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기독교란 무엇인가?

문성식 2012. 1. 30. 14:52

 

 기독교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

 

  지금까지 논술한 것으로, 기독교는 좋은 뉴스, 즉 복음(福音)이란 말씀과, 또 이 뉴스는 하나님에 대한 뉴스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데,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도 있기 때문에 이 무신론이라는 이론이 이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몇 가지 생각했습니다.

  이제 계속해서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찌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그 이유를 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몇 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로마서 1장 19절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이런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음절에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첫째로, 우리 사람 자체를 가만히 살필 때, 안으로 살필 때, 내성할 때에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 한 가지는, 바깥 모든 세상, 외계의 대자연과 전 우주를 바라볼 때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전능을 우리는 자연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이 시간에 우리 속에 보여 주신 그 하나님의 자체를 잠깐 찾아볼까 합니다.


      인생의 종교 본능

 

  첫째는 인간의 종교성입니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지요. 그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것은, 우리 사람에게는 종료가 있습니다. 금수 사회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문명한 사회에는 교회가 있고, 야만 사회에는 신당이 있습니다. 동양에도 그렇고, 서양에도 그렇고, 아프리카에도 그렇고, 또 현재 남양군도에도 그렇고, 또 현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옛날에도 그렇고,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어떤 사회 문화 가운데 들어가 보던지 종교가 없는데는 도무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안 계신 듯이 사는 사람들도 흔히 위급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는 믿지 아니하는 형제와 이야기할 때, 그 사람 말이, 자기는 하나님 앞에 기도는 도무지 하지 않지만 몇 해 전에 38선을 몰래 넘어올 때에는 하나님을 찾았다고 대답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괴뢰군(傀儡軍)에 억지로 붙들려 나갔다가 석방되어 나온 애국 청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청년이 괴뢰군과 함께 몰려서 유엔군이 북진하여 올라갈 때, 저 삼각산 어떤 골짜기에 숨었는데 유엔군 비행기들이 대 편대를 지어 와서 폭격을 하고 기관총 소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보니까 그저 공산당들과 정치보위부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솔포기 아래 엎드려서 "하나님, 하나님"하고 하나님을 찾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랍니다. 사람이 위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떤 인류학자는 "사람은 불치(不治)병적(病的)으로 종교적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여러분, 두 가지를 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본능이 있는데, 그 본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본능을 만족시킬 대상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 사람에게는 먹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 먹는 본능을 만족시킬 음식물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사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사교할 수 있는 많은 다른 친구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성에 대한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남성과 여성이 있습니다. 본능이 있으면 반드시 기기에 대상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본능이 생겼습니다.

  가령 눈을 보면, 눈이 필요하게 쓸만한 빛이 있을 것입니다. 빛이 없다고 하면 눈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귀가 있습니다. 이 귀가 들을만한 소리가 있습니다.

  또, 우리 사람의 육체를 가만히 보면 감각이 있습니다. 가령 감각하는 기관, 눈이든지 코든지 하는 감관(感官)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냄새가 있습니다. 만일에 세상에 빛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 사람에게 눈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깊은 굴속에 못이 혹 있는 수가 있는데, 그런 못 가운데 사는 고기는 다른 것은 다 있지만 눈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항상 캄캄한데 사는 고기에게 눈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감관이 있는 것은 벌써 대상이 있는 까닭에 감관이 생긴 줄 압니다. 빛이 있어서 눈이 생겼고, 소리가 있어서 귀가 생긴 줄 압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은 이런 종교적 동물이요, 종교성이 있고 무엇을 숭배하려고 하는 영혼으로써 동경하는 이런 마음, 부인하려고 하여도 부인할 수 없는 종교적 욕망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대상만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인간 속에 종교성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신 까닭입니다.

  왜 몸에 풀이 위로 자랍니까? 위에 태양이 있는 까닭입니다. 왜 사람의 심령이 높은 것을 앙망(仰望)하고 동경합니까? 그 위에 하나님께서 계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플라토(Plato)라고 하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무신론은 한 질병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환자입니다.

  우리는 다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병으로 보지 못합니다. 이런 소경은 빛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인간의 종교성을 살펴 볼 때, 우리는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도덕성

 

  다음에 우리 인간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둘째로, 인간에게는 도덕이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의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유명한 말을 아 아실 것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 보통으로 말하면, 양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무슨 일을 대할 때든지,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분별해 줍니다.

  물론 어떤 때는 양심이 마비될 때도 있습니다. 허지만 아주 마비는 안 됩니다. 언제나 어느 한 구석에서 선·악을 분별하여, 선하게 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길을 갈 때는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이 양심이란 것이 언제든지 속에 있어서 잘할 때는 칭찬해 주고, 잘못할 때는 책망해 줍니다.

  물론, 여기에도 인간의 이런 도덕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여러 가지로 설명해 내보려고 애씁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장하기를, "양심은 한 종족의 공통된 유전적 산물이다." "양심은 교양의 산물이다." 또는, "환경의 산물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후천적 원인으로써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물론 양심가운데 후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후천적 요소를 다 제해 부리고도 그 속에 선천적 요소가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도덕적 법칙이 어디서 왔는가? 성경은, "양심은 마음에 생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다음에 바르게살기 위하여 도덕적인 법칙, 곧 하나님의 율법을 그 속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는 자연법칙을 두신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이 자연법칙을 준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 생활에 있어서는 이 도덕적 법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자연 법칙과의 관계와 우리 사람과 도덕적 법칙, 즉 양심과의 관계는 다릅니다. 자연법칙과 물질과의 관계는 그저 그대로 되는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람은 인격적 존재로 지음을 받아 자유가 부여되었음으로 그 관계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바로 쓰기 위하여 양심이 또한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양심의 방향을 따라 자유를 옳게 사용할 때에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고, 저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면 자연히 그 속에는 물이 있다고 결론하는 것이 아마 정당한 이론일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지라도 양심이 있고, 저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지라도 거기에도 반드시 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배후에는 큰 양심이, 우주의 배후에는 대 양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이 음성을 들을 때,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말했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이 양심을 전연 무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양심이 화인 맞은 것처럼 되어서 마비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요히 자리에 누울 때, 혹은 아침 일찍이 깨어서 고요히 자기를 살펴볼 때는 누구나 이 양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은 곧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스스로 살펴볼 때, 다시 말하면 인간의 종교성, 인간의 도덕성을 살펴 볼 때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우주의 원인

 

  그리고, 지금은 로마서 1장 20절에 가르쳐 주시는 말씀, 곧 "그 만드신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셨다" 하는 말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현대를 우주시대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이 면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간단히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과의 법칙'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보십시오. 우리가 다 인과의 법칙을 믿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이 인과의 법칙이 과학의 기초가 됩니다. 인과의 법칙대로 안되면 과학이 성립 못될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꼭 옳습니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대 우주를 볼 때, 이것은 어떤 큰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큰 대 우주의 이런 결과가 생겼은즉, 반드시 제일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제일 원인이 무엇일까요?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신 까닭으로 이 우주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라고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이 우주를 볼 때 큰 운동하는 움직임을 보고 특별히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이 움직임을 처음 시작한 분이 있겠다. 그 분은 하나님일 것이다" 이렇게 또한 주장했습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보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알 수밖에 없는데, 이 진리를 부인하고자 하면, 우주는 본래부터 영원까지 그냥 있다고, 요새 범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무시무종(無始無終)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우주가 영원하다. 이 우주 자체가 영원하다"하는 이런 주장은 오늘의 과학시대에 와서는 그렇게 강하게 주장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늘날의 과학적 연구대로 살펴보면, 이 우주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우주는 일정한 시간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거의 단언합니다. 요즘 과학자나 천문학자들은, 이 지구나 태양계나 우주 전체가 몇 해 전부터 시작이 되었겠나 그것을 측정해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라늄 원소의 그 방사하는 것을 측정해 보고 어느 정도까지 확실히 압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연령은 대략 33억 5천만년쯤 되었다고 합니다. 우주 전체의 연령은 약 백억 년으로 추산합니다. 물론 상당히 오래 전이지요. 그러나 일정한 시간에 시작한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을 다 인정합니다.

 

  이 지구에는 여러 가지 생물이 많지마는, 생물이 이 지구에 영원히 있었는가?

  지질학을 연구해 보면,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생물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구에 영원부터 살았느냐? 지질학을 연구해 보면, 일정한 시기 그것도 아주 말기에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 영원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식물도 영원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주 자체가 영원 전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히브리서 3장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말할 때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의 배후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無限)절대(絶對)의 신입니다. 하나님이 배후에 다른 원인이 있으면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수학을 좀 공부해 보신 분은 무궁대(無窮大) 또는 무한대(無限大)의 개념을 알 것입니다.

  하나를 하나로 제하면 하나입니다. 하나를 영으로 제하면 무한대라고 합니다. 이 무한대는 열을 영으로 제하나, 만을 영으로 제하나 무한대로 같습니다. 그런 반대의 이론은 이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과의 경지에서 볼 때에 이 우주는 반드시 지은이가 있을 것이 분명하고, 그 우주를 지은이가 계시다고 할 것이면 무한 절대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믿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주의 질서와 고안(考案)

 

  또, 이 우주를 다른 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우주의 현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살펴보면 되는대로 복잡한 것 같지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조직이 꼭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 하늘을 쳐다보면, 별이 되는대로 널려있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망원경을 통해서 자세히 보면 꼭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계의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가 있습니다. 일정한 속도가 있습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와 속도가 있습니다. 이런 항성 계가 여럿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갤럭시(성군(星群:별무리) 가 되고, 이런 것들이 많이 모여서 대 우주가 형성됩니다. 아무리 크지만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큰 것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을 분석하는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볼지라도 그렇습니다. 분자를 원자로 분석합니다. 원자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도 양자가 있고, 그 양자를 중심 하여 빙빙 도는 전자가 있는 것이 마치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데서부터 작은 데까지 질서가 있습니다.
  또, 보십시오.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을 보면 모든 것에 고안이 있습니다. 꽃을 보십시오. 이 꽃 한 송이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그와 같은 꽃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많이 생각해야 그 같이 만들 수 있겠나? 꼭 고안이 있습니다. 새 한 마리도 고안이 꼭 있습니다. 나비 한 마리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어떻게 아름답게 생겼는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동물과 식물이 서로 조화되어 살게끔 된 것을 보면, 기막힐 정도로 놀랐습니다. 흔히 꽃이 있으면 벌들과 나비가 왔다 갔다 하지요. 벌과 나비가 왜 왕래합니까? 물론 꽃 속의 꿀을 빨기 위해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나, 꽃은 꿀을 거저 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꽃가루가 서로 왔다갔다해서는 결국 씨를 맺게 만듭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동물이 쓸데없다고 호흡으로 내버린 탄산가스는 나무와 풀에 유익합니다. 나무와 풀은 동화작용으로 탄소를 섭취하고 내 버리는 산소는 동물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이렇게 동물과 식물이 협동하여 살게 만들었습니까?

  이 우주에는 꼭 고안이 있습니다. 일정한 목적에 의한 고안이 있습니다. 비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묘한 것이 있습니다. 태평양에 가면 물이 많지요. 햇빛에 쪼여서 태평양의 물이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공중에서 찬바람을 만나서는 다시 물이 되어 비가 되어서 떨어집니다. 빗물이 떨어져서 몇 가지 작용을 하는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우선 공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이 물방울이 내려오면서 공기 속의 먼지를 모두 잡아 가지고 내려옵니다. 그러기에 비 온 다음의 공기가 신선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까?

  비가 오면 이 땅을 아주 깨끗이 씻어줍니다. 비가 오래 안 오면 이 땅이 아주 더러워집니다. 저 백운대 위의 먼지를 누가 씻습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서 깨끗이 씻어 버립니다. 그것뿐입니까? 빗방울이 사막에 떨어져서는 풀이 자라고, 곡식이 자라고, 나무에 열매가 맺게 합니다.

  땅을 깨끗이 씻은 빗방울은 모여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되어서 더러운 것들을 다 씻어다가 마지막에는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닷물이 짭니다. 왜 바닷물이 짭니까? 짜야 소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깨끗이 소재하고, 더러운 것을 다 흘러 버리게 하고, 풀과 나무가 자라게 하기 위하여 간단없이 순환하게 합니다.

  전에 제가 제네바에 가보니, 거기 호수 옆에 꽃을 가지고 시계를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글자를 모두 꽃으로 만들었더군요. 그 속에 기계를 묻었습니다. 큰바늘이 돌아갑니다. 꽃시계입니다. 이 꽃시계를 보고, 저절로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안 있는 우주를 보면서 고안자 곧 창조자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큰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이 우주에 대한 이론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나는 모르겠다"는 액나스티즘 즉 불가지론(不可知論)이요, 또 하나는, "이것이 다 거저 되었다. 우연히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9편 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穹蒼)이 그의 솜씨를 우리에게 나타냅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 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애쓰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고, 이 하나님께서 개인의 운명을 다스리고, 이 하나님께서 국가와 민족의 전체 운명도 총찰(總察)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시되 수 천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화를 삼 사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서도 순천(順天)자는 흥하고, 역천(逆天)자는 망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튼튼히 믿고, 어떠한 환경을 당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 신앙을 전파하여 우리 민족을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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