 그것을 앞니로 쪼개는 과정은 입술이 다 부르트고 피가 날 정도로 매우 고단한 작업이다. 또한 여러 과정을 거쳐 베틀에서 모시를 짤 때도 건조한 날에는 모시가 다 바스러져서 기후가 안 좋다 싶으면 한여름에도 문을 다 닫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해야 한다. 그야말로 여인네들의 땀과 피와 침과 눈물이 고스란히 배어야 하나의 명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한산모시이다. 선생 역시 처음 모시 째기를 할 때 입술이 부르트고 피가 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나중에는 입술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라고 했다. 또한 모시를 쪼개려면 앞니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때 불편함이 없도록 한산지역에서 모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치과에서도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을 쓴다고 한다. 모시 일을 하면서 온몸이 파스투성이, 입술에 굳은살이 생겼고, 일하기 편하게 이도 새로 해 넣었다. 그렇게 30년을 꼬박 온몸을 혹사시켜왔다. 문정옥 선생으로부터 모시 짜기를 배우면서 모시 짜기 전 과정을 습득하게 되었다. 1980년 전수장학생이 되었고 1986년 이수자로 인정되고, 1987년 전수교육조교가 되었다가 2000년 8월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품질로 보나 들인 공력으로 보나, 모시는 서양에서 들어온 천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모시 한필이면 전통한복 한 벌하고 남자 저고리 하나가 나오는데, 좀 비싼 듯해도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대도시 백화점의 명품 옷들에 비하면 착한 가격이지요. 모시옷은 대물림 하며 입는 옷입니다.”

적삼과 치마 한 벌에 남자 윗도리 한 벌이 나오는 모시 한 필의 가격은 고운 세저는 150만원, 중저는 100만원, 막저는 그보다 훨씬 싸다.

 

“처음에는 비싸다고 하시는 분들도 만드는 과정을 보시면 비싸지 않다고 해요. 아토피를 전혀 일으키지 않는 천연섬유요, 모시를 완성하기까지 손길이 4000번이나 들어가는 명품입니다.”

한산 지역에 시집와서 이곳의 삶을 배웠고 모시를 짜왔다. 여인에서 여인으로 전수되던 전문화를 지켜 마침내 한산모시짜기 기능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이제 세계인의 전통이 된 만큼 기술을 배우는 후학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옛날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모시를 벗 삼아 오순도순 모여 일하면 참 좋겠다.”며 대대로 한산모시짜기의 명맥을 이어나갔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내비쳤다.

 

작품

백모시 / 30×2160cm
모시풀로 만든 직물을 모시라 하며 직조 후에 표백과정을 거친 것을 백모시라 한다.

모시_31x2160cm

 

생모시와 백모시 / 각 32×2160cm
경사와 위사 모두 저마를 사용하여 짠 것을 생모시라 하는데 까실까실하여 여름철 옷감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옥색, 치자색, 분홍색 등으로 염색하여 사용하였다. 생모시를 표백한 것을 백모시라 하였으며 다듬이질을 하여 봄, 가을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백모시_1필 폭 31cm

백모시_폭 31cm

 

한산모시

 

제작과정

 

1) 태모시 만들기 : 모시나무를 베어 모시의 겉껍질을 벗기는 과정이다. 모시나무에서 겉껍질을 벗긴 후 다시 부드러운 속살만을 골라내는데, 낫과 같이 생긴 손가락 크기의 특수한 칼로 훑어서 겉껍질과 속살을 분리시킨다. 벗겨낸 속살을 한주먹의 다발로 묶어서 4~5회 물을 반복해서 적시며 양지에 말린다.
2) 모시째기 : 잘 말린 태모시를 이와 입술을 이용해 쪼개는 과정인데, 이때 모시의 굵기가 결정된다. 모시는 굵기에 따라 올의 굵기가 가장 가는 상저(세모시), 중간 정도의 중저, 가장 굵은 막저로 구분한다. 따라서 모시의 품질은 바로 장인의 입술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시는 보통 7새에서 15새(보름새)까지 짜는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고 하며, 숫자가 높을수록 상품으로 여긴다. 1새는 30cm 포폭에 80올의 날실로 짜인 것을 말한다.
3) 모시삼기 : 모시째기가 끝난 모시는 “쩐지”라는 틀에 걸쳐 놓고 한 올씩 입술의 침을 이용해 이어붙인다. 한 주먹 정도의 모시 한 태래를 ‘한 굿’이라고 하는데 10굿 정도가 돼야 한 필의 모시를 짤 수 있다. 
4) 모시날기 : 모시째기가 끝난 모시는 ‘조슬대’라는 틀에 매어 한필의 모시를 짤 만큼의 실을 감는다. 모시날기를 할 때 실이 엉키지 않게 잘 해야 모시를 잘 맬 수 있다.
5) 모시매기 : 모시날기가 끝난 모시를 모시짜기에 앞서 날실을 부드럽고 보푸라기가 생기지 않도록 콩풀을 먹이면서 모시베틀에 얹을 ‘도투마리’라는 틀에 감는 과정이다. 이때 왕겨불로 콩풀을 말리면서 작업을 한다.
6) 꾸리감기 : 모시는 날줄과 씨줄로 엮는다. 모시매기는 날줄로 쓸 모시원사이고, 씨실이 되는 실꾸리를 만들어서 북집에 끼워 넣는 작업 과정이다. 보통 7, 8승 정도의 모시 한 필을 짜는 데는 날실로 모시굿이 10굿이 필요하며 씨실에는 꾸리용 모시굿 8굿 정도가 필요하다. 이것을 실꾸리로 계산하면 모시 한 굿은 실꾸리 약 두 개 정도에 해당되므로 씨실에 필요한 실꾸리의 수는 모시의 곱고 섬세한 정도에 따라 약 10~16개가 사용된다.
7) 모시짜기 : 모시매기 과정을 거쳐 날실이 감긴 도투마리를 베틀의 누운 다리 위에 올리고 바디를 끼운 날실을 빼어 각각의 잉아에 번갈아 끼운다. 짜기를 할 때에는 베틀신대에 달려 있는 베틀신끈을 오른발의 끌신에 걸고 오른손에는 북을 쥐며 왼손에는 바디집을 잡아서 짤 준비를 한다. 모시가 짜이는 원리는 끌신을 당기고 놓고 함에 따라 베틀신대가 고정되어 있는 원산이 눈썹대를 움직여서 사올과 잉아올을 교차시켜 주게 되므로 매번 날실이 교차될 때마다 씨실이 담긴 북집을 통과시켜 씨실을 걸어 주게 되므로 천이 짜이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모시를 짜는데 도중에 날올이 마르면 준비해 둔 물소래기의 물로 중간중간 물을 축여가며 짜야 도중에 실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
8) 실 잇기 : 모시를 짜는 도중에 제일 힘든 것은 도중에 실이 끊어지는 일이다. 실이 잘 끊어지는 이유는 모시실의 질에도 문제가 있지만 습기가 부족해서 실이 건조하면 잘 끊어지게 된다. 실이 끊어졌을 때는 베틀 옆에 준비해 둔 잇기용 모시실과 눈썹끈에 붙여 둔 풀솜을 이용해서 실을 이어준다.
9) 표백하기 : 다 짠 모시는 흐르는 물이나 더운물로 대충 헹군 뒤에 콩즙을 빼기 위해 잿물에 1~2시간 정도 담궜다가 건져내고 더운물을 끼얹어가며 방망이로 두들겨서 콩즙을 깨끗이 빼내는데, 이렇게 한 모시를 반제라고 하며 생모시는 이것을 그대로 말려서 손질한 뒤 보관한 것이다. 생모시를 반쯤 표백한 것을 ‘반저’라 하고 완전히 표백한 것을 ‘백저’라 한다. 반저는 생모시의 연한 갈색에서 미황색을 지닌 색이며, 백저는 눈이 부시게 하얀 모시 본연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는 흰색이다. 그해 옷을 지어 입지 않을 경우는 콩즙은 뺀 후에 풀을 하지 않고 잘 접어서 보관하고 염색을 할 경우엔 풀을 하기 전에 해야 하며 모시염색은 쌀겨나 쪽, 그리고 치자나 홍화 염색 등 색이 차분하고 은근한 천연염색을 많이 한다.

 

1_모시톱으로 훑어내기

2_무릎에 대고 잇기

 

3_모시실 감기

4_모시짜기

약력
1947년
출생
1980년
문정옥 선생 사사
1982~1986년
전승공예대전 7~11회 입상
1990년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1993년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1995년~1996년
전승공예대전 19~20회 입상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인정
2003년
충청남도 공예품대전 특선
2003년
전국공예품대전 입선
2004년
서천군 공예품 및 관광기념품 경진대회 대상
2000년~현재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및 전수활동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